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아이시스, 괜찮나?”
“…응.”
카렌은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전장을 탈출한 아이시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이걸로 마왕들은 모두 멀쩡했다.
아직은 군의 지휘를 생각해 공석을 채우기 위한 임시직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마왕은 마왕이었다.
군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건재하다면, 이런 혼잡한 상황 속에서도 빠르게 병사들을 규합하고 정비를 마칠 수 있었다.
“망할! 쓰레기 같은 놈들… 어떻게 그런 짓을!”
셀레스트는 폭발에 휘말려 검게 그을린 팔을 부여잡으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까지 맥없이 밀려날 정도의 싸움이 아니었다.
다들 지친 몸뚱이에도 거의 두 배는 많은 적을 나름대로 잘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엔 갑작스럽게 군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지만, 이내 살짝살짝 전열을 물리며 진형을 가다듬은 이후로는 도리어 흐름을 가져오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갑자기 적병이 하나둘씩 폭발하며 주변 일대를 휩쓸어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리 승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해도, 저놈들은 확실히 도를 넘어섰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서야, 이겨도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거늘.”
카렌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군은 상황이 불리해질 기세가 보이자, 목숨을 도외시하고 우르르 달려들어 자폭을 감행했다.
물론 위협적이긴 해도 대처만 잘한다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의 폭발이었지만, 창날에 꼬챙이처럼 온몸이 꿰뚫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그 광기 어린 모습은 제아무리 수많은 전투를 거쳐 온 역전의 용사들이라 하더라도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쉼 없이 이는 폭발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동료의 육편이 터져 나가는 광경에 질린 병사들은 기겁하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마왕들을 비롯한 사천왕 그리고 장군들까지 모두 하는 수 없이 혼란에 빠진 군을 이끌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아버지께서만 멀쩡하셨어도….”
카렌은 분한 듯 손톱을 깨물며, 심각한 표정으로 쟈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르카쉬를 살폈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사용하느라 마력의 대부분을 소진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날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판단을 책하진 않았다.
그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성벽을 완전히 허물어트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지도 몰랐으니까.
“조금 있다 반격에 들어간다. 다들 준비해 놓도록.”
“예? 하, 하지만 아버지….”
“지금은 아버지가 아니라 마왕이다. 카렌. 너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다. 놈들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이제 대강 눈치챘으니 말이다.”
마법.
카르카쉬는 적병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던 광경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물을 흘리며 울분에 찬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끝내 달라붙어 오는 그 모습은, 어떻게 봐도 병사들 자신의 의지라고 볼 수 없었다.
수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들조차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쉬이 수그러들지 않거늘, 하물며 이제 막 날붙이를 손에 쥔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농노들은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아직 저 안에 끝까지 남은 멍청이가 둘이나 있으니까.”
“…발라크, 에릭.”
카렌은 제 아비의 말에 입술을 꾹 물며, 저 멀리 우글거리는 적병 사이에 남아 있을 두 사람을 떠올렸다.
적장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적진으로 파고들어 간 바보 같은 뱀파이어. 그리고 죽어도 제 형님과 같이 죽겠다며 말릴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우직한 발록.
“개량된 부분이 많아서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 마법은 분명 전전대 혈마왕인 드라쿨이 다루던 것이었다. 본디 아직 피가 굳지 않은 시체를 폭발시키는 마법이었지만, 그놈의 아둔한 자식이 기어코 일을 저지른 거겠지. 파훼법은 간단하다. 수속성이나 빙속성 마법을 사용해 얼리면 터지지 않는다. 나머지는 마법사들을 지킬 수 있도록.”
카르카쉬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내려놓았던 장비들을 챙겨 입었다.
온건파의 잔당이 이렇게나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왔다는 건, 놈들의 눈을 속이고 언제든 뒤를 쫓을 준비가 돼 있던 아군도 열심히 달려오고 있으리란 얘기였다.
“반격이다.”
천륜을 어지럽힌 무뢰배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박아 줄 때였다.
* * *
촤악-
눈앞의 병사가 머리에서부터 가랑이까지 반으로 갈라지며 핏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허억, 헉….”
어깨 위로 들어 올린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이걸로 벌써 몇 명인지, 수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주변은 이미 적병의 시체로 산처럼 뒤덮였고, 그들의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넘어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콰아앙-!
“크윽….”
“형님! 후욱…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괜찮다. 그보다 발라크, 네 걱정부터 좀 하는 게 좋겠군.”
“흐흐. 숨이 좀, 하아. 차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베른의 죽음 직후 적군에게 둘러싸인 나는 어떻게든 탈출해 보려고 했지만, 놈들은 머리가 날아가면서까지 꾸역꾸역 내 다리를 붙잡으며 길을 막았다.
그 놀라운 집념에 당황에 빠진 것도 잠시.
