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두 번째 성벽마저 이십 분을 못 버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엘븐하임 외곽을 둘러싼 마지막 세 번째 성벽.
두 번째 성벽을 지키던 인원들이 물러날 때 시간을 벌기 위해 작은 성문 뒤에서 대기 중이던 드워프 왕, 칼릭소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돌아온 병사들을 보며 노성을 터트렸다.
“그, 그것이… 적들에게 합류한 원군의 수가 너무 많은지라….”
“닥쳐라! 쓸모없는 놈들…! 아무리 급조했다고는 하나, 성벽을 둘이나 앞에 두고서도 채 삼십 분을 버티지 못하고 뚫리다니. 저 귀쟁이 놈들이 그걸 보고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이건 부족의 선대들께서 쌓아 올린 명성과 장인으로서의 긍지가 달린 일이란 말이다!”
왕은 부하들을 잔뜩 쏘아붙이며, 가라앉지 않는 화로 연신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아델바르, 아델바르 그놈은 대체 뭘 했단 말이냐!”
칼릭소는 저들의 그랜드 마스터, 아델바르를 떠올리며 휙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재능은 수많은 드워프 장인들 사이에서도 참 특별했다.
마도 공학.
뚝딱뚝딱 쇠를 두드려 모양을 잡은 수십 수백 개의 부품들과, 그를 이리저리 끼워 맞춘 괴상한 장치에 마법진을 새겨 넣은 신비로운 작품들.
기계병이라고 했던가.
아델바르가 그리 명명한 움직이는 기계 장치들은 실로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맨손으로 광산의 벽을 허물고, 이름 있는 장인이 일주일을 꼬박 두드려 만든 방패와 갑옷들마저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는 놈들이었다.
그런 괴물이 수십 마리.
설상 마왕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삼십 분은 족히 버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구나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왕국이 재산의 절반은 털어 넣었다고도 할 수 있는 그 괴물마저 같이 보내지 않았던가.
본디 이 세 번째 성벽에서 꺼내 들려고 했던, 온몸이 오르하르콘으로 둘러싸인 그 무지막지한 골렘까지 말이다.
“아, 아델바르 님께서는 홀로 마왕을 막아내시려다….”
“이… 이 바보 같은 놈이! 내 분명 적당히 버티다 같이 돌아오라고 그리 당부했거늘!”
칼릭소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델바르의 최후를 알리는 병사를 보고선,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래선 안 된다.
그의 기계병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무기였지만, 난잡한 전장 속에서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할 적에 가장 강력함을 보이는 패였다.
맨손으로 갑옷을 찢는 악력,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기계 병사들.
더불어 통짜 오르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은, 적들의 마법으로부터 성벽을 든든하게 보호해 줄 방패막이로의 역할로도 훌륭한 녀석이었다.
헌데 그 모두를 본격적으로 싸움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리 허무하게 잃어버리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마지막 성벽을 끼고서 원군을 기다리겠다는 작전도, 전부 아델바르의 전력까지 감안하고 짰던 게 아니었던가.
“칼릭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에리스.”
칼릭소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다가온 엘프 여왕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능구렁이 같은 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수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왕국을 큰 불화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어온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속은 확실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을 뿐.
지금도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미간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아델바르가 붙잡혔다. 두 번째 성벽도 이미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더군. 곧 놈들이 올 거다.”
끄득-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확실하게 울려 퍼졌다.
새하얀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당장이라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하지만 에리스는 참고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마음 같아선 그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려서라도 죄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소는 그녀의 아랫사람이 아닐뿐더러, 엘븐하임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드워프들의 왕이었으니까.
물론 이번 일은 드워프들에게 잘못이 있는 만큼 따진다면야 따질 수 있겠지만,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말이 연합이지, 실상 주도권은 엘프들보다 도리어 드워프들이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저들 또한 살기 위해서 넘어왔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드워프들이 함께 엘프들의 땅을 지켜주는 모양새였으니까.
“에리스 님! 이대로 그냥 넘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이 망할 난쟁이 놈들, 멋대로 남아서 기껏 밤새 세워 놓은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주제에 뻔뻔하긴!”
“…뭐? 이 귀쟁이 녀석이 감히!”
하지만 에리스를 따라온 엘프들은 아니었다.
특히 젊은 수호자일수록 더더욱.
그들은 자신의 우상이자, 과거의 무능한 여왕을 대신해 그 자리에 앉은 그녀가 받는 모욕을 가만히 넘길 수 없었다.
