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숲 외곽.
길게 도열한 병사들이 폐허가 된 마을 안팎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마을 터를 셋이나 둘러싸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였다.
“답장은 아직인가?”
“예, 드라쿨 님. 아무래도 마왕의 군세들과 한창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베른 드라쿨.
체르페슈를 위시로 한 주전파와 카르카쉬의 협공으로 인해 무너진 전대 혈마왕의 혈육인 그는, 저와 뜻을 같이하는 전대 마왕들의 핏줄과 온건파의 잔당들과 함께 군을 일으켜, 백만에 달하는 군세를 이끌고 포탈을 넘었다.
“마왕? 아니지. 진짜 마왕의 군세는 바로 여기 있지 않나.”
“아! 시, 실언을….”
“됐다. 이제 곧 헷갈릴 것도 모두 없어질 테니 말이야. 그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서 서둘러야겠군.”
오베른은 저 멀리 숲의 안쪽을 바라보며 슬슬 몸을 일으켰다.
주전파가 중간계 정복을 위해 마계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긁어간 터라, 백만의 군세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농기구 대신 날붙이를 쥔 농노들에 불과했다.
확실하게 승기를 잡기 위해선, 기껏 남아 있는 놈들마저 버티지 못하고 쓸려나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간부들에게 전하라. 휴식은 끝났다고.”
“예! 휴식은 끝이다. 다들 일어서!”
철컥-
부하의 외침에 하나둘씩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물결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곱 명의 마왕 중 자그마치 네 명이 죽었다.
거기에 릴리스와,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인 악투스마저 큰 부상을 입고 휴식 중.
몇몇 신참 마왕들이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고작 5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기존의 마왕들을 넘을 만한 무력을 갖추었을 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군의 지휘를 위해 잠시 자리에 올랐을 뿐이겠지.
그 마왕들 중에서도 최강이라 불리던 카르카쉬가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그 하나쯤이야 충분히 젖힐 자신이 있었기에 이리 나선 것이었다.
제아무리 태반이 농노들로 이루어진 군세를 이끄는 그들에게도, 비장의 수 한둘쯤은 있는 법이었으니까.
“카르카쉬….”
오베론은 조용히 원수의 이름을 읊으며, 으득 이를 갈았다.
그의 아비는 비록 제 잇속을 챙기는데 눈이 멀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명예를 아는 자였다.
수백 년 전, 보잘것없는 남작가의 소생으로 시작해, 오로지 제 실력 하나만으로 차근차근 전공을 쌓아 올려 끝내 마왕의 좌에 오른 남자였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용족은 체르페슈, 그 배신자의 등을 떠밀어 내분을 종용했다.
“죽여 주마.”
그 탓에 선대 마왕인 제 아비는 마왕의 자리를 찬탈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어서도 광장에 머리가 매달리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하다못해 정당한 방법으로 패했다면 이리 분노가 쌓이진 않았을 터였다.
허나 놈들은 세간의 시선을 피해 군을 파견해 주면서까지 그를 끌어내렸다.
“출발한다.”
오베른은 금세 채비를 마치고 도열한 병사들을 보며,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남은 건 복수뿐.
명예롭지 못한 방법으로 흥한 자는, 명예롭지 못한 최후를 맞이함이 옳았다.
혹 이 일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좋았다.
설령 적과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주전파를 멸하고 과거의 위상을 되찾으리라.
그리고 저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빼앗아 손에 넣으리라.
그것은 본디, 우리의 것이었으니까.
* * *
“카, 칼릭소 님!”
“저 빌어먹을 마족 놈이… 녀석을 보내지 마라! 어떻게든 칼릭소 님을 구해야 한다!”
칼릭소가 마왕의 손에 붙잡힌 지금.
엘프들의 눈물겨운 항전과 드워프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충차를 막아냄으로써 간신히 균형을 잡아가던 전황이, 빠르게 마왕군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어서 돌아오세요! 그렇게 멋대로 나갔다간….”
“아악!”
“컥… 칼릭, 소 님….”
저들의 왕을 구하기 위해 냉정을 잃고 달려드는 드워프들로 인해, 여태껏 힘겹게 버텨 오던 전열이 손쓸 새 없이 무너져 내렸다.
“제기랄!”
멍청한 난쟁이 녀석들.
에리스는 전혀 통제가 먹히질 않는 그들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찢어진 입술 새로 피가 주륵 흘렀다.
이대로 가다간 원군이고 뭐고, 그전에 성벽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다들 뭐 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 없이 돌진해서 어떻게 칼릭소 님을 구하겠다는 거냐!”
