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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게임을 잘함-2화 (2/361)

002화. 쿠퐁맨(김이연)

"끄으응-"

있는 힘껏 기지개를 핀 김이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촤악!

커툰이 걷히면서 드러난 창문 너머의 세계는 아직 어둑했다.

그래도 불 꺼진 실내보다는 아니라, 방 안이 상대적으로 환해졌다.

겨울이 아니면 새벽에나 볼 수 있는 짙푸른 하늘색.

김이연은 좋아했다.

전경을 감상하는 그녀의 표정은 아주 편안했다.

김이연은 아침에 강했다.

취직하기 전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해 오던 버릇 덕분이었다.

길진 않지만 충분하다 느낄 정도로 침묵과 여유를 즐긴 김이연은 방에서 나와 욕실로 직행했다.

"오케이."

냉기와 열기를 버텨가며 얻어낸 절묘한 온수의 온기에 기분 좋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샴푸, 바디워시.

김이연이 취직하기 전까진 아무런 관심도 없던 것들이다.

아무런 기준도 없이 대충 아무거나 사서, 아무거나 썼다.

그러나 취직한 뒤.

택배 기사가 된 뒤론, 그녀는 한 가지 종류만 고집해서 사용해 오고 있었다.

질문 사이트에 [향기 오래 가는 여성 샴푸, 바디로션]이라는 질문을 올려 알아낸 제품들 중, 가장 평이 좋은 것들이었다.

어느 서비스 직종이 그렇듯, 택배 기사에게도 인상은 중요한 요소였다.

좋은 인상이 좋은 상황을 만든다.

정확히는, 나쁜 상황을 줄인다.

생전 안 써 본 스킨로션까지 써 가며 피부 관리를 시작한 이유였다.

'여자가 피부 관리라니.'

처음엔 어색했던 로션을 바르는 손길이 무척 자연스럽다.

김이연은 그 사실이 왠지 멋쩍었다.

언제나처럼 아침을 간단하게 토스트와 커피 한 잔으로 때운 김이연은 집을 나서자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배가 비어서가 아니라, 급하게 먹어야 하기 때문에 커피는 아이스 커피인 탓이었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그만큼 땀이 덜 나서, 땀 냄새가 덜 나게 될 테니.

그렇게 김이연이 물류센터에 도착한 시간이 7시였다.

대부분 그녀보다 늦겠지만, 그녀보다 빨리 온 사람도 있었다.

곧바로 물류 분리 작업이 시작됐다.

2시간 뒤.

분리 작업을 마치고 트럭 짐칸을 가득 채운 그녀가 운전석에 앉았다.

지금까지는 언제나와 같은 하루다.

이후로도 언제나와 같은 하루가 되길 빌 따름이다.

택배물들에 이상이 없기를.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수취인 중에 개진상이 없기를.

오후 12시 30분.

운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별다른 사고가 있던 건 아니다.

단지 몇몇 화물이 무거운 걸로도 모자라 배송지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고층이었을 뿐.

개진상을 만나서 정신이 피로한 것보다 몸이 피로한 게 낫다는 사실에 서글픈 위안을 얻는다.

또한 힘든 것과는 별개로 업무 진행은 순조롭다는 사실에.

이대로라면 오늘은 정시 퇴근 각이다.

'오랜만에 앉아서 점심 먹겠네. 뭐 먹지.'

삼각 김밥 무슨 맛 먹지가 아닌 뭐 먹지.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로운 선택지.

김이연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점심식사를 하기 전 마지막 택배물을 들었다.

가볍다.

'나이스.'

1층이다.

'개나이스.'

사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일지도 모른다.

이제 이 집에서 나오는 인간이 진상만 아니면 된다.

김이연은 문을 두드리곤, 기겁했다.

쾅쾅쾅!

정신이 팔려 문을 너무 세게 두드려 버렸다.

초인종이 있는데도 말이다.

'제발….'

신경 쓰지 마라.

정말 놀랍게도 이런 일로 컴플레인을 거는 사람도 있었기에, 김이연은 잔뜩 위축되어 대답을 기다렸다.

끼익-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아무래도 수취인은 여자인 모양이다.

워낙 뒤숭숭한 세상이다 보니, 대부분의 남자 고객들은 택배 기사들을 경계한다.

