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89화 (189/200)

제189화

“에릭, 하루 종일 어디 있다 이제 돌아오는 건가!”

세계수를 처리하고 이만 막사로 돌아온 나는, 그 안에 화난 얼굴로 나를 기다리던 카렌을 맞았다.

퀭한 눈, 마른 입술, 푸석한 머리.

지난 3주간 계속된 강행군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건 군을 이끄는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보통은 어제 하루라도 조금이나마 여독을 풀었겠지만, 그녀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하하… 미안하군. 싸우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게 하나 있어서 말이다.”

“흥. 그런 게 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었으면 좋았지 않느냐! 게다가 말도 없이 이런 일까지 본녀에게 떠맡기고 가다니.”

책상 위에 가득히 쌓인 서류가 보였다.

바로 어제, 카르카쉬에게 부탁한 전장의 지도와 정보인 듯했다.

밤새 저걸 정리하고 있었던 건가.

분명 그냥 자료만 넘겨놓으라고 했을 텐데.

텁-

“고생했다. 그리고 미안하군. 다음부턴 꼭 미리 얘기해 주도록 하지.”

나는 고마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돌아오자마자 또 얼마나 바쁘게 일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알았으면 됐다.”

다행히 카렌은 금방 화를 풀고선, 정리를 마친 자료를 책상 가운데 두고 일어섰다.

“가는 건가?”

“으그극… 누구 때문에 한숨도 못 잤으니 말이다. 이미 해는 떠 버렸지만, 쪽잠이라도 자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툴툴거림과 함께 막사 밖으로 나섰다.

확실히.

앞으로 공격 명령이 떨어질 때까진 못해도 두어 시간은 남았을 터였다.

그럼 그동안 이쪽은 정리해 둔 자료나 보면서 계획을 좀 세워 볼까.

스윽-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들어 올렸다.

과연, 필요한 정보들만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잘 간추려져 있었다.

펄럭-

막사 안엔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출정이다!”

“이번에야말로 성벽 뒤에 숨은 겁쟁이들을 박살 내고 전쟁의 끝을 보는 거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

대군이 굳건한 성벽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가능한 한 지반이 푹 꺼져 있는 곳을 찾아 노려라!”

드워프들이 세운 성채는 특이했다.

애초부터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라는 듯, 어느 방향으로도 성문이 난 곳이 없었다.

보통은 여닫을 때의 무게를 생각해 철이 아닌 튼튼한 나무로 짓는 성문을 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자칫하면 저들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것밖에 안 되는 이 성벽은 모든 곳이 바위와 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애를 먹었던 거겠지.

물론 그렇다고 뚫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숲은 생각보다 지반이 고르지 못했고, 똑같은 성벽이라도 그 밑에 다져진 땅의 상태는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거기에 때마침 세계수가 썩어 문드러지며, 지하에 텅 빈 공간이 크게 나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도 그를 세워 올린 땅이 부실하다면, 오히려 튼튼함을 위해 늘어난 무게가 제 발목을 잡게 되는 법이었다.

약한 지반이 언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지 몰랐으니까.

“막아! 투석기로 저지해라!”

콰앙-!

성벽 너머에서 커다란 바위들이 잔뜩 쏟아졌다.

이전에 안켈하임을 지키던 투석기보다 더 대단한 물건인 듯, 아직 선두의 병사들조차 성벽에 닿지 못했음에도 군의 후열을 때릴 정도였다.

텅-

“다들 물러서지 마라.”

난 군의 가장 뒤편에서 혈마법을 이용해 허공에 그물을 치며, 날아드는 바위들을 받아 살포시 바닥에 놓았다.

물론 날아드는 바위의 수가 수인지라 혼자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지만,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반격해라. 저 겁쟁이 놈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어라.”

“예, 카르카쉬 님.”

허공에 마법을 펼쳐 바위를 튕겨낸 용족들이, 성벽 너머를 향해 마법진을 띄워 올렸다.

콰아앙-!

“아아아악!”

긴 준비 없이 곧장 빛을 터트리며 쏘아져 나간 마법들은, 성벽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론 대부분은 성벽을 둘러싼 마법에 가로막혀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지만, 물량 공세에 약해진 방어막을 뚫고 열에 하나만 들어가더라도 충분한 타격이 되었다.

“우리가 왔다, 이 겁쟁이들아!”

쿠우우웅-

“흐억! 뭐, 뭐야. 성벽이….”

허공으로 바위와 마법들이 오가는 사이.

금세 성벽에 붙은 병사들이 충차를 이용해 성벽을 두들겼다.

본래대로라면 고작 몇 번의 충격 가지고는 꿈쩍도 안 했을 벽이, 불안할 정도로 휘청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콰앙-!

쿠르르릉-

“으아아악!”

“서, 성벽이 무너진다!”

“다들 도망쳐! 다음 성벽으로 물러 선다!”