하지만 남은 이들 중에도 아주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가고 있는 동료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놈들은 칼릭소 님을 죽일 생각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포로로 붙잡고 있을 속셈이겠지. 그 증거로, 일부러 기절시켜 데려가지 않았나!”
힘없이 축 늘어져 끌려가는 왕을 보며 무작정 적진 한가운데로 달려들던 드워프들은, 그 외침에 하나둘씩 뒤로 물러섰다.
“곧 원군이 올 거다. 구출은 그때가 돼서도 늦지 않다! 도리어 지금 나서 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크윽….”
계속되는 설득에, 다들 자리를 찾아 다시금 전열을 갖추었다.
하지만 이미 피해가 막심했다.
그 한순간에 칼릭소를 따라 성벽을 넘은 병사의 절반가량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했던 충차들도, 어느새 셋이나 성벽에 붙어 있었다.
“충차가 우선이다! 뒤는 엘프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충차를 부수러 간다!”
살아남은 드워프들은 천 명씩 무리를 지어 충차를 막으러 흩어졌다.
뿐만 아니라 안쪽에서 화살을 나르고 수성 병기를 다루던 인원들까지 병력을 나누어, 바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옆에서 한창 마법을 준비 중인 카렌과 아이시스를 보며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카앙-!
“빌어먹을!”
성벽 위에서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미간을 노리고 정확히 날아든 화살은, 검붉은 방패에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몸집을 불려가던 마력은,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에릭.”
“음, 알았다.”
나는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병사를 물려라.”
“예, 마왕님. 다들 뒤로 물러나라!”
사천왕의 명에 충차에 붙은 병사들까지 전부 전선을 물리기 시작했다.
본래는 성벽을 부수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이렇게 적들의 전력이 바깥에 나와 있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전군 후퇴 완료했습니다”
“좋다. 카렌, 아이시스.”
나는 금세 뒤쪽으로 빠진 병력을 보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비록 그사이 등 뒤를 쫓은 적들로 인해 적잖은 사상자가 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로 전투의 끝을 앞당길 수만 있다면야 값싼 희생이었다.
“블리자드 스톰.”
“인페르노.”
번쩍-
굳게 닫힌 입술이 들썩이며, 환한 빛이 일대를 감쌌다.
화륵-
동시에 검붉은 불길이 바닥을 타고 성벽을 향해 번졌다.
“아, 아아아아악!”
“흐어어억! 부, 부으리….”
진즉에 위험을 느끼고 성문으로 돌아가던 드워프들은, 불길에 휩싸여 타기도 전에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서, 성벽이….”
멀리서 열기를 쐬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뜨거운 불길에 녹아내린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굳건히 도시를 지키던 성벽도, 조금씩 구멍이 생기며 흐물거리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 드워프들의 성벽은 고작 이 정도로….”
휘오오-
불길이 한 차례 적진을 집어삼킨 직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새하얀 눈발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치익-
불길은 눈송이가 닿기 무섭게 빠르게 힘을 잃고 꺼져 갔다.
쩌적-
이윽고 완전히 불씨가 수그러든 자리에, 곧 서리가 끼며 단숨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껏 불을 지펴 놓고 얼음을? 도대체 무슨 꿍꿍이….”
으직-
“무, 무슨!”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드워프들은, 이내 불길한 소리와 함께 갈라지기 시작한 성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간단한 작용이었다.
군데군데 녹아내려 구멍이 난 성벽에, 불길을 식히며 생긴 물이 들어갔다 꽝꽝 얼어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물은 특유의 분자 구조 때문에 고체가 되면 도리어 부피가 늘기 마련이었다.
가뜩이나 약해진 벽이 그 팽창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원리를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조금 얕았나.”
하지만 눈발이 그칠 때까지, 조금 흉물스럽긴 해도 성벽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축조 기술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엔 뒤가 없으니만큼 튼튼한 자재들을 다 가져다 부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이제 툭 치면 무너져 내릴 듯 약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하지. 발라크!”
“예, 형님.”
나는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느라 지친 아이시스와 카렌을 뒤로 물리고서, 발라크와 함께 진격할 채비를 마쳤다.
뭐 말이야 툭 쳐도 무너질 거라 얘기하긴 했어도 여전히 성벽이 굳건히 버티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박살 날 것이었다.
애초에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오는군.”
쿠구구구-
나는 하늘 위에서 꼬리를 그리며 내려오는 시뻘건 암석 덩어리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 저게….”
“에리스 님!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방어막도 없고 더 이상 온전치 않은 성벽으로는 떨어지는 운석을 막을 수 없으리라 직감한 엘프들이 성벽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독 안에 든 쥐들에 불과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