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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93화 (193/200)

제193화

“실망이군.”

나는 성벽 위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가볍게 쳐내며,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단박에 내 목을 꿰뚫었던 날카로운 화살은 이곳에 없었다.

에리스 또한 아델바르가 그랬던 것처럼 충분히 마왕군을 상대해 보지 못해, 용사 시절의 기억보다 무뎌져 있던 걸까.

아니면 당시보다 내가 더 강해져 있던 탓일까.

카각-

화살을 빗겨낸 단검의 날이 찌르르 울렸다.

위력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다만 시위를 당기는 사람이 이전만 못할 뿐이었다.

“에리스, 무얼 망설이는 거냐.”

서서히 다가오는 충차보다 도리어 이쪽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점차 화살이 노골적으로 나를 노렸다.

그렇지만 이건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에리스의 화살은 더욱 빠르고 휘어짐이 다채로웠으며, 그 누구보다 무자비했다.

호감을 품은 척 몇 년을 연기해 가며 부려먹은 장기 말의 목에 망설임 없이 화살촉을 박아 넣을 만큼.

“아니야, 이게 아니야!”

쩌억-

화살촉의 정중앙을 때리며 날아드는 화살을 반으로 갈라 버린 나는, 너무나도 엉망인 재회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고작 이 정도였던가?

애초에 그녀가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실상 네 그랜드 마스터 중에서 가장 강하다 여겨지던 가제프마저, 약간의 여흥을 돋우어 준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하물며 그 이후로 악신을 잡고서 그 잔재를 흡수하고 세계수의 생명력조차 빨아먹은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쪽은 복수를 위해 항상 목숨을 내놓고 다녔는데, 어찌 이리도 실망스럽게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를 상대하려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온건파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 보려는 것뿐.

그마저도 혹 충차가 성벽에 붙을세라, 중간중간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렇겐 안 되지.”

네 상대는 나다.

차마 이쪽에 집중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친히 그렇게 없도록 만들어 주는 수밖에.

카앙-!

나는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박쥐로 흩어져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윽! 네, 네놈… 어느새!”

“에리스.”

여왕은 갑작스레 제 눈앞에 나타난 나를 보고선, 화들짝 놀라 이쪽으로 시위를 틀었다.

“마, 마왕이다! 마왕이 성벽 위로….”

“겁먹지 마라! 어차피 방어막이 둘러져 있으니,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곧바로 우릴 공격하진 못할 거다. 오히려 이건 기회다! 모두 녀석을 노려라!”

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수호자와 병사들까지 전부 이쪽을 바라봤다.

그 수만 해도 어림잡아 이백 명.

그래 봐야 대부분의 공격은 피부 하나 뚫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자진해서 맞아 줄 필요는 없었다.

혹 재수 없이 어디 급소에 화살이라도 틀어박혔다간, 나는 괜찮을지 몰라도 아래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의 사기에까지 영향이 갈 테니까.

“무얼 망설이고 있나. 네가 그리도 찾던 원수가 바로 이 앞에 있거늘.”

하지만 나는 애초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놈들의 말마따나 아무리 나라고 한들 충분한 준비도 없이 성벽을 둘러싼 방어막을 벗겨 내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굳이 급하게 리스크를 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저 에리스에게 전해 줄 말이 있어 잠시 올라왔을 뿐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고민하는 일이 없도록.

오로지 내게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쏴라.”

피잉-

헛된 소리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제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한 얄팍한 계략이라 여긴 걸까.

그녀는 못 들은 척 그저 시위를 놓을 뿐이었다.

텁-

지근거리에서 날아든 화살은 맥없이 내 손아귀에 붙들렸다.

애초에 활이라는 무기가 그랬다.

이렇게 가까이서 쏴서 맞추라고 만든 게 아니었다.

혹 어디 다른 곳에 신경이라도 팔고 있었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나는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고 올라온 거였다.

스리슬쩍 내 미간을 훑는 그 눈동자.

활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

마지막으로 끝내 시위를 놓는 손가락까지.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시점에서 화살을 맞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파바바박-

그렇지만 다른 화살들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쏘아진 화살이 내 몸에 박혔다.

비록 눈 같은 급소는 어찌 피했다지만, 수백 개나 되는 화살을 모두 빗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흐음.”

하지만 예상했듯 대부분은 그대로 튕겨져 나가거나,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나마 두어 개 정도가 살갗을 뚫어 피를 보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었다.

이 정도 고통이야 매일 같이 달고 살았었으니까.

어차피 빼내면 금세 아물 정도의 상처였다.

“말이 너무 부족했나? 그럼 설명을 더하지.”

