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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게임을 잘함-4화 (4/361)

004화. 일찐녀(알바녀)

내가 라면을 내려놓자 그제야 내리깔았던 시선과 함께 고개를 들어 정면을 향하는 알바녀.

"…어."

조그맣고 예쁜 얼굴의 임팩트를 다 지워버릴 정도로 시니컬한 눈매로 날 응시하더니 그런 소릴 냈다.

그리고 말 없는 응시가 계속된다.

뭐야.

왜 이래요.

봉지 라면이 다섯 개 이상 남아 있는데 감히 묶음 라면을 집어 와서 화나신 건가?

편의점을 향한 내 불순하고도 공격적인 의도가 발각됐나?

"무슨 문제라도?"

"에? 아, 아니요."

그냥 멍때리고 있었나 보다.

어째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상태가 영.

바코드를 다 찍은 알바녀는 내 다리를 쳐다봤다.

안 들킬 줄 아는지 스쳐 가듯 힐끔.

이걸로 두 번째.

겨울에 반바지 입은 사람 처음 보쇼?

아무래도 이 동네엔 나 말고 상남자가 별로 없나 보다.

"저기…."

"네."

"봉지도, 같이 결제해 드릴까요?"

"아, 네. 잠깐만요."

편의점에 들른 김에 이것저것 사 갈까 싶어서 냉장진열대로 갔다.

가만히 서서 둘러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알바녀가 카운터에서 나와 내 근처로 다가와 있었다.

왼쪽 팔을 쭉 벋으면 닿을 거리.

"…."

뭐지.

무엇 하는 포지션이지.

나는 애써 무시하며 진열대를 응시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걸어온다.

아.

빨리 살 거 사서 꺼지라는 건가.

이해했습니다.

"아뇨, 그냥. 뭐 딱히 찾는 게 있다기보단…."

"…있다기보단?"

"먹을 만한 거 있나 둘러보는 중이었어요."

"아…"

고개를 끄덕인 알바녀가 나처럼 진열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거."

그러더니 진열대의 뭔가를 가리킨다.

"저게 인기가 그렇게 많더라고요."

시선을 알바녀가 가리킨 곳에 향하자 뭐시깽이 딸기 크림 찹쌀떡이란 게 눈에 들어왔다.

추천해 주는 건가?

그때,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악마/작년 어머니 생신에 못 찾아감)이 말했다.

[안 팔리는 재고 땡처리하려는 거 아냐? 아니면 저런 여자가 너 같은 놈한테 뭐하러 관심을 줘?]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천사/계약금으로 부모님 빚 갚아줌)이 말했다.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얼굴만 보고 사람 평가하는 건 부당해요.]

그런가?

하긴.

머리 물들이고 귀에 피어싱 좀 했다고 다 무서운 사람이란 법은 없다.

나는 알바녀의 추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당초 이렇게 옆에서 대놓고 추천하는데 무시하기도 좀 그렇긴 하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 화내면 어떡해.'

저 눈매로 말없이 째려보면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지갑을 건네줄 자신이 있었다.

"아, 그러면 한 번 먹어보죠, 뭐."

그렇게 나는 뭐시깽이 딸기 크림 찹쌀떡을 집어 들었다.

됐지?

라고 알바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알바녀의 무표정했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가 싶더니 황급히 고개를 피한다.

뭔디.

그때,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악마/치킨이랑 계란 동시에 먹으면서 '뱃속에서 엄마랑 자식이 만나겠네' 라고 생각한 적 있음)이 말했다.

[얼굴이 조까태서 못 봐주겠나본디?]

너무하네.

"이것도요."

알바녀의 추천을 계속되었다.

이제 아예 집어서 나한테 갖다 준다.

'어디 보자…. 초코 크림 슈크림이라….'

초코 슈크림이 아니다.

초코 크림 슈크림이다.

정체 모를 리듬감을 함유한 이름에서 엄청난 비범함이 느껴진다.

솔직히 딸기 크림 찹쌀떡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맛있어 보이진 않는다.

인기가 많아 보이지도 않고.

'진짜 재고 땡처리하려는 건가?'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알바녀는 여자의 관점에서 순수하게 추천해 준 것이다.

'그쵸?'

그렇다고 해 줘.

