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99화 (199/200)

제199화

“으하하하! 저리 비켜라, 잔챙이들아!”

“아, 악투스 님! 또 혼자서….”

콰작-

뒤따라온 군대가 모두 도열하기도 전에 홀로 전장에 뛰어든 악투스는, 이성이라고는 한 줌도 보이지 않는 병사들을 향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어딘가 분위기가 좀 찝찝하긴 했지만, 이 이상 끓어오르는 열기를 붙잡고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지난 몇 주간 조용히 이놈들 뒤를 쫓으며,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날뛰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감내해 왔던가.

수세의 몰린 아군을 구한다는 보기 좋은 명분도 있겠다, 더는 근질거리는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둘 필요가 없었다.

“으, 으으…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어째서….”

“음?”

단숨에 홀로 수백의 적병을 쓰러트린 악투스는, 잠시 숨을 고르는 새에 저 멀리서 달려드는 병사를 보고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떨리는 목소리와 거무죽죽하게 물든 표정은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도망칠 듯한 자의 그것이었지만, 그는 기묘하게도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군.”

애초에 마왕인 악투스에게 잡졸들이 몰려든다는 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싸움에 굶주린 그에게 있어선 도리어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슬슬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콱-

“아, 으… 사, 살려….”

콰아아앙-!

그때였다.

기어코 다른 이의 시체를 밟고서 악투스의 다리를 붙잡은 병사는, 이내 온몸이 울긋불긋하게 부풀더니, 천둥이라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났다.

후두둑-

악투스는 하늘 높이 떠올랐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육편을 맞으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놈….”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었다.

비록 그때는 산 자가 아니었지만, 과거에 이미 죽은 시체를 이용해 폭발을 일으킨 놈이 한 명 있었다.

“드라쿨!”

카르카쉬와 체르페슈의 손에 끌려 내려간 선대 혈마왕.

이 빌어먹을 온건파의 잔당들은, 그의 기술을 개량해 도저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리고 말았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이런 식으로 마계의 백성들을 마치 파리 목숨이라도 되는 양 부리다니.

이럴 거면 도대체 뭐 하러 이 전쟁을 일으켰단 말인가.

차라리 높은 이들의 입맛대로 수를 조절해 자원을 아끼면 그만이지.

이는 생명에 대한 모독이자, 지금껏 수많은 병사의 희생 아래 치러진 전쟁의 의미 자체를 조롱하는 행위였다.

쩌어어엉-

“어윽, 큭….”

“아, 아으… 다리가….”

악투스는 흉포한 기세를 터트리며, 전보다 더 거세게 적들을 밀어붙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더 이상 이 같잖은 짓거리에 한 명이라도 더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는 빠르게 전장에서 적을 지워 나갔다.

* * *

피잇-

늦지 않게 고개를 틀어 화살을 피한 나는, 곧바로 앞에서 검을 내질러 오는 수호자를 보며 단검을 들어 올렸다.

카각-

시뻘건 검기가 수호자의 검을 빗겨내며, 그대로 껴입은 중갑 사이에 훤히 드러난 목을 노렸다.

“마, 말도 안….”

푸욱-

시퍼렇게 선 날이 부드러운 피부를 찢어내고 안쪽 깊이 파고들었다.

투구 덮개 사이로 드러난 눈에 한줄기 경악이 비쳤다.

“죽어라, 이 괴물아!”

부웅-

그사이 내 양옆에 자리 잡은 둘이 거의 동시에 검을 휘둘러 왔다.

하나는 상체, 하나는 하체.

언제 눈빛으로라도 의견을 나눈 듯, 서로 검로가 겹치는 일이 없도록 완벽하게 양쪽 퇴로를 틀어막았다.

촤악-

나는 검이 지척에 닿기 전, 목에 박아 넣은 단검을 있는 힘껏 옆으로 잡아당기며, 그대로 오른쪽에서 위로 휘둘러오던 검을 쳐냈다.

채앵-

“뭣….”

맑은 쇳소리와 함께 검이 튕기며, 아찔한 괴력에 무기를 놓친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쩌억-

“컥!”

허벅지 높이로 날아드는 검을 피해 눈앞의 수호자를 향해 달려는 나는, 부딪히는 충격에 거친 숨을 토해 내는 놈을 붙들어, 그대로 잡아다 빙글 돌렸다.

파박-

“꺼윽….”

기회를 노리고 날아든 화살이 갑옷을 꿰뚫고 녀석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꽤 튼튼한 무장이었음에도 등 부분으로 화살촉이 삐져나올 만큼 대단한 관통력이었다.

물론 끝까지 뚫었더라도 그 약해진 위력으론 내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매정한 여왕님이시로군. 이렇게 충실한 부하의 숨통을 이리도 가차 없이 끊어 버리다니 말이야. 그런 부분은 누구를 꼭 빼닮았군. 제 충복의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 살해당했는데도, 그 원수일지 모르는 녀석들과 연합을 맺으려던 누구와 말이야. 원래 엘프 여왕은 다 그런 건가?”

“크읏… 닥치세요!”

파앙-!

에리스는 제 동생을 들먹이는 내 노골적인 도발에 보란 듯이 걸려들었다.

