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알바녀(이서윤) 1
그렇게 편의점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저기 잠깐만요!"
"네?"
알바녀가 날 불러세웠다.
"이거, 먼저 가져가셔도 돼요."
알바녀가 날씬하고 긴 검지로 장거리가 든 봉투를 가리켰다.
오.
그렇지.
아무리 내가 2년 동안 쪼물락거린 중고라 해도 스마트폰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중고 기기값 최소로 잡아도 10만 원대.
게다가 그 안엔 내 약점으로 잡을 만한 자료들도 많다.
가끔 미쳐서 폼잡고 각도까지 조져서 찍은 셀카.
현자 타임일 때 자가발전 주제로 써 놓은 시.
술 먹고 부른 노래를 녹음해 둔 파일.
가사는 철학적이지만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부끄러운 취향의 곡 다수.
야짤 다수.
그리고 무엇보다, 들키느니 차라리 살인 누명을 쓰는 게 나은 인터넷 이용 기록.
내가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저쪽에서도 저 정도 신뢰를 보여주는 게 맞다.
아니 잠깐 시발.
다시 생각해 보니 저 핸드폰 남한테 맡기는 거 미친 짓 같은데.
핸드폰은 무슨 시발 그냥 최재훈 기폭장치구만.
'아니, 진짜 좆된 거 같은데?'
이 미친놈.
무슨 생각으로 저걸 남의 손에 쥐여준 거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진짜로 개좆되기 직전에 내가 얼마나 좆된 건지 깨달았다는 걸까.
만약 방금 그대로 편의점 문을 나섰다거나, 방금 알바녀의 제안에 따라 장거리를 가지고 그대로 집에 갔다면?
알바녀는 다시 혼자 남았을 것이다.
다시 혼자 남겨진 알바녀는 심심해졌을 것이고,
심심해진 알바녀는 자연스럽게 잠금이 풀려 있는 내 핸드폰에 관심을 가졌겠지.
육갑 떨면서 셀카를 찍고 있는 최재훈 씨.
아찔한 차림의 2D, 3D 미녀들.
그 둘이 공존하는 광란의 현장(사진첩)을 목격한 알바녀의 표정을 상상해 보려다가 다급히 멈췄다.
그 순간 닥치게 될 파멸적인 자살충동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몸이 벌벌 떨리는 기분이다.
죽음의 공포가 이런 걸까?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인간은 종종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초인적인 두뇌 회전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초인적인 해결책이 떠올랐다.
지금 상황에서 초인적으로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알바녀 손에 들린 핸드폰을 초인적으로 자연스럽게 회수하는 초인적인 방법이.
정답은 지금 내 옷차림에 있었다.
흰 티? 아니.
무릎 위까지 오는 반바지? 아니.
바로 패딩이다.
이 존나 따듯한 옷은 누구나가 알 만큼 존나 비싸기까지 해서 겨울의 수호자로도 딱이었고, 담보로도 딱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패딩을 벗고 밖에 나가면 필드 특성에 의한 추위 도트뎀에 딸피가 될 게 분명했지만, 파멸적인 쪽팔림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쪽보단 당연히 나았다.
"아, 그, 혹시."
"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없는 사이에 급한 전화나 문자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알바녀.
급하긴커녕 일반적인 전화나 문자도 오는 일이 거의 없는 폰의 주인인 내게 저 전적인 공감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비참함도 뒤따라왔다.
"그러면 어떡하죠?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계획대로 주섬주섬 패딩을 벗었다.
그 모습을 보는 알바녀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시선을 피한다.
아, 안심하세요.
평범한 병신입니다.
안 해쳐요.
"이 패딩."
"네?"
"핸드폰 대신에 이 패딩 맡겨둬도 될까요?"
눈도 마주치기 싫은지 알바녀는 시선을 피한 채로 힐끔힐끔 내 몸쪽만 쳐다볼 뿐이었다.
"패딩을요?"
"네. 여기 로고, 이 브랜드 아세요?"
"예."
"그럼 중고월드에 10만원에 올려 놓으면 사람들 거품 물고 달려들 것도 아시겠네요."
끄덕끄덕.
"그러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긴 한데…."
힐끔힐끔.
"그렇게 나가면 춥지 않을까요? 감기 걸리실 텐데."
와.
여기서 날 걱정해 줄 줄이야.
감동 받아서 자칫하면 울부짖으며 팬티를 찢을 뻔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알바녀는 연신 내 몸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추워 보이나?
슬슬 한기가 들긴 해서 팔짱을 낀다.
그러자 깜짝 놀라는 알바녀.
"아, 죄송해요! 그게, 그, 보려고 그런 게 아니라…."
횡설수설하며 사과를 해 온다.
이상한 놈 신기해서 구경하는 게 사과할 일은 아닌데.
