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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게임을 잘함-3화 (3/361)

003화. 일찐녀

레전드 오브 레전드 한 판만 하고 아침을 먹으려 했다.

"아… 아!!!! 이런 시발 거!!!"

정글이 문제였다.

자기 혼자 카정 당해 뒤져 놓고는 대뜸 팀원들을 욕하면서 템 팔고 미드를 달리는데…. 후….

너무 억울해서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딱 1승만 하고 아침을 먹기로 했다.

그렇게 두 번째 판.

전판 생각이 나서 내가 정글을 하기로 했는데-

-탑 왜 안 옴?

-정글 위치 확인해 드리고 핑까지 찍어드렸는데 ㄷㄷ;

-근데

-아깝네요 그냥 사려주셨으면 이득인데

-꼬우면 니가 적 정글보다 먼저 기어오던가.

-용 먹고 있었잖아요

-용 하나 먹는다고 겜 이김? ㅋ

씹새가?

-그럼 넌 적 탑 한 번 딴다고 겜 이겨요?

-니가 그걸 어케 암 ?ㅋ

-아니 시발 그럼 니는 용 한 번 먹으면 겜 이기는지 지는지 어케 아는데요? 아 시발, 그 와중에 또 뒤지네 -ㅈㄱㅊㅇ

-솔킬따여놓고 뭔 ㅈㄱㅊㅇ

-ㅈㄱㅊㅇ 때문에 솔킬 난 거임 처음에 적정글이 아니라 우리 정글 왔으면 지금 내가 솔킬땄음-난 선블루였는데?

-선레드 하던가

-그럼 닌 사리던가

-한번만 더 입털면 미드달림

이 씹새끼 말하는 거 보소.

그러나 나는 명대로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 쓰레기 게임은 트롤이 벼슬이었다.

벼슬아치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탑에 억지 갱을 갔다.

실패하면 그대로 게임이 터져버리는 도박수였다.

결과는 천만 다행히도 성공.

그런데-

-그 킬을 왜 니가 쳐먹음?

-아니 방금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양보해요?

-양보 ㅇㅈㄹ ㅋㅋ 내가 만든 킬인데

-아 알겠어요 다음번엔 진짜 킬 드림

-드림 ㅇㅈㄹ ㅋㅋ내가 다 하는데 아 됐다 그냥 때려쳐 -아니 잠깐만요

-니에비

=울팀 정글 패드립치네요 리폿 ㄱㄱ 미드달림

"끼에에에에엑!!!!!!"

그렇게 세 번째 판.

이번엔 탑에 갔다.

솔킬을 땄다.

퍼블.

거기서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더.

세 번째 솔킬.

상대방과 레벨 차이 3.

CS차이 두 배.

어나더 레벨.

'느껴지십니까? 힘의 차이가.'

이대로면 무난하게 탑캐리다.

그 사실에 내 안의 캐리병이 자극되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 씨발, 우리팀 재훈이 개못하네

"???"

갑자기 원딜이 개지랄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이름을 불러가며.

-어이없네, 지가 끌렸으면서.

그런데 서포터가 나 대신 화를 낸다.

아. 서포터 아이디가 재훈이었나?

어, 아닌데?

아. 듀오인데 싸우는 건가?

-니가 하는 게 없으니 내가 끌리지 ㅄ아

-어허 듀오끼리 왜들 그러실까 진정하세요들

-듀오? 누가 듀오임?

-님이랑 서폿 듀오 아님?

-ㅈㄹ하네 ㅅㅂ 내가 저런 재훈놈이랑 왜 듀오를 함 나 남친 있음-아니 진짜 어이없네, 지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저런대 -???

이름을 부르길래 당연히 듀오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게다가 갑자기 웬 남친 자랑인가.

'여자였어?'

그리고 무엇보다, 저 '재훈놈'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의미 불명인 말을 씨불이는, 그러는 와중에 또 한 번 죽어 버리는 원딜러.