나는 냉정을 잃고서 마구 화살을 쏘아 대는 녀석을 보며,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부하들 사이를 스치고 다녔다.

“아악!”

“에, 에리스 님 진정… 윽!”

눈먼 화살은 은근슬쩍 적들의 다리를 걸고 밀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하하하! 웃기는군. 그거 조금 화났다고 해서 닥치는 대로 부하들을 쏴 죽이는 꼴이라니! 테네스 그년이 옳았군. 그때 너를 숲 밖으로 내보냈다간, 지금처럼 애먼 동료와 사람들만 잡아다 죽였겠지. 그 덜떨어진 동생의 복수라는 얼빠진 이유를 대고서 말이야!”

“닥쳐… 닥쳐, 닥치라고! 네놈이, 네까짓 놈이 뭘 안다고 그리 지껄이는 거냐!”

나는 드디어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식을 그만둔 에리스를 보며, 광대처럼 입꼬리를 휘었다.

“흐흐.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 저 하나 살겠다고 제국에 눌러앉은 다른 엘프들의 위치를 모두 팔아넘긴 네 동생이나, 제 욕심 하나로 여왕을 배신하고 그 자리를 멋대로 찬탈한 네놈이나. 똑같이 구역질이 나는 쓰레기들이라는 걸 말이야!”

스억-

분을 못 이겨 마구 쏘아 대느라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화살을 반으로 갈라 버린 나는, 어느새 둘밖에 남지 않은 수호자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다. 오로지 네놈 하나 때문에 그 오랜 엘븐하임의 역사가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마침표를 찍는 거다!”

나는 광소를 터트리며 단검의 날을 세웠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저 빌어먹을 엘프의 가식을 벗겨내고, 끝내 복수의 종지부를 찍는 이 날을 말이다.

“…잡아.”

“예, 예?”

“잡으라고! 저 녀석을 붙잡으란 말이다! 팔이 잘리더라도, 목이 날아가더라도. 저 빌어먹을 대가리에 화살을 처박을 수 있게, 녀석을 붙잡으란 말이야! 이 나를 위해서!”

녀석은 길길이 날뛰며 당황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는 수호자들을 쏘아붙였다.

한심한 놈.

하지만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내 여왕의 명을 거절하지 못했다.

서걱-

“크읍! 이, 이까짓 거….”

에리스가 시위에 화살을 걸기 무섭게 새하얀 검기를 휘두르며 달려오던 둘은, 단검에 손목과 함께 검을 떨어트리고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콰악-

“끄으… 에리스 님, 어서….”

끝내 맨손으로 내 앞에 닿아 양다리를 하나씩 붙든 놈들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 하하… 아하하핫! 잘했어요. 그대로 꽉 붙잡고 있으세요. 씹어 죽일 놈. 그 잘난 주둥이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도 여기까지다.”

안쓰러운 것.

나는 이쪽을 향해 겨누어진 화살촉을 가만히 바라보며, 피식 조소를 터트렸다.

“죽어!”

터엉-!

짧은 외침을 뒤로하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미간에 틀어박혔다.

“아하하하! 에리안… 드디어, 드디어 당신의 원수를 갚았어요. 이 쓰레기를 마침내 제 손으로….”

“프흡!”

화살이 박힌 충격에 마치 죽은 것처럼 머리가 뒤로 넘어간 나는, 아이처럼 기뻐하는 에리스의 목소리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 어, 어떻게!”

난 경악한 얼굴로 말을 잊어버린 그녀를 보며, 미간에 닿기 직전에 혈마법으로 만들어 낸 작은 방패에 튕겨 나간 화살을 들어 올렸다.

“글쎄. 어떻게 살았을까.”

“오, 오지 마…! 당신들, 뭐 하는 거예요!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똑바로 잡고 있으라고….”

짜악-!

“아윽!”

그새 기력을 다했는지 기절해 버린 둘을 떨치고 에리스에게 다가간 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돌아간 그녀의 고개를 보며 조용히 입가를 히죽였다.

“이, 이 미개한 족속이 감히… 감히 나를!”

뻐억-

“어윽….”

난 이윽고 발길질 한 번에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하자고, 돌아가서. 어차피 이제 시간은 넘치도록 많으니까. 못해도 네 남은 수명만큼, 수백 년 정도는 말이야.”

“형님!”

일이 마무리된 직후.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고개를 돌린 나는, 엘프들을 상대하는 사이 깔끔하게 정리된 전장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형님! 상처가 많으실 텐데, 어서 돌아가시지요.”

“그래.”

나는 기절한 에리스를 한 손에 잡고 질질 끌며, 발라크를 따라 모두의 곁으로 돌아갔다.

“에릭! 무사한가!”

“…에릭, 천만다행.”

저 멀리서 나와 발라크가 돌아오는 것을 본 카렌과 아이시스가 한달음에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음. 너희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난 그런 그들을 미소로 마주하며, 열심히 시체들을 파묻으며 뒷정리 중인 병사들을 지나 막사로 향했다.

“…끝이로군.”

연합에게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고, 이 반푼이에 불과한 뱀파이어의 몸으로 들어온 지도 수년.

나는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내 복수극에 이만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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