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생각보다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군.”
숲으로 들어와 엘븐하임 앞에 도착한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전초기지를 세워 올린 마룡왕의 군세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직 도시를 함락시키진 못했어도 대치는 거의 세 달 가까이 이루어지고 있던 터라, 혹시나 에리스와 두 드워프 놈들 중에 누군가 붙잡히진 않았을까 싶었는데.
상태를 보아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만큼 엘프와 드워프 연합의 방어가 굳건하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것도 곧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테지만 말이다.
“충성! 혈마왕님, 오셨습니까!”
“음. 카르카쉬는 어디 있지?”
“지금 막사에서 쟈칼 님과 함께 회의 중에 있습니다.”
“좋아. 바로 안내하도록. 다들 이 곁에 기지를 세우도록. 이 정도 병력이면 굳이 성벽을 에워쌀 것도 없이, 그냥 일점 돌파를 노려도 될 테니.”
“예!”
금방 기지에 들어선 나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선 카르카쉬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빠르게 성벽을 허물고 그 빌어먹을 세 연놈들을 붙잡기 위해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자칫 머뭇거렸다간 뒤따라올 놈들에게 뺏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똑똑-
“카르카쉬, 나다.”
“…에릭인가. 들어오도록.”
막사 안쪽의 상황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나를 맞이하는 카르카쉬의 눈에서 언짢은 기색이 보였다.
그렇다고 이쪽의 합류를 반기지 않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난 석 달간 그럴싸한 공적 하나 세우지 못한 것이 면목이 없는 거겠지.
라이칸과 게르둠, 벨제붑들이 제국에서 죽어 나가는 동안 홀로 제국 서부를 맡고 있었음에도,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는 셈이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본인도 그쪽에 합류할 걸 그랬어. 괜한 고집을 피웠군.”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다. 게다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건 아니야. 결국 여기서 엘프와 드워프 놈들의 발을 묶는 형태가 됐으니.”
나는 죄책감에 한숨을 푹 쉬는 그의 앞자리를 당겨 앉고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후회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으니까.
“상황은 좀 어떻지? 자세히 좀 듣고 싶군.”
아까 보니 예전에 한 번 선물을 들고 찾아왔을 땐 없었던 성벽이 엘븐하임을 둘러싸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새로 쌓아 올린 성벽이겠지.
일점 돌파를 노린다 하더라도 막무가내로 성벽에 돌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능한 방어가 취약한 곳을 골라 공격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성벽과 주변 지형지물을 그린 지도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병사들의 피해는 그리 많지 않다. 저들도 성벽을 끼고 안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도저히 뚫릴 기미가 보이질 않더군. 저기 보이는 성벽이 전부가 아니다. 안쪽으로 두 개, 세 개는 더 쌓아져 있더군. 게다가 아무리 성벽을 부숴도 다음날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른 걸 보면 밤사이에 다시 지어 놓는 것 같다.”
저런 견고한 성벽이 서너 겹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는 건가.
확실히 공략에 애를 먹을 만도 했다.
헌데 이상하군.
아무리 드워프들이라 하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릴 수는 없을 텐데.
“…그러면 성벽을 부수고 그 자리에 조금씩 기지를 앞으로 당기면 되는 거 아닌가?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도시에 닿을 수 있었을 텐데.”
“당연히 그리도 해 봤지. 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지 바닥이 폭삭 무너져 내리더군. 처음엔 함정인 줄 알았지만, 몇 번을 조심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마치 이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듯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훼방을 놓는 느낌이더군.”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늘어놓는 그를 보고선, 조용히 턱을 쓸어내렸다.
훼방이라.
바닥이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고 했던가?
“…세계수.”
난 짧은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용사 시절, 에리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엘프들의 오래된 전승.
수적으로 한참 열세인 엘프들이 그 탐욕스러운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대체 무슨 수로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무사히 숲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때는 단순히 수인 연합과 드워프들의 왕국까지 삼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제아무리 제국이라 한들 쉽사리 먼저 칼을 빼 들지 못하고 있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아니면 적어도 겉으로는 항상 친절함을 연기하는 엘프들의 처세가 빛을 발했다던가.
하지만 그녀는 분명 제국의 엘프들의 숲을 점령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세계수’.
엘프들이 항상 입에 붙은 말버릇처럼 모시고 사는 그들의 어머니.
엘븐하임의 중앙.
저 하늘 높이 구름 너머까지 기둥을 뻗은 거대하고 신성한 나무.
수만 년 전.
아직 이 대륙에 문명이 똬리를 틀기도 전부터 존재했다는 이 숲과 함께 태어났다고 했던가.
