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크으… 얕보지 마라! 골렘!”
우웅-
아델바르는 금방 낯빛을 바꾸고선, 쓰러진 골렘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고작 힘에서 한 번 밀렸다고 포기하면 안 되지.
그그그긍-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거인의 팔이 치솟았다.
방금 전과 똑같은 모양새였지만, 소리부터가 달랐다.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공격을 받아내길 포기하고, 곧장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 큰 주먹이 전부 땅에 박힐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무래도 저 거대한 몸뚱이 안에 동력기관이라도 담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무리 아델바르가 드워프 중에서도 손에 꼽는 장인이라 한들 그리 복잡한 물건을 만들어 내진 못했을 테지만, 모자란 건 마법으로 때우면 그만이었다.
조금은 엉성하고 조잡한 수준의 기관일지라도, 골렘의 부족한 위력을 메꿔 주기에는 충분했다.
“히, 히히히히! 왜 갑자기 도망만 다니는 거냐! 어디 한 번 더 전처럼 받아내 보거라!”
나는 금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비웃는 그를 보고선,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몸체 때문에 검기로 쳐낼 수도 없는 터라 까다로운 상대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 이길 상대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오리하르콘이라 한들, 받아 낼 수 있는 마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으니까.
콰앙-!
부서진 파편이 튀어 살갗을 찢었다.
핏물이 상처를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럴수록 아델바르의 미소는 점점 짙어져 갔다.
“흐음.”
지금 내 마력이라면 조금 무리해서 혈마법만으로도 녀석을 박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상처를 입어 가면서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건, 여기서 이놈 하나 잡자고 전력을 쏟아부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 하나 퇴장한다고 전쟁에서 패배할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아직 내 손으로 붙잡아야 할 놈이 두 명이나 더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거 참 난감하게 됐군.”
나는 쉼 없이 몰아치는 주먹을 전부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는 와중에도 전황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델바르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조금 전에 다른 곳으로 물린 병사들이 충차를 이끌고, 두 번째 성벽마저 거의 다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게는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빨리 이 골렘을 처치하고 성벽 위에 있는 놈을 붙잡지 않으면, 그 공적이 다른 녀석들한테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으니까.
“무얼 그리 중얼거리는 거냐!”
그렇게는 안 되지.
난 골렘을 조종해 더욱 거세게 밀어붙여 오는 녀석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매개가 될 피는 이미 바닥에 흥건했다.
남은 건 저 무식하게 돈을 때려 박은 골렘을 무너트리는 것뿐.
콰아아앙-!
집채만 한 주먹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몸을 빼 공격을 피한 나는, 비산하는 파편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조용히 팔을 들어 올렸다.
“으하하핫! 잡았다!”
“음?”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파편과 함께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에 숨어든 골렘이, 어느새 내 뒤를 잡고선 양손을 쭉 뻗었다.
부웅-
“뭐, 뭣? 어떻게….”
나는 급히 허리를 숙여 이쪽을 낚아채려는 손을 피했다.
골렘이 내 뒤쪽으로 돌고 있다는 것쯤이야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애초에 저 커다란 덩치가 아무리 소리를 죽인다 해도, 지면을 통해 전해져 오는 떨림마저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제 딴에는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평범한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는 어지간한 장군급 이상은 다 잡아 낼 수 있었다.
용사 시절의 내가 기억하던, 수년간의 전투 데이터를 통해 수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발전해 온 아델바르와는 달리, 지금의 그는 막연한 지식만으로 처음 전장에 나선 상태였기에 나온 실수였다.
그럼에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른 스피드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내가 더욱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흐흐. 실수했군, 아델바르. 아니,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틈.
나는 조금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함이었는지, 팔과 몸체의 접합부에 나 있는 관절 때문에 벌어진 미세한 틈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별로 무리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어.
이제 막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쯤에 이리도 싱겁게 끝내야 한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나머지는 다른 두 놈을 상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다.
“부서져라.”
좁은 틈이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내 손짓을 따라 흘러들어 간 핏물은, 골렘의 안에 있는 동력 기관을 단숨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푸쉬익- 푸쉭-
크그그긍-
“뭐, 뭐냐! 빌어먹을, 또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동시에 관절부에 난 틈에서 매캐한 연기가 마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제기랄! 움직여라, 골렘! 움직이란 말이다!”
