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흐읍!”
쩌엉-!
거대한 망치가 단검을 막아 세웠다.
저릿한 충격이 날을 타고 온몸을 찌르르 울렸다.
거의 300에 달하는 힘으로도 뚫어낼 수 없는 묵직한 일격.
아무리 단검과 망치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능력치의 차이는 쉬이 좁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못해도 상대의 힘이 250가량은 되리란 얘기였다.
“뱀파이어…. 그렇군. 네놈이 마왕인가!”
칼릭소는 왕이기 이전에 한 명의 전사였다.
아델바르와 같은 재주는 없었지만, 개인의 무력은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짤막한 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덩치.
거친 생김새만큼이나 강한 힘과 보기와 달리 섬세한 손재주.
수백이 넘는 부족이 모여 이루어진 왕국의 꼭대기에 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드워프다운 남자였다.
“아델바르가 신세 좀 진 모양이더군.”
부웅- 붕-
녀석은 제 키보다 큰 망치를 마치 빈 봉 다루듯 가볍게 돌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들어가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의 왕을 따라 성벽을 넘은 드워프들 모두 어느새 내 주변을 둘러싼 채로 저마다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군주 된 도리로서, 갚아 주지 않으면 안 될 일이겠지.”
쿠웅-
빙글빙글 돌리던 망치를 멈추고 땅을 내리찍은 놈은, 이내 바닥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부우웅-
공기를 찢어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망치가 머리 위를 스쳤다.
풍압만으로도 머리칼이 마구 흔들릴 정도였다.
쐐액-
이윽고 옆에서 창날이 훅 들어왔다.
꽤 오랜 시간 외부와의 분쟁을 피하고 왕국 안쪽으로 꽁꽁 숨어들어 간 놈들이니만큼 이런 협공에 있어선 무지하리라 생각했건만, 내 착각이었다.
드워프들의 합격은 꽤나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평범한 병사가 아닌, 국왕과 함께하는 정예병들이라 그런 걸까.
섣불리 한꺼번에 덤벼들지 않았다.
하나를 피하더라도 쉽사리 반격에 나설 수 없게끔, 저마다 일정한 텀을 두고서 무기를 휘둘러 왔다.
“아쉽군.”
하지만 그런 전략이 먹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부질없는 것이었다.
텁-
“상대가 나빴어.”
“어, 어어?”
옆에서 내질러 오는 창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손을 뻗어 창대를 낚아챈 나는, 그대로 병사째로 들어 올려 한 바퀴 휘둘렀다.
“무, 무슨! 다들 멈춰… 컥!”
쩌억-
갑자기 뿌리 뽑히듯 땅에서 떨어진 녀석은, 다 같이 나를 포위하고 있던 제 동료 셋과 부딪히고 나서야 창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이런 괴물 같은!”
그 한 번으로 놈들의 합격은 제대로 이어 보지도 못하고 박살이 났다.
동시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니만큼, 그들의 전력에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아! 카, 칼릭소 님!”
나는 녀석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리를 잡기 전에, 시뻘건 검기를 길게 뽑으며 칼릭소의 품을 파고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죽이진 않을 테니.”
“큭, 네놈….”
싸움을 업으로 하는 수인족도 아닌 한낱 드워프들의 왕치고는 꽤나 훌륭한 실력이었다.
용사 시절에는 전장에 직접 나서는 것보단 항상 공성과 수성 병기들의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잘 몰랐지만, 이만하면 친위대들을 모두 이끌고 나섰을 때 사천왕 한둘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발만 묶어 놓을 수 있다면, 누구 하나 골통을 부수는 것쯤은 우스울 괴력이었으니까.
다만 그뿐이었다.
그는 훌륭한 왕이었을지 몰라도, 위대한 전사는 아니었다.
마흐제브, 가제프, 우르누이.
그들은 모두 선택받은 재능을 수십 년간 갈고 닦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벼려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칼릭소가 가진 힘은 아직 날것에 가까운 형태였다.
아무리 단단하고 귀한 광물이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종이 한 장 벨 수 없는 법이었다.
후웅-
서슬 퍼런 날이 녀석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걸로 둘….
“음?”
파박-
단검이 칼릭소의 옆구리를 찢어 버리기 직전.
시퍼런 마력을 담은 화살이 날아와 발밑에 꽂혔다.
그대로 움직였더라면 정수리에 구멍이 났을 테지.
나는 마무리를 방해받아 인상을 팍 찌푸리며,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에리스….”
다시 충차를 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곱씹어 보니 재차 분노가 끓어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녀의 눈은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더욱 선명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서라도, 충차를 저지하는 것보단 칼릭소를 살리는 쪽이 더 이득이 되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허억, 헉….”