비록 어디 욕지거리가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실수에도 덤덤히 일을 넘기려 하는 드워프들의 작태는 그들에게 있어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아무리 적들의 원군이 합류했다고 한들, 성벽이 이렇게까지 빨리 뚫린 것부터 문제가 있는 거겠지! 대륙 제일의 장인들은 무슨, 고작 충차질 몇 번에 무너지는 성벽이….”
“그만, 그만! 닥치세요!”
“에, 에리스 님….”
에리스는 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는 수호자를 보며, 말없이 으르렁거렸다.
지금은 그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숙이고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선조들이 애써 가꿔 온 어머니의 숲이, 그들의 목숨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칼릭소. 이 아이는 제가 필히 나중에 벌을 내리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당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실정이니….”
“…애초에 필요에 의해서 뭉치긴 했다지만, 언제 우리 드워프들이 그쪽 엘프들과 이리 터놓고 웃을 만한 사이였다고. 다만 다음부터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뭐, 지금은 그다음이라도 돌아오기를 바라야 할 판이지만 말이야.”
다행인 것은, 절박한 건 그들 또한 매한가지라는 점이었다.
여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만 등을 돌리는 칼릭소를 보고선,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적들이 먼저 들이닥치기 전에.”
“예, 예. 여왕님.”
흉흉한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던 수호자들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빌어먹을….”
호위로 남은 측근들을 제외하곤 홀로 성문 앞에 선 에리스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만 성벽을 올랐다.
앞선 두 성벽과는 달리, 이곳만큼은 딱 한 곳, 성문이 지어져 있었다.
이따금씩 파괴되는 둘과는 달리 항상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녀석이었기에, 앞선 두 쪽에 편히 자재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비록 이제 와선 그게 수성의 유일한 허점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둥- 둥- 둥-
“오, 옵니다! 마족 놈들이….”
“다들 겁먹을 거 없습니다. 매번 급하게 쌓아 올린 두 성벽이랑은 달리, 이곳만큼은 몇 번이고 자재를 보강했으니까. 놈들이 아무리 충차를 부딪치더라도 끄떡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허점이 특별히 모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애초부터 있어야 할 게 멀쩡히 자리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오히려 하나뿐인 성문에 적들의 전력이 집중될 것이니만큼, 어쩌면 그들을 단박에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또한 고루고루 적들이 퍼져 나가는 것보단 병력을 배치하기도 수월할 테고 말이다.
꾸욱-
성문에 올라 등에 멘 활을 꺼내 잡은 에리스는, 저 멀리 달려오는 마족의 군세를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성벽을 쌓기 위해 도시 근처의 숲을 전부 밀어 버렸는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대군이었다.
단순히 숫자 놀음을 하자면 족히 이쪽의 대여섯 배는 될 것 같았다.
끄그극-
질긴 시위가 비명을 지르며 늘어났다.
팽팽하게 걸린 화살이 당장이라도 적들의 가슴을 꿰뚫을 듯 햇볕에 번들번들하게 비쳤다.
이미 그들과 손을 잡기로 한 자들이 숲 안에 들어선 상태였다.
길어야 하루.
곧 중천에 걸릴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이쪽에게도 승산은 있었다.
피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아직 점처럼 보이는 마족의 군세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콱-
곧이어 물결치듯 몰려오던 적군의 행렬 사이로, 작은 구멍이 움푹 들어갔다.
성벽 위에 사람이 올랐는지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이 앞 열을 꿰뚫은 바람에, 선봉에 선 병사들이 몇 고꾸라진 탓이었다.
끄그그극-
여왕은 곧장 망설임 없이 다음 화살을 메었다.
워낙 그 수가 많은지라, 아무렇게나 쏴도 서넛씩 꿰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죽여서는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거의 한나절에 달하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선, 가장 먼저 충차를 이끄는 병사들을 자빠트릴 필요가 있었다.
파앙-!
으직-
적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자꾸만 날아드는 화살에 맞서 방패를 높이 들어 올렸지만, 그녀의 화살 앞에선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게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던, 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던.
모두가 예외 없이 구멍이 나다 못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쩍 갈라졌으니까.
“충차를 지켜라!”
그럼에도 적들은 병사들을 앞에 늘어놓으면서까지 계속해서 충차를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무리해서라도 아예 충차를 부수는 수밖에….
카앙-!
“어, 어떻게!”
계획을 바꿔 아예 충차를 향해 시위를 당긴 에리스는, 지금껏 그 누구도 감히 받아 내지 못했던 자신의 화살을 가볍게 튕겨낸 남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흡혈귀… 에릭 가이오스!”
제국의 수많은 도시를 마왕군의 손아귀에 떨어트리고, 기어코 새로이 혈마왕의 자리에 오른 악명 높은 뱀파이어.
시위를 붙든 손가락에, 전보다 더욱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