엘븐하임이 오랜 시간 동안 외세로부터 숲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할 커다란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항상 세계수 어머니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계수?”
“도시 가운데 솟은 거대한 나무 말이다. 아무래도 지반이 무너져 내렸던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싶군.”
“그게 무슨… 믿을 수 없군. 고작해야 나무가 어떻게 그런 짓을.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한낱 식물이 적아를 가릴 지능이 있다는 건가?”
카르카쉬는 허황된 소리라며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겠지.
솔직히 내가 말하면서도 긴가민가한 생각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나무가 지면을 무너트린다니.
그것도 저를 중심으로 족히 수 킬로는 떨어진 곳에 있는 지반을 말이다.
“하지만 매번 이쪽만 골라서 지반이 무너지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뭐, 정 궁금하면 한번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나.”
“확인이라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어떻게 하긴, 직접 만나 봐야지. 그 세계수라는 걸 말이야.”
나는 금방 결심을 마치고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성벽을 치는 것도 일러야 내일이었다.
삼 주가 넘게 강행군으로 속도를 내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싸우는 건 무리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 가면서 공격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온건파 놈들이 뒤를 칠지 모르는데, 그렇게 전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할 거 없다. 세계수를 보는 건 이쪽이 알아서 할 테니까. 오랜만에 딸아이 얼굴이나 한 번 보는 게 어떤가? 겸사겸사 남은 얘기는 그쪽에 건네주면 좋겠군.”
스륵-
볼일을 마치고 막사를 나온 나는, 슬슬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고선 바삐 발을 움직였다.
동이 트기 전에 세계수를 만나고 엘븐하임의 사람들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던져주기 위해선, 지금부터 움직여도 시간이 빠듯했다.
“형님,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적들이 재주가 많은 모양이야. 그보다 마침 잘됐군. 삽질에 능한 병사들 좀 추려서 백 명 정도만 데리고 와 주겠나?”
“삽질… 말입니까?”
마침 막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발라크와 마주친 나는, 영문 모를 요구에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향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시 봐도 참 거대하긴 하군,”
발라크가 병사들을 데리러 간 사이, 하늘 높이 뻗은 거대한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나는, 그 웅장한 자태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 세계수와 만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직접 엘븐하임 안으로 들어가 기둥에 닿든가, 하늘 높이 올라가 가지에 닿든가.
그것도 아니면…
“형님, 말씀하신 대로 병사 백 명을 소집해 왔습니다.”
“음, 잘했다.”
땅을 파고 들어가 뿌리에 닿던가.
“다들 잘 모였다. 왜 불렀는지는 손에 든 물건을 보면 알겠지. 지금부터 나를 따라 같이 땅을 파도록 한다.”
나는 한 손에 튼튼한 삽을 쥐고서 전초기지 앞에 모인 병사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가능하면 더 많은 인원이 함께할수록 좋았지만, 혹시라도 적들의 눈에 띄면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물론 설마하니 무식하게 땅을 파서 세계수에 닿으려고 하리라 눈치채진 못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땅을… 어디에 새로 진지라도 구축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거기 조용히 안 하나! 마왕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아니, 괜찮다. 발라크.”
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계속 머뭇거리다 힘들게 입술을 떼는 병사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궁금할 만도 하지.
“고작 진지 같은 걸 세우는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에 함께할 기회를 얻은 거다.”
하지만 굳이 자세한 설명을 풀어놓진 않았다.
세계수라고 해 봐야 그들 입장에선 그저 굉장히 커다란 나무일 뿐.
여기서 그 뿌리를 보기 위해 무작정 땅을 파고 내려간다는 얘기를 꺼내 봐야, 무얼 시작하기도 전에 기운만 빠질 뿐이었다.
“일이 잘만 풀린다면, 내 모두에게 막대한 전공을 내리리라 약속하마. 이제 막 쉬려고 했는데 피곤한 마음은 알겠지만, 다들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군.”
“예, 예! 영광입니다. 혈마왕님!”
이들에게 필요한 건 부와 명예.
그리고 그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공적뿐이었다.
나는 단박에 화색을 띠며 당장이라도 주변의 모든 땅을 갈아엎어 버릴 듯 결의를 다지는 병사들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시작하지.”
푹-
이내 적당한 위치를 찾아 자리를 잡은 나는, 곧장 땅을 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앞을 가로막은 공터.
여기라면 엘프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으리라.
기다려라, 에리스.
지금부터 놀라 자빠질 만한 깜짝 선물을 보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