-아니 재훈놈아, 뭐 좀 해 보라고

원딜러가 또 다시 장문의 욕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연속해서 울리는 승전보.

원딜러가 죽고 혼자 남은 서포터가 적 봇 두 명을 혼자서 잡은 것이다.

진짜로 뭐 좀 해 버렸네.

-올 ㅋㅋ 이러면 원딜이 입장이 좀 곤란해지겠는데

-정작 재훈이는 지였고 ㅋㅋ

=미드달림

"아."

그냥 존나 닥치고 있을 걸.

부활하자마자 조금의 주저도 없이 미드로 달려가 적에게 꼴아박는 원딜.

=ㄷㄷ 데인님 잘하고 있는데 팀들이 뭐라 했나보네 꼭 리폿해드림

적 미드 상도덕 없는 새끼 말하는 꼬라지 보소.

저 새끼 때문에 한층 더 지기 싫어졌다.

다행히 아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 번 죽었을 뿐이고 템도 안 팔았다.

-원딜님 죄송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 아니고 그냥 분위기 풀려고 한 말이었어요-님이 왜 사과함

아니 그쪽 재훈이는 좀 닥쳐봐요.

이쪽 재훈이는 진짜 이기고 싶으니까.

-이대로 가면 무난하게 탑 캐리 나올 것 같으니까 제발 게임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말도 없이 우물에 가만히 서 있는 원딜.

지금 머릿속에서 열심히 저울질 중인 거겠지.

점수인지, 자존심인지.

여기서 내가 나설 때다.

저놈이 자존심을 버리지 않아도 되게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아 어쩔 수 없네, 해 줄게. 해 준다고. 됐냐?'

라는 분위기로 스무스하게 다시 게임할 수 있도록.

-전적 보니까 누가 봐도 원딜님이 적팀 원딜보다 훨씬 잘하시는 것 같던데

여기서 중요한 점.

너무 원딜 편만 들어주면 안 된다.

-서폿님도 적팀 서폿보다 탑레 훨씬 높고

대놓고

[아이고 원딜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하면 서폿 소가 괜히 또 섭섭해서 꼬장을 피울 수도 있으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빡치네.

지금 내가 AOS를 하고 있는 건지, 애 돌보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엇 이 개새끼들아.

어쨌든 이기고 볼 일이다.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시고

그때였다.

=탑오픈 안함 ㅅㄱ 정글리폿좀요

=에비디진 탑 리폿좀요 템팔고 우물 나감

=정글말고 탑 리폿해주세요

=미드 열게요

우리 팀보다 적 팀이 먼저 개판이 나 버렸다.

그렇지.

어떤 현자 가라사대 사람 다섯이면 반드시 그 중 한 명은 쓰레기라 했다.

우리 팀에 쓰레기 하나 있으면 적팀에도 하나 있어야 그게 옳게 된 상황인 거다.

적의 기지가 깨지기 직전.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던 나는 울분을 터뜨렸다.

-와 원딜 ㅋㅋ 실력이고 주둥이고 그냥 재앙이고 기적이네 ㅋㅋ 어떻게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게 파멸적일 수가 있지 ㅋㅋ-그러게요 ㅋㅋ

신나서 가장 먼저 거드는 서폿.

-ㄹㅇ 개시끄럽네 쳐못하면 조용히 버스라도 타던가.

-ㄹㅇ ㅋㅋ 어휴 내가 다 암 걸리네 탑님 진짜 고생하셨음

동의하는 미드와 정글.

그렇게 원딜은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탑 다음에 만나면 박음

<승리>

원딜의 마지막 채팅과 뒤이어 떠오르는 승리 창을 동시에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거지.

이 맛에 이 발암 게임을 하는 거지.

'완벽한' 승리 한 번에 묵은 체중이 싹 내려갔다.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새 오후 2시.

평소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아침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라면

2. 국밥

1의 경우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 간편하게 해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고.

2의 경우는 언제나 안정적인 만족감을 준다는 장점이 있다.

'음….'