어찌 됐건, 남자한텐 영 아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남자들은 이런 거 공짜면 몰라도 돈 주고 사 먹진 않지.

"요즘 남자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 아시죠?"

'머라고요?'

나는 두 개를 다시 자세히 쳐다봤다.

'음…. 어… 음….'

자세히 보니까 확실히 맛있어 보이…나

'그 뭐시냐, 그 거시기해서 남자의 마음을 거시기하게 만드는 게 있긴 하네.'

그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래도 나는 유행을 이해해 버린 것 같다.

그 사실에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아… 이게 인싸들이 느끼는 감정인가….'

잘 있어라 아싸들아.

형부터 간다.

인싸의 세계로.

"그리고 또-"

인싸 세계의 인도자가 추천을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또 달달해 보이는 걸 집으려고 하기에 만류했다.

"단 건 여기까지면 될 것 같아요."

"아. 단 걸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시선을 진열대에 고정한 채로 이야기하길래 나도 그렇게 한다.

"별로 안 좋아한다기 보다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먹으면 맛있는데 굳이 찾아서 먹지는 않고 너무 단건 또 별로인…."

"아. 그거.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콜라는 좋아해서 자주 마셔요."

"콜라요?"

후후 하고 웃는 게 들렸다.

저 얼굴로 웃으면 어떻게 되나 궁금했지만 나랑 얼굴 마주하는 걸 좋아하진 않는 듯하니 굳이 쳐다보진 않는다.

"완전 여자 입맛이시네."

"여자 입맛이요?"

여자 입맛이 이렇던가?

'오히려 나는 남자 입맛이라 생각했는데?'

하기사.

내가 여자에 대해 뭘 알겠는가.

내가 살면서 접점을 가져 본 여자는 90% 이상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폐쇄적 삶을 사는 아가씨들인데.

모니터 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알바녀가 훨씬 더 잘 알겠지.

근데-

"그런 말은 또 처음 듣네요."

여자 입맛이라는 말.

"그래요? 남자들은 원래 뭘 좋아하는데요?"

"남자들이요? 남자들은 뭐, 술이죠?"

"진짜요? 남자들이 술을 좋아해요?"

"예, 뭐. 환장하죠."

"오. 저도 술 엄청 좋아해요."

단조롭고 무덤덤하던 어조에 악센트가 생겼다.

술 진짜 좋아하나 보네.

"그래요? 여자들은 술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에이. 당연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술을 더 잘하죠."

"쓰으… 그런가?"

이 또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역시 여자에 대해 알려면 실제 여자와 대화하는 게 제일인가보다.

"음… 하긴, 저도 술 별로 안 좋아하긴 해요."

"…."

갑자기 조용해지는 알바녀.

"저도 사실 술 별로 안 좋아해요."

"??? 아깐 엄청 좋아하신다면서요."

"아니 방금 제 말은 그,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우물쭈물.

잘 흘러가던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또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여자랑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찐따라.

그러게 누가 찐따한테 말 걸래?

생각해 보니 화나네.

내 잘못 아님.

더 어색해지기 전에 탈출해야겠다 싶어 냉장고 쪽으로 가서 페트병 콜라를 집었다.

알바녀는 어느새 카운터에 가 있었다.

방금 전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조용히 바코드 찍히는 소리만 흘렀다.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알바녀는 다시 무뚝뚝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만구천 원이라고.

물가 보소.

이것들이 뭐라고 세종대왕님께서 두 차례나 행차하셔야 되는 거야.

아, 맞다.

라면 두 묶음 샀지.

아니 그래도, 너무 비싼데.

"그, 잠시…."

"아! 네."

포스기 화면의 결제 내역을 확인하자 금방 범인이 밝혀졌다.

딸기 크림 찹쌀떡하고 그놈의 초코 크림 슈크림.

이 두 놈 몸값 하나하나가 콜라 한 병이랑 맞먹었다.

역시 유행을 따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게 인싸들 삶의 무게인가?

"뭐,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에? 아, 아니에요."

가격 듣고 놀라는 모습이 너무 궁상스러워 보이지 않았어야 할 텐데.

나는 지금이라도 쿨하게 준비해 온 돈을 꺼냈-

"…."

뭔가 심상치 않다.

손에 잡히는 이 느낌.

지폐가 한 장이다.

'오, 오만원 찬스?'

"잠깐만요."

