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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게임을 잘함-6화 (6/361)

006화. 알바녀(이서윤) 2

"무슨 문제라도?"

"에?"

남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린 귓가에 맴도는 가수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 아니요."

이서윤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서는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밖이 저렇게나 추운데, 남자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라면 한 봉지를 들어 바코드를 찍는 이서윤.

무의식적으로 낚아채듯 남자의 반바지 아래 맨다리를 눈에 담는다.

다른 한 봉지의 바코드를 찍으면서 또다시.

그렇게 바코드를 다 찍고 얼굴을 보며 말하려는데, 괜히 긴장이 됐다.

"저기…."

남자가 익숙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이서윤에겐 낯선 일이었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긴장하는 일은.

"네?"

"봉지도, 같이 결제해 드릴까요?"

"아, 네. 그, 잠깐만요."

등을 돌려 벽 쪽 냉장 진열대를 향하는 남자.

이서윤은 용기를 내 그의 근처로 갔다.

편의점 직원으로서의 특권을 이용할 시간이었다.

특권.

바로 친절한 척 자연스럽게 말걸기였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다행히 목소리가 평소의 덤덤한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아뇨, 그냥. 뭐 딱히 찾는 게 있다기 보단…."

"…있다기 보단?"

"먹을 만한 거 있나 둘러보는 중이었어요."

"아…."

그 말을 들은 이서연이 세상 열심히 진열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거."

딸기 크림 슈크림.

남자들이 유난히 많이 찾는 제품 중 하나였다.

"저게 인기가 그렇게 많더라고요."

남자의 시선이 자기가 가르킨 곳을 향했다.

자신의 행동이 이 남자에게 영향을 줬다는 사실에 이서연은 모종의 충족감을 느꼈다.

"그래요? 그러면 한 번 먹어 보죠 뭐."

남자가 딸기 크림 찹쌀떡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이서연을 쳐다봤다.

[만족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남자의 목소리.

이서연은 칠칠치 못하게 표정이 풀릴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친….'

엄청난 파괴력.

남자 때문에 이렇게 떨리긴 중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서윤은 한껏 들떠서 진열대 탐색을 재개했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여자인 이서윤이 남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 방도가 없었기에, 그녀는 열심히 기억을 되짚었다.

남자들이 딸기 크림 찹쌀떡 말고 또 유난히 많이 찾는 제품.

그렇게 그녀의 눈에 '초코 크림 슈크림'이 들어왔다.

'저거 진짜 이름 문제 있는데….'

볼 때마다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제품이었다.

이서윤은 남자들 취향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초코 크림 슈크림을 건넸다.

설레는 마음으로 반응을 살핀다.

그런데 손에 든 초코 크림 슈크림을 쳐다보는 남자의 반응이 영 미묘하다.

어딘가 질색하는 기색마저 보이기에 이서윤은 다급히 덧붙였다.

"요즘 남자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 아시죠?"

다행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시원찮은 반응이라 느낀 이서윤이 조급함을 느꼈다.

'아, 역시 저건 좀 아니었나….'

"그리고 또-"

실수를 만회해야한다는 생각에 그녀가 다시 또 탐색을 재개하려 했지만-

"단 건 여기까지면 될 것 같아요."

남자의 만류에 의해 저지된다.

시원찮은 반응 뒤에 거절 의사.

'설마 화났나?'

들떴던 기분이 초조함으로 바뀐다.

"아. 단 걸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말하면서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 시선이 어색하게 진열대를 떠돌았다.

"별로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먹으면 맛있는데 굳이 찾아서 먹지는 않고 너무 단 건 또 별로인…."

"아. 그거.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콜라는 좋아해서 자주 마셔요."

"콜라요?"

하.

남자에게 느낀 이미지와 달리 친근한 입맛에 저도 모르게 웃는다.

"단 거는 안 좋아하는데 콜라는 좋아한다… 완전 여자 입맛이시네."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네요."

"그래요? 남자들은 원래 뭘 좋아하는데요?"

"남자들이요? 남자들은 뭐, 술이죠?"

"진짜요? 남자들이 술을 좋아해요?"

"예, 뭐. 환장하죠."

"오. 저도 술 엄청 좋아해요."

다행히도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대화에 이서윤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초조했던 기분이 다시 또 순식간에 들떴다.

여자는 빠져버린 남자 앞에서 이리도 단순했다.

"그래요? 여자들은 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에이. 당연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술을 더 잘하죠."

"쓰으… 그런가?"

이 흐름이면 술 약속 잡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음… 하긴, 저도 술 별로 안 좋아하긴 해요."

"…."

아이고.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저도 사실 술 별로 안 좋아해요."

이서윤을 황급히 주제를 바꿔 분위기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 아깐 엄청 좋아하신다면서요."

"아니 방금 제 말은 그,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하지만 지나치게 긴장해서인지, 뇌가 평소만큼 효율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서윤의 말문이 막히자, 남자는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아….'

잔인할 정도로 허무한 엔딩이었다.

이서윤은 힘없이 카운터로 되돌아갔다.

툭.

냉장고에서 들렸던 남자가 카운터에 상품들을 내려놨다.

이서윤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것들의 바코드를 찍었다.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만 구천 원 되겠습니다."

평소의 무뚝뚝한 분위기로 강제 전환된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심각한 표정이 포스기를, 결제 내역을 확인한다.

이서윤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그 얼굴엔 어느새 또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또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에? 아, 아니에요."

하지만 헛된 기대였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가 등을 돌리며 이서윤의 마지막 기대를 깔끔하게 꺾어 버렸다.

'하….'

이쯤되니 오히려 후련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질러볼까? 번호 줄 수 있냐고?'

이미 끝났으니 밑져야 본전이니까.