간발의 차로 명을 부지한 칼릭소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화살이 날아온 성벽 위를 힐끔 올려다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에리스에게 구명을 받은 것을 빚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있다고는 해도, 본래 엘프와 드워프의 사이를 떠올리면 적잖이 수치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고맙군.”
“별말씀을. 그보다 집중하시지요. 매번 도와드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칼릭소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세우고 있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아무리 서로 한 배를 탄 상황이라지만, 기분에 따라 행동이 어찌 달라질지 모를 노릇이잖은가.
그는 저들만으로는 나를 상대로 버티는 것조차 어려우리라는 걸, 방금 그 일격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듯 보였다.
“친위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충차를 막으러 간다!”
“예, 예? 칼릭소 님, 하지만….”
드워프 왕은 당황한 병사들에게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명하군.
어차피 이곳에 남아 봐야 별 도움이 안 되는 이들이었다.
오히려 괜히 붙잡혀서 방패로나 쓰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럴 바에야 충차를 막으러 붙는 쪽이 낫겠지.
“다들 마음을 굳게 먹도록 해라.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망치를 꾹 쥐었다.
난 제 군주를 따라 비장한 얼굴로 다시금 나를 둘러싸는 친위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제없다. 가서 충차나 돕도록.”
그러는 사이, 발라크를 선두로 한 몇몇 병사들이 이리로 합류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들을 충차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에리스의 화살이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딱히 대처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그들이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며 정비하는 새에, 이쪽 또한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있었다.
“죽여라!”
부웅-
칼릭소는 이전처럼 크게 망치를 휘둘러 왔다.
동시에 자리를 잡은 친위대들도 조금씩 시차를 두고서, 제 무기를 내지르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카앙-
“바보 같은! 그걸 막아서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정면에서 날아드는 망치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단검을 휘둘러 막아낸 나는, 사방에서 쏟아져 오는 공격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창대를 붙잡힌 녀석처럼 허술한 일격은 없었지만, 수가 줄어든 만큼 전에 없던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까짓 거, 적당히 피하면 그만이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빠르구만!”
드워프들의 공격은 내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맥없이 허공을 갈랐다.
애초에 놈들의 연격 따위, 신경 쓸 거리도 못됐다.
눈여겨봐야 될 것은, 칼릭소와 저 성벽 위에서 날아드는 에리스의 화살뿐.
콰악-
슬쩍 성벽 위로 시선을 옮기기 무섭게, 매서운 화살이 고개를 스쳐 지나갔다.
“좋아, 지금이다! 쳐라!”
놈들은 내가 잠깐 멈칫한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재차 무기를 휘둘러 왔다.
서로 사전에 합의를 나눈 것도 아닌데, 참으로 발 빠른 대응이었다.
아쉽게도, 이미 다 늦어 버렸지만 말이다.
“찢어 발겨라.”
우르르릉-
“읏….”
“이, 이 떨림은…?”
내 입에서 호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불길한 진동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륵-
아까 성벽 위로 날아 에리스를 마주했을 때 박힌 화살 덕분에,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알게 모르게 핏물로 질척해져 있었다.
혈마법으로 인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핏물은, 이내 소용돌이치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흐어어억! 바, 바닥이!”
“크윽… 뭔지는 모르지만 끌려들어 가지 않게 조심해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뒤늦게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드워프들은 바닥에 제 무기를 박아 가면서까지 버티려고 애썼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소용돌이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녀석부터 시작해 하나둘씩, 결국 균형을 잃고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안 빠져… 아, 아…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다리, 다리가!”
소용돌이치는 늪에 삼켜진 병사들은 발끝에서부터 조금씩 갈려 나가, 머잖아 비명조차 묻힌 채 핏물과 하나가 되었다.
길어야 5초.
사람 하나가 형체를 잃고 곤죽이 되기까진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뭐, 뭐냐! 네놈, 대체 무슨 짓을… 컥!”
나는 타고난 힘 덕분에 홀로 목숨을 부지한 칼릭소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을 잡아챘다.
중간중간 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가볍게 단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쳐낼 수 있었다.
“이걸로 두 명.”
“커억, 컥….”
녀석이라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수 있게끔 적당히 손을 본 것이었으니까.
“발라크!”
난 다른 병사들과 함께 충차를 지키고 있는 발라크를 부르고선, 천천히 성벽 위로 고개를 들었다.
“큭….”
그곳엔 어두워진 안색으로 이를 갈고 있는 하이엘프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라.
곧 성벽을 부수고 아래로 끌어 내려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