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끼익-
고풍스러운 장식이 달려 있는 문이 천천히 당겨지며, 누군가 커다란 집무실 내부로 들어섰다.
“아, 카렌. 왔나.”
나는 처리하던 서류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으며, 또각또각 걸어와 손님용 테이블 앞에 앉는 카렌을 바라보았다.
“에릭, 너는 정말 여전하구나. 매번 올 때마다 서류에 파묻혀 살다니. 뱀파이어들은 쓸 만한 인재가 없는 것이냐? 원한다면 본녀가 사람을 보내 줄 수 있다만.”
그녀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금방 시종이 내온 차를 들어 홀짝였다.
또 그 얘긴가.
참, 질리지도 않는군.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이쯤이야 혼자서도 충분해. 오히려 직접 보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다. 그보다 아직 자리도 물려받지 못한 녀석이, 무슨 수로 멋대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거냐.”
난 매번 집무실에 찾아올 때마다 같은 소리로 얘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이마를 쿡쿡 누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읏… 하지 마라! 대체 언제까지 애 취급할 생각인가. 그리고 자리는 곧 물려받을 예정이다. 아버지께서도 이제 쉬고 싶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애당초 이게 다 악투스, 그 양반이 후계를 찾지 못해서 은퇴를 미루느라 그런 거 아닌가. 쯧, 그거 좀 먼저 물러나고 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겠지. 그래도 오히려 한창 혼란스럽고 바쁜 시기에 자식 대신 기틀을 세워 주셨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이번에도 잔뜩 심통이 난 카렌을 달래며, 나는 잠시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천천히 떠올렸다.
마왕군이 중간계를 모두 정복해 손아귀에 넣은 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계에 남아 있던 정적도 오베른이 온건파의 잔당들을 전부 규합해 포탈을 넘어왔던 터라, 전쟁이 끝난 직후부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격렬한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복구하는 작업도, 자리를 비운 동안 온건파들에게 잔뜩 쥐어 짜여 기근에 허덕이고 있던 마계를 되살리는 것도.
새로운 땅에 마족들을 이주시키고, 그 위에 문명을 세워 올리는 것까지 전부 말이다.
“첫 3년은 정말 바빠 죽는 줄 알았지. 마왕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야. 아마 발라크가 곁에 남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과로사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어.”
“흥. 대신 덕분에 본녀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늘 밑에 머물러야 했고 말이지.”
나는 발라크의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카렌을 보고선,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로 발라크를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짜증을 부리는 정도겠지.
본디 슬슬 전란의 흔적이 씻겨 내려가고, 중간계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잡혀가기 시작할 때쯤.
악투스가 차기 투마왕으로 발라크를 지목하고선 이만 일선에서 물러나려고 했었지만, 녀석이 끝까지 내 아래에 남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무산됐던 거였으니까.
덕분에 편히 물러날 타이밍을 놓쳐 버린 그와 함께, 카르카쉬의 은퇴도 차일피일 미뤄지게 된 것이었고.
“어쨌든 발라크 앞에선 실수로라도 그런 말은 좀 자제하도록 해라. 겉으로 티는 안 내도, 그 일에 대해선 속으로 꽤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읏…! 보, 본녀가 무엇 하러 그런 말을 꺼내겠느냐! 그냥… 그냥 답답해서 조금 푸념을 늘어놨던 것뿐이다. 애초에 이런 얘기, 여기서밖에 꺼내지 않고.”
카렌은 내 당부에 얼굴을 붉히며 도리질 쳤다.
뭐, 당연히 본인 앞에서 눈치를 주지는 않겠지.
이쪽도 그저 노파심에 쓸데없는 걱정이나 한번 해 봤을 뿐이었다.
똑똑-
그렇게 테이블에 앉아 카렌과 담소를 나누던 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와라.”
끼이익-
이윽고 내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발라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나 보군.
보통 같았으면 한 시간은 뒤에나 얼굴을 비췄을 텐데.
“바깥에 손님이… 음? 뭐냐, 카렌.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은 마치 본녀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친우의 집무실에 잠깐 차 한 잔 얻어먹으러 오는데 따로 이유가 필요한가?”
“그게 아니라 아무런 언질도 없이 불쑥 찾아와 멋대로 형님 방에 들어간 게 문제라는 거다. 아무리 친우라도 지켜야 할 절차라는 게….”
나는 또 얼굴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투닥이는 둘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 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무얼 자꾸 이리 다투는지.
“그만. 싸움은 나가서 하든지 해라. 그보다 발라크, 손님이 왔다고?”
“예. 악마왕께서 오셨습니다.”
아이시스인가.
나는 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의 이름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러들였다.
“에릭, 오랜만.”
“그래, 오랜만이구나. 아이시스.”
마찬가지로 지난 10년 동안 마왕으로서 격무에 시달린 그녀였지만, 그새 얼굴에 조금씩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나와 달리,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앳된 얼굴, 앳된 피부, 앳된 키.
