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쿠퐁맨
게임으로 성공하는 것.
많은 게이머들의 꿈이다.
내 경우, 그 꿈에 대한 열망이 남들보다 컸다.
10대 후반, 20대 초반.
청춘이라 불릴 만한 요소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런데도 나는 프로게이머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군 리그. 아무도 몰라줄 팀의 좀 뛰어난 선수.
그게 나였다.
내게 부족한 건 뭐였을까.
노력? 열정?
에이.
나한테 그 두 가지가 부족하다고는 세계 최고의 선수인 FACE도 못 한다.
내가 FACE를 아무리 존경해도, 나한테 저 두 가지가 부족해서 자기처럼 못 되는 거라고 하면 그 세계적 가치를 지닌 양 손목을 부러뜨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못하겠네.
어쨌든.
프로의 세계에서 성공은 노력이나 열정, 그러니까 후천적인 요소로 결정되지 않았다.
'타고난 자질.'
선천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들어와.
노크했던 문 너머에서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들어갔다.
"어, 재훈아. 할 얘기가 있다고?"
"감독님."
"응."
"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뭐?"
프로게이머의 폼이 정점을 찍는다는 22세.
나는 백수가 되었다.
* * *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벌떡하고 일으켰다.
아래에 있는 거 말고 상반신을.
"아."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내 눈두덩이를 쑤셔대는 염병할 아침햇살에 강제로 기상 당했다.
알람에 기상 당할 때와는 또 다른 알싸함이 있었다.
영화나 애니 같은 데서 보면 아침 햇살에 깨어난 사람이 기지개를 피곤 "잘잤다." 라고 말하는 듯한 상쾌한 얼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던데-
"우케했어. 판타지여, 시발…."
입에서 불을 내뿜은 용가리나.
귀가 긴 덕분에 수백 년을 사는 엘프들보다.
아침 햇살에 깨어나서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 더 판타지스러웠다.
만약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판타지의 주인공이라 여길 자격이 있다.
"으딨어…."
자연스럽게 뒤척이던 왼 손에 핸드폰이 잡혔다.
몇 신지 확인하려 했는데 응답 없이 깜깜한 화면.
주인님 일어났는데 일어나려는 시늉도 안 하는 거 보소.
'약정 끝나면 뒤졌다.'
어제 미튜뷰를 보다 잠든 게 떠올랐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에 충전기를 꽂아 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쫄쫄쫄.
그러고 나선 냉장고로.
꿀꺽꿀꺽.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과정인가.
수분을 배출하자마자 다시 공급하다니.
그냥 아래에 모인 거 끌어올려서 쓰면 안 되나.
인체의 부조리한 신비를 느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3%
충전하면서 뭐 하려면 안전 전력 5%는 확보하는 게 국룰이긴 한데, 지금은 시간만 확인할 거니까 상관없다.
그렇게 시간을 확인한 순간.
"하, 시발…."
배설과 수분보충으로 적립한 만족감이 단번에 날라갔다.
12:30
내가 잠들고 나서 6시간 밖에 안 지났다.
내가 30시간을 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쨍쨍거리는 태양 새끼 때문에 생체 리듬이 깨져 버렸다.
여기서 나는 고민에 빠진다.
2시간 더 자서 8시간을 채워, 하루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릴지.
평범한 사람들에겐 정오도 이미 퍼펙틀리하게 존나 늦은 시간이겠지만, 그 부지런한 사람들 일어날 시간에 잘 준비하는 내겐 다른 세계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잔다.
판단은 신속했고 행동은 명료했다.
차광율 쓰레기에 디자인만 좋아서 이쁜 쓰레기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커튼이 햇빛을 조금이라도 덜 통과시키도록 조정한 뒤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곧바로 잠이 들-
쾅쾅쾅!
터였다.
사람이 한창 자고 있을 시간(오후 12시30분)에 문을 두드리는 저 공감 능력 결여된 예비 연쇄살인마 싸이코패스만 아니었어도.
"아…."
자긴 글렀네.
이번 걸로 잠이 완전히 깨 버렸다.
그런데도 표정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한껏 찌푸려진 걸 느끼며 방을 거슬러 현관으로 향했다.
"…."
"…."
예비 연쇄살인마 싸이코패스와 내 사이를 가로막던 문이 열리고, 우리 둘은 마주했다.
활동성이 강조된 캐쥬얼한 하늘색 유니폼.
불청객의 정체는 다름 아닌 택배원, 쿠퐁맨이었다.
그런데 평소 우리 빌라를 담당하시던 아재가 아니다.
젊었고, 무엇보다 잘생겼다.
빡칠 정도로.
얇은 선의 이목구비, 말끔한 피부, 긴 속눈썹.
중성적 아름다움.
여자들이 꿈뻑 죽는 전형적인 미남상이었다.
'아니, 그냥 숏컷 헤어스타일 한 여잔가?'
그 때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악마/편협한 편견을 갖고 있음)이 말했다.
[에이, 여자가 뭔 택배 기사야.]
그런가?
아차.
방금 일어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나만 멍하니 있는 게 아니었다.
쿠퐁맨이 어딘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뭐지, 이 반응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미남이시여, 잘생기지 못한 불쌍하고 못난 놈을 처음 보시나요?
나까지 쿠퐁맨처럼 멀뚱히 있으면 이 상황이 영원이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강제 기상으로 썩어 있었던 표정을 억지로 풀고 인사하려 했다.
