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잠시 정지! 멈춰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다들 대기!”
쿵- 쿵-
불과 일이년 전까지만 해도 농노에 불과했던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내어진 명령에도 꽤나 절도 있게 걸음을 멈춰 섰다.
주전파의 전력이 죄다 중간계로 넘어간 상황에서 차근차근 마계에 세를 넓힌 온건파의 손에 강제로 축출당한 이들이었지만, 혹독한 훈련과 그간 모아 둔 재산을 풀어 가면서까지 약속한 보상은, 그들을 턱없이 모자란 시간에도 그나마 하나의 군으로 엮일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어 줬다.
“저건….”
그런 병사들의 앞에서 모두를 이끌던 오베른은, 난데없이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조용히 위를 올려다봤다.
“…카르카쉬!”
거대한 운석이 꼬리를 그리며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에 능통한 악마족과 용족들 내에서도 다룰 줄 아는 이가 손에 꼽는다는 최고위 대규모 살상 마법.
보통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그 크기와 파괴력이 달라진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정도의 운석을 떨어트릴 수 있는 사람은 마룡왕 말고 없었다.
으득-
오베른은 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동시에 속으로 스멀스멀 환희가 차올랐다.
제아무리 카르카쉬라 한들, 저쯤 되는 마법을 부리고서 상태가 멀쩡할 리 없었다.
녀석이 가진 그 바다와 같은 마력의 태반을 비워 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이 바로 녀석을 덮치기에도 적기라는 얘기였다.
“서두른다.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예, 오베른 님. 전군 전진! 속도를 높인다!”
목적지가 머지않았다.
그는 운석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기껏 비어 낸 마력을 다시 회복하기 전에, 그리고 저 운석이 떨어진 직후 남아 있던 모두가 쓸려나가기 전에.
가능한 빨리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 * *
타닥- 탁-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거대한 크레이터만이 남아 있었다.
위태위태하게 서 있던 성벽도, 끝내 도망치지 못한 엘프와 드워프들도, 이제는 딱히 쓸모가 없어진 충차도.
모두 한 줌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굉장하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터무니없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앞서 성벽을 둘러싼 방어막을 무너트리고 구멍을 내놓은 카렌과 아이시스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파괴력의 차원이 달랐다.
지난번에 카렌이 사용했던 미티어 스트라이크와는 그 범위부터가 달랐다.
성벽 한쪽을 완전히 무너트린 수준이 아닌, 꽤나 떨어져 있는 도시의 광장까지도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건물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으흠! 아버지의 마법이다.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제 아비의 눈부신 활약에 귀까지 걸린 입꼬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어제부터 말은 안 했어도, 별다른 진전 없이 석 달 가까이 발이 묶여있어 초라해진 카르카쉬의 모습에 내심 안타까워하던 그녀였다.
이제야 조금 마음을 돌린 거겠지.
“으음….”
하지만 나는 마냥 같이 기뻐해 줄 수만은 없었다.
위력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성벽은커녕 도시에까지 뻗친 일격에, 과연 에리스들이 살아나 있을까 의문이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난 노심초사한 얼굴로 재빨리 도시 근처를 살폈다.
“후욱, 흐… 윽!”
“카, 카르카쉬 님!”
제가 만들어 낸 참상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르카쉬는, 이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꽤나 무리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가지고 있던 마력의 대부분을 방금 그 한 방에 쏟아부은 거겠지.
갑자기 그 커다란 마력이 훅 빠져나가니, 단번에 몰려오는 피로를 버티지 못하고 몸이 무너진 것이리라.
어쩐지, 용사 시절에 맞닥트렸을 때도 보여 주지 않던 위력이더라니.
무슨 마음에서 그런 건지는 알겠으나, 너무 과한 처사였다.
분명 온건파의 군세가 도착하기 전에 이쪽 일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던 거겠지.
“혈마왕님? 저거, 마왕님께서 눈독 들이고 있던 녀석 아닌가? 숲으로 도망치려는 모양인데.”
“음?”
폐허가 된 주변을 한참 동안 두리번거리던 나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어느 한쪽을 가리키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찾았군. 고맙다, 릴리아나.”
“후후. 별말씀을. 어떻게, 도와줄까?”
“됐다. 내가 직접 가지.”
나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 끝에 점처럼 줄어들고 있는 한 엘프 무리를 발견하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새 멀리도 도망쳤군.
그래 봐야 더는 갈 곳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힘 빼기는.
“발라크. 나머지는 너에게 맡기겠다.”
“예, 형님!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
콰앙-!
“저, 적이다! 적습이다!”
적습?
난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에, 황급히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그르륵…
대강 8m 정도는 되어 보이는 듯한 거대한 키, 비정상적으로 부푼 근육과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오크? 아니, 뭔가 이상하군.”