힘든 고민 끝에 선택지 1을 골랐다.

국밥이 땡겼지만 오늘 빨리 일어난 여파일까, 몸이 나른해서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라면이 다 떨어져 있었다.

"아니, 분명 여기 한 봉지 남았었는데…."

남자 자취방에는 귀신이 산다.

그 귀신은 양말을 꼭 한 짝씩 빼 가고, 라면이 마지막 한 봉지만 남을 때까지 기다린 뒤 먹어 버린다.

아주 악질 새끼.

결국 나는 어기적거리며 반팔에 반바지 차림 그대로에 패딩만 걸친 채 집을 나섰다.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단골 국밥집을 지나쳐서 몇 분만 더 걸으면 이렇게, 편의점에 나온다.

생각해 보니 그냥 국밥집을 가면 됐구나.

빙신인가.

어쨌거나 기왕 온 거.

짤랑-

"어?"

카운터에 서 있는 알바가 낯설다.

평소 이 시간엔 태승이놈(22세/휴학중/베인충/지가 팀운때문에 그렇지 원래는 플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버[전프로게이머인 본인이 보기엔 이 새끼 브론즈급인데 오히려 운이 좋아서 실버임])이 있어야 하는데, 대신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다.

노랗게 물들인 단발머리에 양쪽 귀를 세련되게 수놓는 피어싱들.

내 안에 잠재된 흑염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찐 PTSD라는 이름의 흑염룡이.

이어폰을 끼고 시선을 내리깔아 핸드폰 삼매경 중이신 일찐녀께선 손님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안중에도 없으시다.

태승이놈이 저랬으면

'이 싸가지 없는 노무 쉑기, 빠져가지고는. 너를 컵라면 존나 더럽게 쳐먹고 안 치우고 그냥 가기 형에 처한다.'

라고 했겠지만.

일찐녀의 경우엔 저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졌다.

얼굴 마주하고 대화하기 무서웡.

나는 일찐녀님의 여가 시간을 방해해서 노여움 사는 일이 없도록 최적의 동선을 짜서 라면 코너로 들어갔다.

눈에 불돼지 라면이 들어왔다.

보니까 갑자기 땡겨서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음….'

그리곤 다시 내려놓은 뒤 고민에 빠졌다.

불돼지 라면은 너무 강한 맛이 끌릴 때는 확 끌리게 해 주지만, 한 번 먹으면 또 확 질리게 한다.

때문에 먹고 다음 먹기까지의 텀이 상당히 길다.

매운 거 환장하는 사람들은 몰라도, 내 경우엔 거의 한 두 달에 한 번 꼴.

그러니까 사려면 낱개로 한두 봉지 사는 게 맞다.

그런데도 고민하는 이유는 다섯 개 묶음이 400원 더 싸기 때문이다.

엿같은 할인을 할 거면 제대로 하지 400원이 뭐야?

생각해 보니 괘씸해서 묶음을 사기로 결정했다.

400원 할인하니, 내가 저걸 사면 편의점에서 400원 손해 보는 거니까.

굿.

다음은 주식이 될 찐라면 매운맛(중요) 한 묶음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 두 손이 꽉 찬다.

일단 카운터에 내려놔야겠다.

일찐녀와 얼굴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 왔다.

'잠깐.'

그런데 생각해 보니 편의점 알바를 할 정도면 최소 대학생이란 소린데.

그렇다면 일찐녀라는 호칭은 과연 어떨까.

'대학교에도 일찐이 있나?'

프로게이머 준비를 하느라 최종학력이 중졸인 내게 대학교는 미지의 영역인지라,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자의 호칭을 알바녀로 임의 변경했다.

부스럭.

내가 라면을 내려놓자 그제야 내리깔았던 시선과 함께 고개를 들어 정면을 향하는 알바녀.

"…어."

조그맣고 예쁜 얼굴의 임팩트를 다 지워버릴 정도로 시니컬한 눈매로 날 응시하더니 그런 소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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