정확히는 택배 기사인 척 할 수도 있는 누군가를.

그렇기에 처음부터 경비실에 맡겨달라고 요구하거나, 문을 열지 않은 채 그 너머에서 문 앞에 두고 가 달라고 부탁하곤 하여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려 한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노크만 듣고 쿨하게 문을 열어주는 경우는 드물다.

드문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남자였다.

그것도 젊고, 잘 생긴.

김이연은 경악했다.

그녀의 예상이 깨져서는 아니다.

막 일어났는지 얼굴을 한껏 찌푸린 남자의 머리가 귀엽게 이리저리 뻗쳐 있어서도 아니고.

남자의 복장 때문이었다.

남자는 팬티를 입고 있었다.

끝.

전신을 통틀어 달랑 트렁크 한 장만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려 하던 찰나, 그녀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몸에 시선을 뺏겼다.

움푹 들어가 있는 깊은 쇄골.

매끈하고 탄탄한 팔뚝.

그리고 무엇보다, 근육으로 평평한 가슴팍.

희미하게 갈라진 복근.

그 복근이 끝나는 지점에서 골반과 맞물려 형성되는 굴곡.

김이연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남자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기 전까지.

남자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나려 한 순간-

"아! 죄송합니다!"

김이연은 번개를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미친 새끼!'

거의 알몸인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봐 버렸다.

아니, 멀뚱멀뚱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아주 느긋하게 감상을 한 수준이다.

머릿속에 불온한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시선 강간.

방금 남자에게 한 행동을 설명할 만한 단어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부주의한 쪽은 반나체으로 나온 남자겠지만, 남성이 철저하게 약자인 현대 사회의 관점에선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이런 경우엔 중요한 건 언제나 여자의 대처였다.

남자의 실수에 여자가 어떻게 대처하는가.

남녀 간 문제가 발생하면 사회는 발단보다는 과정에 집중해서 채점했다.

'좆됐다.'

김이연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미래가 펼쳐졌다.

그 중 불행하지 않은 미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 무수히 많은 불행한 미래 중에, 그나마 가장 덜 불행한 미래로 가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

사고회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정말로 중요한 건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면?

그 순간 배드 엔딩 루트 돌입이다.

그때 가서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으며 몸부림쳐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김이연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남자의 목소릴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남자의 말이 들려왔고, 김이연은 극도로 당황했다.

"아이고 이거 참, 더러운 거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좋은 의미로.

남자는 털털하고 나긋한 어조로 언짢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거기에선 의도된 장난스러움이 느껴졌다.

장난스러움.

그러니까,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처, 천산가?'

단번에 긴장이 풀리며 몸이 홀가분해졌다.

마음도.

그 뒤에야 남자의 말이 어딘가 이상했던 걸 눈치 챈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더러운 걸 보여 드려 죄송하다고.

김이연은 다시금 혼란에 빠졌다.

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의 몸은 전혀 더럽지 않았다.

더럽긴커녕 아름다웠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러했다.

적당한 근육질을 좋아하는 김이연의 주관에서 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얼굴도 잘 생긴 편이고.

분명 남자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다.

말하는 것과 달리 목소리에서 미안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의 몸매를 더럽다고 생각할 만큼 자존감이 낮다고도.

그래, 그의 목소리.

'혹시…?'

어딘가 장난스러웠던 그 목소리.

'장난치는 건가…?'

택배 배달원에게 알몸을 보여주며 반응을 즐기는 요망한 남자.

그런 상황이 떠올랐다.

[하토미 꺼 미친놈아]

남아 있던 이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남자로부터 있는 힘껏 돌렸던 고개가 다시 정면을, 남자를 향한다.

여전히 눈은 질끈 감은 채라 남자의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김이연의 머릿속에 자동으로 연상된다.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장난스러운.

그렇게 짓궂어서 마냥 요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김이연이 보는 어떤 애니메이션의 한 히로인이 떠올랐다.

짓궂게 주인공을 가지고 노는 요망한 남자 주인공.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그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남자의 모습에 겹쳤다.

그 캐릭터는 이 남자처럼 누구한테나 대뜸 반나체를 보여주는 개방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김이연은 개방적인 남성상을 혐오했다.

남자 캐릭터의 정조관념을 결벽적일 정도로 따지는, 소위 유니콘이라 불리는 부류였다.