녹색 피부는 오크의 그것이었으나, 저런 덩치를 가진 오크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해 후열을 파고든 녀석은, 이성을 잃은 듯 번들거리는 침을 줄줄 흘리며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그 키메라인가 보구나.”
“키메라?”
나는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을 어찌 알아본 듯,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음? 모르는 건가, 에릭?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아버지께 건네받은 자료를 정리하느라 전해주질 못했구나. 실은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셀파스트가 급히 막사로 찾아왔었다. 온건파에서 우리를 치기 위해 꽤 흥미로운 실험체들을 준비한 것 같다고 말이다.”
실험체라.
그 말을 듣고 보니 대충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갔다.
영락없이 오크로 보이는 피부색에,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덩치.
거기에 결정적으로 여기저기 자국이 선명한 봉합 흔적까지.
아무래도 여러 명의 오크를 가져다가 잘라 내고 여기저기 끼워 맞춰,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낸 모양이었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형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제가 다 박살 내 버리고 오겠습니다!”
윤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끔찍한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격노한 발라크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으르렁거렸다.
“발라크. 아직 적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무얼 나서겠다는 거냐.”
“그, 그건….”
“조금만 기다려라. 슬슬 도착한 모양이니.”
부스럭-
나는 키메라들이 튀어나온 방향에 길게 늘어진 풀숲이 움직이는 소리에, 조용히 그리로 눈길을 돌렸다.
“쯧. 쓸모없는 놈들. 그새를 못 버티고 뚫려 버린 건가.”
뱀파이어?
난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을 이끌고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마족을 보며,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훑었다.
저놈이 지금 온건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인가.
겉으로 보기엔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군.
생체 실험과 병기를 만드는 행위는 마계에서도 엄격히 금지되어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생태 자체가 본신의 강함을 제일로 쳐주는 곳이기도 했고, 온건파의 쇠락 이후 크고 작은 전쟁 또한 모두 사라지다시피 했으니, 굳이 그런 비인륜적인 병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애써 맞춰 놓은 각 세력 간의 균형에 균열이 갈 수도 있기에, 이는 마왕들 모두가 모여 합의하고 공표한 내용이었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생체 실험의 결과물을 보란 듯이 전장에 가져다 쓰다니.
간이 어지간히도 배 밖에 나오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싶다지만, 이미 수백 년간 그리 여겨진 풍조를 정면으로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정예란 정예는 이미 우리가 전부 긁어모아, 불안에 찬 시민들만이 남아 있던 마계에서는 더더욱.
자칫하면 전쟁이고 뭐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힘없는 농노들이 그래 봐야 무얼 할 수 있겠냐만은, 적어도 거기서 저만한 병력을 이끌고 왔다는 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어찌 그들을 잘 어르고 달래었다는 뜻이었다.
“들어라! 거짓된 왕을 따르는 무뢰배들이여! 선대의 피를 이은 우리야말로 진정한 마왕이며, 마계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 적법한 후계들이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이 이상 학살하지 않겠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진정한 마왕? 적법한 후계?
나는 다짜고짜 앞으로 나와선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런 식으로 병사들을 꼬드긴 건가.
본신의 힘이 모든 걸 좌우하는 마계에서 그런 명분을 내세웠다는 게 참 우스운 일이긴 했지만, 뭐가 됐든 잘 먹히기만 하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확실히, 끝내 마계에 남아 있던 이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었으니, 전쟁에 끼지도 못해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잃어버린 그들에겐 어쩌면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으리라.
이쪽이 성공적으로 중간계를 정복해 버리고 나면 그만큼 새로운 땅과 자원을 누릴 기회가 찾아온다고 해도, 남아 있던 이들에겐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도리어 저들과 같이 배를 곪던 이들 중 일부가 기득권이 되어 돌아올 테니, 저들 배만 아픈 일이겠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군. 쳐라.”
“와아아아!”
“죽여! 저 간악한 배신자 놈들을 전부 쓸어버려라!”
놈의 선전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화에 불을 지를 뿐이었다.
뭐, 저쪽도 애초에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겠지.
그랬으면 처음부터 키메라들을 먼저 풀어 놓진 않았을 테니까.
“흐음….”
나는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전장을 보며, 슬쩍 에리스가 도망친 방향을 훑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급하게 쫓을 것도 없이, 이쪽 일을 먼저 처리하고 천천히 숲을 살펴도 될 일이었다.
어쩌면 한 손 거들기 위해 도중에 돌아올지도 모를 노릇이고.
스릉-
그럼 빠르게 불청객들부터 치워 볼까.
난 잠시 넣어 둔 단검을 다시 뽑아 들며, 우선 전장 한가운데서 날뛰고 있는 키메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