'아이고, 이른 아침(오후 12시 30분)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라고.
"예? 아! 아, 그!!!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쿠퐁맨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획 돌리는 게 아닌가.
뭐여.
왜 이래요.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내 패션.
어쩐지 춥다 싶더니 [상남자 특= 겨울에도 잘 때 빤스만 입음]에 따라, 팬티바람이었다.
에이 뭐, 이 정도야. 같은 남자끼리.
그런데 쿠퐁맨은 나 못 봤어! 못 본 거야! 라고 선포하듯,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있는 힘껏 질끈 감은 상태로 요지부동이다.
뭐지, 이 반응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아, 설마 그건가.
이 사람, 내가 무안하지 않게
'아 썅 내 눈!'
이라는 장난스러운 상황을 연출해주려 하고 있는 건가?
경이롭다.
처음 만난 지 5초 된 사람한테 이런 게 가능하다니.
이 무슨 인싸력이란 말인가.
이 무슨 친절함이란 말인가.
나는 감동받아 울부짖으며 팬티를 찢는 대신 쿠퐁맨의 의도에 따랐다.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한 쿠퐁맨께서 무안하지 않도록.
그렇게 장난스러운 언짢음을 담아 말했다.
"아이고 이거 참, 더러운 거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인싸력이 전염된 걸까.
이 인싸스러운 상황의 흐름이 쉽게 예상됐다.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다음부턴 조심하라는 뉘앙스의 짓궂은 농담 한 마디 남기곤 택배물을 건넨 뒤 유유히 떠나겠지.
"그게 아니라!"
"?"
아니라네?
역시 인싸의 길은 멀고도 또 험하다.
어느새 고개를 원위치로 되돌린, 그러나 여전히 눈은 질끈 감은 채로 말을 잇는 쿠퐁맨.
"제가 이러는 건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보, 보면, 당연히 보, 보면 안 될 것 같아가지고… 그래서 그게 아니라 그런 거고요! 충분히! 더럽지 않아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그쪽의 더럽다는 말을 부정하는 거고, 그러니까 제 말은!"
'음….'
목소리조차도 중성스러웠다.
혹시 저 중성스러운 미모의 비결은 남성성의 부재인가?
부랄 한 개 떼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 건가?
덤으로 군대도 안 가고?
이거 시발 혹하는데?
남자의 말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뭔가 열심히 말하긴 하는데.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목소리 크기와 음이 수시로 널뛰기 하고, 웅얼거리는 식이라 도통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다만, 마지막에 크게 외치다시피 한 말만큼은 확실히 들렸다.
"매력적이세요!"
한쪽 미간이 승천하는 동시에 반대쪽 미간이 추락하는 걸 느꼈다.
이 친구 지금 뭐라는 거야.
매력적이요?
꼬추가 팬티 차림을 한 꼬추 보고 보이는 반응으로썬 상당히 부적절했다.
한 마디 하려던 찰나,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최재훈(22세/천사/초등학교 때 하느님 안 믿으면서 문화상품권 받으려고 교회 갔었음)이 말을 걸었다.
[저 사람이 동성애자일 가능성은 고려했니?]
'아!'
그렇다.
세계 최대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러스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돼 있는 동성애 요소.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다.
포용의 시대다.
메시의 시대다.
나는 아직 동성애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 같지만, 어차피 생판 남이잖아?
친구나 가족이 커밍아웃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응하려고 노력한 나는-
"매력적이여 봐야 그쪽만 하려고요."
능청스럽게 그리 말했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그… 감사합니다?"
어색한 반응이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었나보다.
메모, 잘 생겼다고 다 인싸는 아님.
메모, 동성애자라고 다 인싸는 아님.
편협한 고정관념을 두 개나 깨질 수 있었던 유의미한 만남.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다.
날씨가 슬슬 걷히고 있다곤 해도 아직은 겨울이다.
추워요.
남자한테는 하체가 차가운 게 좋다던데, 정말일까?
아랫마을 거주자 Mr, 존슨(22세/서양출신[추정])씨께선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다.
남자 앞에선 한없이 과묵한 분이신지라.
쿠퐁맨은 방금 그 대답을 한 뒤로 또 굳어버렸다.
눈은 여전히 질끈 감은 상태고, 품에 끌어 안은 택배물은 건네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보니 이 친구, 인싸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
상태가 좀 많이 안 좋아 보인다.
얼른 주고 가서 볼일 보십쇼.
라는 의도로 쿠퐁맨이 한 손으로 품에 안은 택배상자의 아래를 받쳤다.
"아."
쿠퐁맨이 흠칫 하고 택배 상자를 놓았다.
그마저도 어딘가 느릿느릿했다.
"감사는 제가 감사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서 택배물을 아무데에나 내려놓았다.
그리곤 자기 전에 여기 저기 벗어둔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엉덩이가 컴퓨터 앞 의자에 안착했다.
그대로 컴퓨터를 키고, 레전드 오브 레전드를 켰다.
최근에 자유로운 창잡이(프리랜서)가 된 사람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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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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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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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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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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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삐비비비빅-
탁.
전자시계의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꺼졌다.
그렇게 아주 이른 시간, 쿠퐁워먼 김이연의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최재훈 / NSC CKK 일러스트
권지현 일러스트
이린 일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