그런데도 눈앞의 남자에게, 처음 보는 여자에게 대뜸 반나체를 보여주면서 요망한 장난을 치는 남자에게 엄청난 끌림을 느낀다.

정조와는 아주 거리가 먼 행동을 하는 남자에게 말이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 잘 생겨라. 세상의 반은 너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외모가 전부인 세상이다.

외모와 인상은 비례한다.

좋은 인상은, 좋은 해석을 불러온다.

'진짜 우연히, 나한테만 보여준 걸 수도 있잖아?'

행복회로가 가동된다.

김이연은 잘 대처해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여유롭고 재미있는 여자의 모습을.

그러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번호 교환이라던가 아니면….'

두근두근.

김이연은 다음 행동에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다는 생각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게 아니라!"

그러나.

그녀가 한 거라곤-

"제가 이러는 건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보, 보면, 당연히 보, 보면 안 될 것 같아가지고… 그래서 그게 아니라 그런 거고요! 충분히! 더럽지 않아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쪽의 더럽다는 말을 부정하는 거고, 그러니까 제 말은!"

김아연이 예전에 특정 커뮤니티에서 읽었던 글이었다.

[제목 : 찐따 특]

[남자랑 대화하면 발성 곱창난 랩퍼됨 ㅋㅋ]

김아연은 글쓴이가 무슨 이야기를 몸소 이해하게 되었다.

발성이 곱창 나버린 랩퍼.

지금 본인이 딱 그 꼴이었다.

속사포 랩하듯 너무 빠른 말 속도, 시도 때도 없는 음 이탈, 그리고 웅얼거리는 발성.

너무 쪽팔려서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매력적이세요!"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급발진을 해 버리고 말았다.

중간과정 생략하고 결론만 소리 지르다시피 외친 것이다.

사실, 애초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옛날 살빼기 전 뚱뚱했던 시절 남자들에게 놀림 받아 3D를 멀리하고 2D를 가까이 해 온 김이연에게 있어 이성과의 첫 만남에서 호감을 주는 일은.

'아, 시발.'

김이연은 남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망했다고.

개 망했다고.

'니가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매력적이여 봐야 그쪽만 하려고요."

'어?'

능청스러운 남자의 목소리.

깊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긍정적인 반응이다.

라고, 김이연은 생각했다.

'내가 매력적이라고? 역시 나한테 관심이 있나? 그래서 알몸을 보여준 건가?'

'찐따 같은 여자들한테 부성애 같은 걸 느끼는 남자들도 있다던데 그건가?'

행복회로가 풀파워로 가동된다.

이번 걸로 김이연은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만.

김이연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경험이 전무한 김이연에게 있어 이성과의 대화는 미지를 탐험하는 것과 같았다.

매 순간이 고비였고, 운 좋게 한 고비 넘겼을 뿐이었다.

이미 한 번 고비를 넘기며 기진맥진한 상태인 그녀에겐 이번 고비를 넘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반응이 좋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애초에, 왜 반응이 좋았던 거지?

"…."

신기루 같이 사라져 버린 자신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그… 감사합니다?"

김이연은 조바심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버렸다.

이는 더더욱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

김이연은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망했다고.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미튜브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따라 어떤 인싸 미튜버의 [남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방법] 영상을 추천해 줬었던 일이.

그때 김이연은 현실 남자는 다 쓰레긴데 그런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애쓴다며 인싸를 한심하다 생각했다.

한심한 건 김아연이었고.

'김이연 이 병신아… 봐뒀어야지…."

미튜브의 전지전능한 빅 데이터.

그분의 의지를 거스른 대가는 컸다.

망연자실해서 가만히 있는 김이연의 택배 상자를 안고 있는 왼쪽 팔이 가벼워졌다.

남자가 택배물의 바닥을 손으로 받친 듯했다.

"아."

김아연이 택배 상자를 놓았다.

아쉬움 때문에 그 동작은 몹시 느렸다.

"감사는 제가 감사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한참을 감고 있었던 탓에 눈이 부셨다.

눈앞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열린 적 없던 듯 굳게 닫혀 있는 문.

손에서 사라진 중량감이 아련하면서 허전하다.

마치 꿈에서 깬 듯한 기분.

김이연은 한동안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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