끄극- 끄그긍-
아델바르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무너져 가던 골렘의 눈에서 다시금 이채가 감돌았다.
놀랍군.
나는 눈동자를 크게 뜨며, 다시금 일어서는 골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동력 기관은 그저 위력의 보조를 위함일 뿐이고, 본디 골렘 자체가 빈껍데기만으로도 잘만 움직이고 다니는 녀석들이라지만, 내부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골자들이 전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 정도 몸집에 무게면 진즉에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리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를 비웃듯, 보란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로 아델바르의 바람대로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놈의 기술력이 우수했던 건지.
“히, 히히! 으히히힛! 좋아, 골렘! 아직 더 싸울 수….”
으직-
다만 이변은 딱 거기까지였다.
내부가 완전히 파괴되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확실히 예상외였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법은 없었다.
힘겹게 일으켜 세운 다리는, 두꺼운 발목을 몇 번 세게 치는 것으로 다시 무너졌다.
“아, 아아아아아악!”
아델바르는 움푹 파여선 구겨진 발목을 보며,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내, 내 골렘… 지난 수십 년간 연구해 온 내 비밀병기가!”
이윽고 그는 허망한 듯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제 무능함에 밑천이 드러난 드워프 하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델바르.”
“히, 히이익!”
그 사이, 나는 박쥐로 몸을 흩트려 성벽 위로 올랐다.
이미 그를 제외한 연합의 나머지는, 사방에서 충차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성벽에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괴, 괴물….”
“벌 받을 시간이다.”
콱-
“흐, 흐아아악!”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으로 던지고선, 저 뒤쪽에서 일부만 남아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끄윽, 끅….”
“죽지 않게 잘 데려다 놓도록.”
“예, 예! 혈마왕님!”
높은 성벽에서 떨어진 아델바르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댔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한 편인 드워프인지라 죽지는 않았지만, 개인의 무력으로는 평범한 병사들만 못한 그였다.
그리 자신하던 기계병들도 골렘도 모두 부서졌으니, 더 이상 허튼짓을 하진 못하리라.
“싱겁군.”
난 병사들에게 붙잡혀 전장을 떠나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통짜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은 확실히 까다로웠지만, 정작 그를 다루는 아델바르의 실력은 그렇지 못했다.
조금 더 파괴력을 올리기 위해 넣어놓은 동력 기관과, 부드러운 움직임을 위해 구현해놓 은 관절부.
제 딴에는 필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만든 것이겠지만, 실상은 둘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싸움이 더 길어졌을 터였다.
아직 실제로 전투를 겪으며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했기에 나오는, 이론과 현실 간의 괴리.
그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지금의 아델바르는, 솔직히 그랜드 마스터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물론 상성에 따라 악마족이나 서큐버스, 다른 뱀파이어들 사천왕 같은 경우에는 애 좀 먹었을 테지만.
“물러서지 마라! 충차를 붙여! 성벽만 무너트리면 금방이다!”
“우아아아아!”
콰아아앙-!
머지 않은 곳에서 소란과 폭음이 뒤섞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세 번째 성벽은 꽤나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카쉬들이 부숴 본 성벽은 두 번째까지가 끝이라고 했던가.
이제껏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던 만큼, 앞에 둘보다 더욱 견고한 게 당연하겠지.
그동안 몇 번이고 보강을 해 왔을 테니까.
게다가….
“에리스.”
더 이상 전력을 온존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했는지, 직접 성벽 위로 올라 시위를 당기고 있는 에리스를 바라봤다.
그녀가 한 번 시위를 놓을 때마다, 충차를 지키던 병사들이 서넛씩 꿰여 들어갔다.
이러니 못 뚫고 애를 먹고 있을 만도 하지.
“드디어 다시 보는구나.”
난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지키고 선 성벽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그 얄미운 낯짝을 아래로 내려줘야겠지.
이게 얼마만의 재회인데, 계속 이리 올려다볼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스릉-
골렘을 상대하느라 잠시 집어넣었던 단검을 다시 빼 들었다.
소름 끼치도록 서슬 퍼런 날에 시뻘건 검기가 찐득하게 묻어나왔다.
빌어먹을 연합에게 배신당해, 반쪽짜리 흡혈귀의 몸을 빌려 과거로 떨어진 지도 수년.
드디어 길고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