나는 팔과 허리에 박힌 화살을 빼내어 바닥에 떨어트리며, 어느덧 두 번째 화살을 메긴 에리스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받은 선물들은 어때, 만족스러웠나? 둘 다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보냈는데 말이야.”

“…뭐?”

시위를 당기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동그랗게 커졌다.

“부디 마음에 들었었다면 좋겠군.”

“네놈, 설마!”

쐐애액-

그 사이, 다시 한번 준비를 마친 화살들이 재차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맞아 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박쥐로 몸을 흩트려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충차를 끄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빼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선물이 꽤나 마음에 들었었던 모양이었다.

뭐, 애초에 대충이나마 반응을 봐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죽여 버리겠어! 네놈만큼은… 네놈만큼은 절대로 용서 못 한다! 기필코 내 너를 붙잡아, 산 채로 그 거죽을 벗겨 버리겠다!”

콰앙-! 쾅-!

내가 지나친 자리에 간발의 차로 연신 박혀 든 화살은, 대지를 쩍쩍 가르며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장을 훑던 그녀의 눈은, 이제 악에 받친 채 오로지 나만을 쫓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증오해라, 분노해라.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불태워라.

그래야만 내 복수가 조금이나마 끝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

“에리스 님, 에리스 님! 충차가….”

분노에 사로잡혀 끝까지 나만을 쫓는 에리스를 본 측근이,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충차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리 두터운 성벽이라 한들,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돼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선 여기서 충차를 부숴야만 했다.

“닥쳐라!”

하지만 이미 제 발로 나타난 동생의 원수에 이성을 잃은 그녀에겐, 그까짓 충차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리스는 계속되는 만류에도 끝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쿠웅-

“추, 충차가….”

“안 돼!”

결국 그러는 사이, 기어코 충차가 성벽에 달라붙었다.

“크으으… 에리스! 대체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성벽을 울리는 소음에, 그 너머에서 노성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릭소.

거기 있었나.

“아….”

그 외침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끊임없이 날아오던 화살이 갑자기 뚝 끊겼다.

빌어먹을, 방해하기는.

나는 자신의 실책에 입술을 꾹 깨물며 황급히 충차를 향해 시위를 돌리는 에리스를 보고선, 조용히 혀를 찼다.

뭐, 됐어.

어차피 이제 성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충차가 하나둘씩 달라붙기 시작한 이상, 그녀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어느 한 곳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제기랄! 멍청한 귀쟁이 여왕 같으니. 에리스, 똑똑히 기억해 두시오. 이걸로 엘프들은 내게 큰 빚을 지는 거요.”

부웅-

충차가 쇠 봉을 성벽에 부딪치려는 순간.

무언가 성벽을 훌쩍 넘어 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어? 뭐야 이놈은….”

콰작-

이윽고 충차에 붙은 병사들의 머리가 과일처럼 깨져 나갔다.

“이 바보 같은 놈들! 너희들의 왕이 홀로 적진 한가운데 떨어져 있길 가만히 내버려 둘 셈이냐!”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마족들을 모두 해치운 칼릭소는 성벽 너머로 고함을 치고선, 충차를 향해 제 짤막한 몸뚱이보다 더 커다란 망치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콰아아앙-!

후두둑-

“추, 충차가….”

“마, 막아! 저놈을 막아야 한다!”

거대한 충차가 고작 망치질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그 무식한 괴력만큼은 예전만큼이나 변함이 없군, 칼릭소.

“으하하하하! 비켜라, 비켜 이 잔챙이들아!”

그는 사방에 흩뿌려지는 피를 보며 신이 난 듯 마구잡이로 망치를 휘두르고 다녔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고블린이나 놀 그리고 오크와 같은 잡병들은 물론, 튼튼하기로 소문난 가고일들과 발록들마저 쉬이 그 근처로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왕을 지켜라!”

“칼릭소 님을 위하여!”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성문을 열고 우르르 뛰쳐나온 그의 부하들마저 제 왕을 따라 충차를 부수러 뛰어다녔다.

가만히 두어선 안 되겠군.

이대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간, 정말로 그들이 충차를 모두 부숴 버릴 기세였다.

“발라크.”

“예, 형님.”

나는 에리스의 화살에 쫓기던 나를 보고선 금세 곁으로 달려온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검기를 일으켰다.

“왕은 내가 맡겠다. 나머지를 부탁하마. 모자라면 카렌을 데려다 써도 좋다.”

“맡겨만 주십시오!”

난 우렁찬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칼릭소를 향해 다가갔다.

제 분수도 모르는 난쟁이 녀석이 감히 흥을 깨 버리다니.

오냐, 그리도 먼저 잡히고 싶었다면 어쩔 수 없지.

쐐액-

서슬 퍼런 칼날이, 전투의 열기에 취한 드워프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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