"저기요…."

"네?"

그때.

자포자기로 그런 생각을 하던 이서윤을 남자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지…."

핸드폰을 쥔 채 쭈볏거리는 남자.

이서윤의 얼굴에 다시 희망의 빛이 서렸다.

조울증이 따로 없었다.

'저거 설마…?'

초면인 사람한테 대뜸 핸드폰을 건네주면 그 이유가 번호를 찍어달라는 것 말고 또 있을까?

이서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남자가 핸드폰을 내밀자, 그녀는 흥분해서 곧바로 핸드폰을 낚아채고는 주저 없이 그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으아아아악!!! 됐다!!! 해냈다 이서윤!!!'

속으로 행복한 고함을 내지르며.

머릿속으론 이미 앞으로 남자와 함께할 미래를 그리고 있는 이서연이었다.

"저기요…?"

"여기요."

반짝반짝.

이서윤이 아주 드물게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주로 남자의 반응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어, 그… 번호 찍어 달라는 거 아니었나요?"

눈앞에 있는 여자의 상상도 못 한 돌발행동에 당황한 것처럼.

"…?"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자의 표정.

"…."

"…."

불편한 침묵.

"그러면 핸드폰은 왜…."

"그게… 사실 제가 깜빡하고 돈을 놓고 와 가지고, 핸드폰 맡겨 놓고 집 좀 다녀올라고 그랬죠…."

"아…!"

진실.

"예…."

"아…."

어색한 침묵.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 쐐기가 되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쐐기가.

그 쐐기가 이서윤에게 박혔다.

착.

이서윤이 스스로의 뺨을 치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친년….'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 분위기에서 갑자기 남자가 번호를 달라는 흐름으로 이어질 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 착각을 해 버린 걸까?

"아으…."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엄습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더더욱 강해지는 수치심.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영혼이 타격 당하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자기를 뭐라고 생각할까.

'계속 귀찮게 하는 어이없는 자뻑녀 새끼?'

가슴이 찢어지는 말이지만, 그 정도에서만 그쳐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저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아, 예! 그러세요."

쥐구멍에 못 숨으니 손바닥에라도 계속 숨어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상대방과 이야기 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실례.

'계속 귀찮게 하는 어이없는 자뻑녀 새끼'에서, '계속 귀찮게 하는 데다가 뻔뻔하기까지 한 어이없는 자뻑녀 새끼'로.

남자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안 좋게 생각할까 봐 이서윤은 황급히 손을 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듯 목례한 남자가 카운터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향한다.

'응…?'

카운터에 장거리를 그대로 놔둔 채.

'이거 안 들고 갈 거면 딱히 핸드폰 맡길 필요 없이 그냥 갔다 오면 되는 거 아닌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깜빡한 걸까?

착각했다거나.

'의외로 어리바리한 면도 있네.'

이서윤은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를 불러세웠다.

"아, 저기 잠깐만요!"

남자가 되돌아봤다.

"이거, 먼저 가져가셔도 돼요."

손가락으로 봉지를 콕콕 가리킨다.

그걸 본 남자가 이내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이 됐다.

얼빠진 실수를 한 게 부끄러운 걸까, 그 표정이 어딘가 심각해 보였다.

"아, 그, 혹시."

"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없는 사이에 급한 전화가 문자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

이런 멋진 남자면 문자나 연락같은 게 엄청 자주 올 것 같긴 했다.

그렇게 또다시 정신을 빼앗겨 버린 이서윤은

'장본 걸 안 들고 갈 거면 딱히 담보 같은 거 맡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려던 걸 깜빡하고 그에게 맞장구쳤다.

"그러면 어떡하죠?"

"그래서 말인데요-"

주섬주섬.

남자가 패딩을 벗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서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속에 나시를 안 입었는지 얇은 티셔츠 너머로 남자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텐데, 이 참에 실컷 봐두기나 하지?]

이서윤은 음습한 자아의 외침을 무시했다.

남자에게 느낀 자신의 감정을 '생긴 거 보고 꼴려서 뭐 한 번 해 보려는.' 그런 성적인 충동과 혼동하기 싫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패딩을…?'

하지만 그녀도 여자인지라.

힐끔힐끔 계속 눈이 가 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패딩."

"네?"

"핸드폰 대신에 이 패딩 맡겨도 될까요?"

"패딩을요?"

"네. 여기 로고, 이 브랜드 아세요?"

"네."

"그럼 중고월드에 10만 원에 올려놓으면 사람들 거품 물고 달려들 것도 아시겠네요?"

'이 사람이 입던 패딩… 30만 원이어도 산다.'

이서윤은 다소 음습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긴 한데…."

이서윤은 다시 한번 힐끔하고 남자의 복장을 확인했다.

"그렇게 나가면 춥지 않을까요? 감기 걸리실 텐데."

무심결에 몸매까지도.

그러자.

스윽-

남자가 팔짱을 꼈다.

이서윤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떻게 봐도 '그만 좀 봐라'는 의미의 제스쳐였다.

필시 '질색' 혹은 '경멸'이 담겼을.

이서윤이 사색이 되었다.

얼굴이 빨개졌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수치심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건 이미 절망에 가까웠다.

"아, 죄송해요! 그게, 그, 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괜찮으니까, 어떻게-"

"예? 아, 예! 당연히 가능하죠. 아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그냥이요?"

이서윤이 허둥지둥거리며 봉투에 핸드폰을 담아 남자에게 건넸다.

"진짜 미안해요!"

남자가 그녀의 기세에 떠밀리듯 편의점을 나섰다.

짤랑.

"아으으… 이런 씨… 미친 새끼… 병신 새끼…."

다시 한 명만 남게 된 편의점에 오열에 가까운 신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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