지금껏 애를 먹어 왔던 게 우스울 정도로, 성벽은 빠르게 무너졌다.

“빌어먹을 드워프 놈들, 도대체 성벽을 어떻게 쌓아 올린 거야!”

“으윽… 사, 살려 줘….”

갑작스러운 붕괴에 미처 피하지 못한 엘프들이 성벽 잔해에 깔려 고통에 울부짖었다.

“이 씹어 죽일 놈들. 드디어 겁쟁이처럼 성벽 뒤에 꽁꽁 숨겨 놨던 낯짝을 훤히 보게 되는구나.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잡아 죽여라!”

그간 성벽을 방패로 끔찍이도 그들을 괴롭혔던 연합군을 마주한 카르카쉬의 군세는, 뻥 뚫린 구멍 뒤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놈들을 보며 죽일 듯이 쫓았다.

쌓인 게 제법 많았던 모양이군.

“…믿을 수가 없군. 그 튼튼한 성벽이 고작 충차질 몇 번에 무너져 내리다니.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카쉬가 놀란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벽 자체야 그 또한 지난 석 달간 수십 번은 무너트렸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긴 시간 영창한 마법을 쏟아부어 파괴시킨 것이었다.

끽해야 충차를 몇 번 부딪혔다고 저리 쉽게 부서질 거였다면, 이미 진즉에 숲을 점령하고 안켈하임까지 지원을 왔을 터였다.

“성벽을 무너트린다고 꼭 성벽만을 공략할 필요는 없는 법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안쪽에 미리 세작이라도 심어 놓은 건가?”

세작이라.

아무래도 그는 안쪽에서 미리 성벽에 수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럴 리가. 아무리 나라도 저리 경계가 심한 녀석들을 상대로 고작 하룻밤 새에 세작을 심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다만 땅을 좀 건드렸을 뿐이다.”

“…땅이라고?”

카르카쉬는 이어진 내 대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딱히 이해를 못한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하룻밤 사이에 세작을 심는 거나, 저 커다란 성벽 아래 땅을 무르게 만드는 거나.

오히려 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꼽자면 보통 후자를 고를 터였다.

적들이 눈먼 장님도 아니고, 성벽 근처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그렇다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기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게다가 애초에 땅이라는 게 그리 판다고 해서 쉽게 물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어찌 지반이 약해질 만큼 무르게 파낸다고 해도, 자칫하면 도리어 도중에 무너져 이쪽이 파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계수.

이 숲이 처음 만들어질 적부터 함께했다는 그 거대한 나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전부 없애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누군가 나처럼 뿌리로부터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시도조차 못 할 방법이겠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한가?”

“…아니, 상관없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첫 번째 성벽을 성공적으로 무너트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엘프와 드워프들이 우리의 합류를 보고선 따로 계책을 세워놨을지라도, 이렇게까지 빨리 성벽을 넘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녀석들이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하고 있을 지금, 이 기세를 몰아 더욱 거세게 몰아칠 필요가 있었다.

“슬슬 먼저 나가 보지.”

주로 뒤에서 마법을 외는 카르카쉬와 달리, 이쪽은 적진 한가운데 숨어들어 몰래 날뛰는 편이 더 적성에 맞았다.

지금쯤이면 조금 이르더라도, 병사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적들의 주력이 얼굴을 비출 때였다.

아무리 오래 버티기 위해선 가능한 힘을 비축해 놔야만 한다지만, 그렇다고 밑의 병사들이 전부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전쟁은 머릿수 싸움.

그마저도 대개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의미한 얘기였지만, 저쪽도 어디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래에서 어느 정도 받쳐 주고 있을 때의 얘기지, 병사들이 없으면 도리어 둘러싸이는 쪽은 저들이 될 터였다.

그리고 놈들은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고 애써 외면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콰아아앙-!

“아아아아악!”

후두둑-

“시작됐군.”

전장에 들어선 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마족들의 시체에 성벽 위를 훑었다.

“히, 히히히! 좋아. 드디어 이 자신작들의 성능을 시험해 볼 수 있겠어!”

안쪽의 눈이 좁쌀만 해 보일 만큼 도수 높은 안경.

그렇지 않아도 작은 키를 더 짤막하게 만들어주는 굽은 허리.

입술을 앙다물어도 눈에 띌 만큼 툭 튀어나온 앞니.

온갖 고집스러운 장인들이 가득한 드워프들 중에서도 괴짜로 손꼽히는 미친 공학자.

드워프 왕국의 그랜드 마스터, 아델바르.

“뭐, 뭐야 이 괴상한 고철 놈들은!”

“다들 조심해라!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위험한 녀석들이다.”

“자, 잠깐! 나는 같은 편… 흐아아아악!”

나는 전장으로 내려와 적아를 가리지 않고 근처에 돌아다니는 모든 생명체를 학살하기 시작하는 기계병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우선 한 놈.

뺏기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