"괜찮으니까, 어떻게-"
"예? 아, 예! 당연히 가능하죠. 아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그냥이요?"
알바녀가 허둥지둥거리며 봉투에 핸드폰을 담아 내게 건넸다.
"진짜 미안해요!"
기세에 떠밀려 엉겁결에 그걸 받았고, 엉겁결에 편의점을 나왔다.
뭐지.
무슨 상황이지.
일단 다시 들어가기엔 또 뭐해서 나는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무뚝뚝한 분위기에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한 시니컬한 눈매.
자로 잰 듯 깔끔한 금발 단발머리와, 양쪽 귀를 수놓은 수많은 피어싱들.
불량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서윤을 처음 보면 받게 되는 인상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원래 표정이 이래요."
"무뚝뚝하고 목소리 낮은 것도 원래 그런 거고요?"
"네."
"에이, 원래 그런 게 어딨어. 한 번 웃으면서 '어서오세요~'라고 해 보실래요."
씨익.
"어서오세요~"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장르는 스릴러.
아니면 범죄.
아니면 공포.
"어이쿠야. 손님들 대하는 일이라 이거,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상일 뿐이었다.
이서윤은 섬세하고 배려심 깊으며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붙임성도 좋았다.
"혹시 외국에서 오셨나?"
"어머니가 영국 분이세요."
"아, 염색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였구나."
"염색한 거 맞아요."
"어… 음…. 거, 귀걸이는 왜 그렇게 많이 했대? 무슨 의미라도 있나?"
"피어싱이라는 건데, 그냥 패션이에요."
"아, 요즘은 그런게 유행하나? 아이고, 아파 보이는데."
언동엔 사람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이서윤에게 나쁜 인상을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이서윤과 대화를 나눠 본 뒤에도 나쁜 인상을 이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적었다.
"그럼, 다음주부터 출근하세요. 앞으로 잘 해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폭풍.
편의점 입장에서 점심시간은 그렇게 부를 만했다.
폭풍이 완전히 지나가고 편의점에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폭풍이 지나갔으니 난장판이 되어버렸지만.
바닥 이리 저리 찍혀 있는 발자국.
고뇌의 흔적이 가감없이 표출된 결과로 난잡하게 뒤섞여 있는 진열상품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전부가 곧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던 걸까?
자기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공간.
바로 창가 자리였다.
분명 카운터에 서서 봤을 땐 가만히 서서 식사하는 것 같았는데.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이서윤은 위를 쳐다봤다.
라면 국물로 만들어진 구름 같은 건 없었다.
이상하다.
이 라면 국물 침수 현상은, 라면 국물 구름이 소나기라도 내린 게 아니라면 납득이 안 됐다.
저 김치들은 어째서 구매자의 뱃속이 아닌 저기에 안치되어 있는가?
한국에서 김치가 길을 잃다니, 별일이다.
라면 면발로 글씨를 써 놓은 건가?
어디 보자.
[섹ㅅ]
라면 가닥이 모자랐나 보다.
아마도 한 가닥.
콜라캔은 왜 굳이 뒤집어 놓은 거지?
원샷했어? 장하다.
'환장하겠네.'
"하…."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서윤도 이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홀연히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그녀가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일단 뒤집혀져 있는 콜라캔을 들었다.
주르륵.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캔의 주둥이에서 콜라가 흘러나왔다.
"…흐, 흐흐. 흐흐흐…."
이서윤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 * *
"아~"
겨우 편의점을 원상복귀 시켜 놓은 이서윤이 카운터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오후 2시 10분.
이 편의점의 주요 고객은 학생과 직장인들.
그러니 학교와 직장이 그들을 다시 풀어주기 전까지, 편의점은 평화롭다.
적어도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한산하겠지.
이서윤은 핸드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았다.
이내 귓가에 음악이 흘렀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어제.
이서윤은 미튜브에서 노래를 듣다가 자동 재생 기능에 의해 재생된, 처음 듣는 노래를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마침 좋아하던 노래들을 돌려 듣던 순환에도 질리던 차였다.
그녀는 노래를 발굴한다는 생각으로 자동 재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
기존 곡이 끝나고, 새로 틀어진 곡에 이서윤이 반응했다.
생소한 느낌의 곡이었다.
그녀의 취향과는 멀었다.
그런데도 빠져들었다.
남자 가수의 신비로우면서도 퇴폐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귀가 가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머리는 목소리 주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이런 소릴 내는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느새 노래는 클라이막스를 넘어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내리고 있던 시선 위쪽 끝자락에 라면 두 봉지가 들어왔다.
이서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아침보다는 밤이 더 익숙해 보이는 흰 피부.
옅지만 그런 피부 위라 그런지 선명하게 보이는 다크서클.
남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패션.
그로부터 비롯되는 무심한 분위기.
노래가 끝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이서윤은 눈앞의 남자에게 정신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