곧바로 팔을 뿌리치고 다시 도망치려고 했지만, 사방을 가로막은 병사들이 갑자기 제 몸을 폭발시켜가면서까지 앞을 막아서느라, 기어코 지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쯧. 바보 같은 놈. 그러게 왜 여기까지 돌아와서 그리 고생을 자처하는 거냐.”
“섭섭한 소리하지 마십시오. 아우가 어찌 형님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렇게 매초 생사를 오가는 즐거운 전투를 앞에 두고, 어떻게 도망갈 생각을 하겠습니까.”
“…너도 참 별종이군. 뭐 됐다. 얘기는 이제 여기서 탈출한 뒤에 하도록 하지.”
말이야 그래도, 발록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싸움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정정당당히 서로 무기를 맞대는 게 아닌, 저렇게 제 목숨을 도외시하며 자폭해 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명예롭기보단 도리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신성한 전투를 더럽히는 걸로도 모자라, 보란 듯이 모욕하고 있는 짓이었으니까.
쐐액-
카가가각-
“크으… 젠장, 거슬려 죽겠군.”
한참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이 나간 병사들을 베어 넘기던 나는, 그들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화살을 힘겹게 빗겨내며 이를 악물었다.
에리스, 이 빌어먹을 년이….
간간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이 망할 화살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발라크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안 되겠군. 발라크! 도망친다.”
“예? 하지만 형님….”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하도록 한다. 이대로 있어 봐야 결국 말라죽을 뿐이야.”
아직 사방에 적이 가득했다.
과연 도망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계속 여기서 버티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운이 좋다면 팔다리 하나 정도로 끝낼 수 있을 테지.
“내가 신호를 보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리는 거다. 알았….”
쩌어엉-
그렇게 잠시 상황을 살피다 그나마 포위 벽이 얇은 곳을 찾아내고선, 그리로 뚫고 지나갈 궁리를 하던 찰나.
귀를 찌르르 울리는 소음이 전장을 강타함과 동시에, 저 멀리 거대한 얼음벽이 세워진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참 빨리도 오는군.”
나는 늦게나마 전열을 가다듬고 전장에 복귀한 아군을 보고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발라크. 조금만 더 버틸 수 있겠나?”
“하하! 끄떡없습니다, 형님!”
발라크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몸뚱이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보란 듯이 제 가슴을 두드려 댔다.
좋아.
앞으로 조금.
난 덜덜 떨리는 팔에 힘을 꾹 불어넣으며, 옅어진 검기를 다시 검붉게 물들였다.
둥- 둥둥-
“…음?”
그렇게 결의를 가다듬고서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적들의 목을 하나씩 떨어트리고 있을 때.
묵직한 북소리와 함께 저 멀리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전장아, 내가 왔도다!”
“…악투스. 아무래도 지금 그렇게 신나 할 때는 아닌 거 같은데? 서두르는 게 좋겠어.”
“오! 다들 들었나? 서둘러 저 비겁한 놈들을 쓸어버리라신다!”
“와아아아아!”
악투스. 그리고 릴리스.
나는 십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그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오늘이 죽을 날은 아니었나 보군.
“발라크.”
“예, 형님.”
“금방 아군이 데리러 올 거다. 그때까진 혼자서도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얼른 일 보러 가십시오.”
기특한 놈.
듬직한 원군의 합류에 다시 기운이 북돋운 난, 비틀거리던 몸을 꼿꼿이 세우며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 달렸다.
“에리스.”
화살이 날아오던 방향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중간중간 앞을 가로막은 녀석들을 무시한 채.
꿋꿋하게 그녀가 있을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크읏, 어째서… 분명 아까 도망친 놈들이 전부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것이…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찾았다.”
후웅-
단검에 두른 검기까지 다시 마력으로 돌려 재빠르게 적병 사이를 돌파한 나는, 수호자로 보이는 엘프 몇 명과 함께 무너진 성벽 뒤편에서 활을 잡고 있는 에리스를 발견하곤, 곧바로 그녀를 향해 날을 휘둘렀다.
“에, 에리스 님! 피하십시오!”
스억-
쯧, 쓸데없는 짓을.
더 이상 활을 다루지 못하도록 팔의 힘줄을 베어내려던 나는, 날이 닿기 직전에 그녀를 밀쳐내며 대신 어깻죽지 아래로 쭉 잘려나간 수호자를 보며 혀를 찼다.
“아, 아르곤!”
“에리, 스 님… 도망….”
툭-
죽었나.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린 녀석을 잠시 내려다보다, 이내 관심을 거두고선 조용히 시선을 올렸다.
“…에릭 가이오스.”
드디어.
난 저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수호자들의 뒤에서 시위를 당기는 에리스를 보고선, 히죽 입꼬리를 들썩였다.
“네놈만큼은… 네놈만큼은 기필코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마!”
피잉-
시위를 떠난 화살이, 엘프들 사이를 지나 정확히 내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