나는 알바녀가 못 보게 몸을 돌려서 확인했다.

어림도 없었다.

세종대왕님의 자애로운 미소가 이렇게 야속하게 느껴질 줄이야.

그래도 다행히 천원은 아니었다.

...

는, 개뿔.

망했다.

이제야 기억났네.

원래 찐라면이랑 콜라만 사려고 만 원만 딱 챙긴 거.

'빨리도 떠올린다 병신아.'

어떡하지.

"…."

알바녀의 무슨 일이냐는 눈길이 내 판단을 재촉했다.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당초 예정대로 찐라면과 콜라를 제외한 나머지를 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우 불돼지 라면은 괜찮지만 저 딸기 크림 찹쌀떡이랑 엿같은 초코 크림 슈크림이 문제다.

알바녀가 열심히 추천(혹은 강매)한 것들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대뜸 저것들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알바녀의 기분이 어떨까.

저 사나운 눈매로 날 노려보며,

'하, 시발. 귀찮게 진짜.'

라고 다 들으란 듯 속삭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소름이 돋았다.

너무 무서워서 상상한 것 만으로 울 뻔했다.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 죽었을 때처럼 서럽게.

그러니까 첫 번째 선택지는 기각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딸기 크림 찹쌀떡과 엿같은 초코 크림 슈크림을 중심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그 두 개에 콜라를 더하면 돈이 딱 되긴 한다.

하지만 그 경우 내 아침 메뉴는 딸기 크림 찹쌀떡과 엿같은 초코 크림 슈크림이 돼 버린다.

그런 미래, 견딜 수 없어요.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세 번째 선택지.

"저기요…."

"네?"

"하…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지…."

내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쭈볏거리자 알바녀가 어딘가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다.

드디어 내가 특정 제스쳐를 취해서 꺼져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알바녀의 기대에 부응하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핸드폰을 알바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말을 이으려는데-

"?"

이 여자 허겁지겁 내 핸드폰을 가져가서는 뭔가를 바쁘게 조작하는 게 아닌가.

뭐야, 시발.

돌려줘요.

"저기요…?"

"여기요."

부르니 곧바로 돌려주긴 한다.

만면에 화색을 띠고.

뭘까.

뭔 상황일까.

상상조차 안 된다

내 상상력이 너무 빈약한 걸까, 알바녀의 행동이 너무 창의적인 걸까.

내가 당황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가만히 굳어 있자, 표정에 담겨 있던 게 화색에서 당황으로 바뀐 알바녀가 말했다.

"어, 그… 번호 찍어 달라는 거 아니었나요?"

"…?"

제가요?

그랬나요?

아싸는 이해할 수 없는 인싸들의 또 다른 대화체계가 존재하나?

"…."

"…."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러면 핸드폰은 왜…."

"그게… 사실 제가 깜빡하고 돈을 놓고 와 가지고, 핸드폰 맡겨 놓고 집 좀 다녀올라고 그랬죠…."

"아…!"

"예…."

"아…."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착.

알바녀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치다시피 가렸다.

얼굴이 하도 작아서 한 손으로 거의 다 가려졌다.

"아으…."

그 상태로 죽어가는 소리를 낸다.

귀와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갛다.

어지간히 쪽팔린가보다.

근데 잠깐.

나 지금 여자한테 번호 따인 건가?

'실환가?'

눈매 더러워도 예쁜 게 보이는 이런 여자가 왜 내 번호를?

'아니지.'

알바녀가 말했지.

내가 번호 찍어달라고 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번호를 따인 게 아니라, 번호를 따는 데 성공한 거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꽤 높은 인싸점수가 부여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다.

최재훈, 진짜 인싸가 돼 버린 건가?

이게 딸기 크림 찹쌀떡과 초코 크림 슈크림의 힘인가?

'아니 근데 이거, 초코 크림 슈크림 이름 도대체 어떤 새끼가 지은 거지.'

알바는 쪽팔림에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다.

그럴 만하다.

나 같은 놈이 번호를 따려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여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줬을 텐데, 내가 무슨 개자뻑질이냐는 식으로 나왔으니. 오늘 알바녀네 이불 다 뒤졌다.

뭐라 위로해줄 말이 없어 나는 상황이나 진전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저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아, 예! 그러세요."

그렇게 편의점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저기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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