전쟁이 끝난 초기에는 단순히 공석을 채우기 위한 인사였던지라 마왕이라고 하기엔 실력이 조금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이제는 악마족 내에서 당당히 마왕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더 이상 저를 얕잡아보고 배짱을 부리려는 놈들은 사라졌다는 모양이지만, 요새는 또 어린 용모 때문에 위엄이 살지 않아 고민이라는 듯했다.
“그냥 화끈하게 본보기로 몇 명 실력행사를 보여 주는 게 어떤가.”
“…카렌, 바보? 공포 정치도 한계가 있는 법.”
“바, 바보? 그러는 아이시스 너야말로….”
나는 금세 수다스러워진 집무실을 보며, 편안한 미소로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온건파의 잔당을 정리하고 이곳 중간계와 마계에 땅을 나누어 가질 적만 해도, 혹시 남은 이들끼리 주어진 이권을 놓고 다투진 않을까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마족들을 산 채로 자폭시키고, 실험을 통해 키메라로 만들어 부려먹은 오베른의 행태에 충격이라도 먹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던 걸까.
악투스와 릴리스가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은 덕에, 깔끔히 그간의 공적대로 땅을 나누고 필요 없는 분쟁을 없앨 수 있었다.
카르카쉬야 원래부터 금방 카렌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던 것 같고.
물론 악투스의 은퇴가 미뤄지며, 본의 아니게 조금 더 오래 해 먹게 됐지만 말이다.
“그럼 본녀는 이만 가 보겠다. 슬슬 아버지께 본인의 책무를 인수인계받을 시간이 돼서 말이다.”
“에릭,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그래, 다들 고생했다. 마음 같아선 배웅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아직 일이 밀려서 말이야.”
나는 책상에 그득히 쌓인 서류들을 가리키며, 가만히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후우….”
시종을 불러 찻잔과 다과를 정리시킨 뒤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서류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적에 따라 혼자서 3할이 넘는 땅을 나누어 받은 만큼 남들에 비해 얻은 건 많았지만, 그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 또한 거의 다른 마왕들의 세 배에 달했다.
“제가 손 좀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형님.”
“아, 그래. 매번 고맙다, 발라크.”
“하하. 아닙니다. 이런 거야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정말 발라크가 있어서 다행이지.
그가 아니었더라면 거의 새벽까지 밤을 지새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 그만한 서류가 다시 책상 위에 쌓여 있겠지.
쿵-
“좋아, 이걸로 끝이군.”
“…아.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너도 고생 많았다, 발라크.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고서 기지개를 켜며 뭉친 근육을 푼 나는, 아까부터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발라크를 돌려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툭-
크그그긍-
곧바로 시계를 확인하고선 책장에 진열된 책 하나를 옆으로 눕히자, 벽에 붙어 있던 책장이 움직이며 뒤쪽에 숨겨진 통로를 드러냈다.
저벅- 저벅-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옆에 걸린 횃불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머잖아 양쪽이 쇠창살로 빽빽한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마왕님.”
“음. 놈들은 어떤가. 잘 지내고 있나?”
“예. 그 녀석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식사를 받아들였습니다.”
오, 그런가.
나는 간만에 발작하지 않고 식사를 모두 마쳤다는 소식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좋게 좋게 말을 들어먹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걸 보아하니,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거 같아 다행이었다.
처음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식음을 전폐하는 녀석에게 꾸역꾸역 음식을 먹이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철컹-
차르르륵-
얼마나 걸었을까.
금세 끝에 있는 독방들 앞에 선 나는, 아까부터 발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발작하듯 사슬을 질질 끌던 방 앞에 서서 조용히 간수에게 턱짓했다.
달칵-
끼이이익-
“아, 아아… 아아아아아!”
열쇠가 돌아가고 천천히 열린 문 안쪽엔, 거죽밖에 안 남았을 정도로 빼빼 마른 광인이 소리를 지르며, 부러진 손톱으로 감옥 벽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에리스.”
“히, 히이이익!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부디 때리지 말아 주세요. 아픈 건, 아픈 건 이제 싫어….”
나는 꼴사나운 표정으로 내 발밑에 엎드려 싹싹 비는 에리스의 추한 얼굴을 보고선,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냈다.
아, 그토록 긍지 높았던 하이엘프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몰락했는가.
이제 고작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걱정하지 마라. 이번엔 그저 잘 있나 상태만 보러 왔을 뿐이니. 듣자 하니 오늘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은 모양이더군,”
“마, 맞아요! 에리스, 이제 말 잘 들어요. 헤, 헤헤….”
때리지 않는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네발로 기어 내 신발을 핥았다.
이제 고작해야 십 년이었다.
에리스, 그리고 내게 붙잡힌 다른 연합의 개놈들 모두.
내 복수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몇백, 몇천 년이 지나도 계속.
이 차갑고 좁은 독방에서 수명을 다해 죽음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