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가는 건가.”
“그래. 가능한 온건파 놈들이 오기 전에 먼저 정리시켜 놔야지. 괜히 앞뒤로 둘러싸이면 일이 귀찮아질 테니.”
제국 멸망 이틀 후.
충분한 휴식을 마치고 출정 준비를 마친 나는, 서문 앞에 도열한 병사들을 보며 단상 앞에 섰다.
“아쉽구만. 나도 아직 즐기고 싶은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같이 끼면 안 되겠나?”
“…되겠나?”
“으하하! 장난일세, 장난. 그럼 잘 다녀오게. 금방 합류할 테니.”
나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악투스를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부상은 진즉에 회복했는데 남이 싸우러 나가는 걸 보고만 있자니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외적으로 그는 아직 릴리스와 함께 몸져누운 상태였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막사에서 여기까지 나오는 것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로 환자를 연기하는 조건으로 얼굴만 비춘 거였다.
만일 온건파가 그들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군을 물리고 숨어들지도 몰랐다.
저들이 자진해서 범의 아가리에 들어와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살려둬 봐야 언제 또 뒤에서 귀찮게 굴지 모를 놈들을 단번에 정리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걸 한순간의 실수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럼 출발하지.”
“가능하면 우리 몫도 조금만 남겨 두게.”
“그러니까 방금 뭘 들은 거냐? 앞뒤로 둘러싸이기 전에….”
“악투스! 그만하고 들어가지? 후후. 미안해 에릭. 그럼 고생해.”
나는 못내 아쉬웠는지 한 마디를 더 붙이는 악투스를 끌고 가는 릴리스를 보고선, 어색한 미소로 그들을 보냈다.
“형님.”
“지금 가마.”
나는 단상 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옷매무새를 다듬고 계단을 올랐다.
본디 내가 이끌던 군세에 더해, 임시로 악마족의 지휘를 맡은 아이시스와 셀레스트가 이끄는 늑대인간 무리 그리고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우두머리를 잃은 가고일들까지.
악투스와 릴리스를 보좌하기 위해 남은 발록과 서큐버스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내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은 무너졌다. 수인들의 광활한 평야 또한 우리의 손에 떨어졌다. 남은 건 서쪽 숲의 엘프들과 그 아래 겁쟁이처럼 성벽 뒤로 숨은 드워프들 뿐이다.”
서로 자존심이 드센 7대 종족 중 넷.
하물며 그중 하나는 뱀파이어와 척을 진 늑대인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경청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단순히 한 종족 전체를 대표하는 우두머리로서, 마계의 한 축을 손아귀에 쥔 만마의 왕으로서 예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족, 단순히 그런 것보다 더욱 원초적인 것.
서로가 무슨 종인지를 떠나, 하나의 마족으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힘’.
압도적인 강함은 굳이 뽐내지 않아도 절로 상대에게 존중을 이끌어 내는 법이었다.
“중간계 정복이 코앞이다. 그리고 눈부신 전공을 쌓을 마지막 기회기도 하지.”
그밖에 각 군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전부 내가 내세운 중진들이라는 이유도 컸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약자의 목소리는 묻히기 마련이었다.
그마저도 이제 아이시스와 셀레스트가 곧 있을 전투에서 전공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이 쏙 들어갈 터였다.
“부와 명예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마계의 절반.
훗날 카렌이 카르카쉬의 뒤를 잇는다면, 실상 그 전부가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진이다!”
“와아아아!”
둥- 둥-
힘찬 함성과 함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문이 열리고 대군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에리스.
드디어 너를 다시 보겠구나.
용사 시절, 내 머리를 꿰뚫었던 피 묻은 화살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젠 그 모든 걸 되갚아 줄 때였다.
* * *
“…엘프 놈들이 드워프와 손을 잡았다고? 그게 정말인가?”
“응. 확실한 정보.”
안켈하임을 나와 엘프들이 있는 숲으로 출발한 지 대략 삼 주.
강행군에 금방 숲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나는, 셀파스트의 연락을 받고 보고하러 온 아이시스를 보고선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군. 차라리 둘이 싸우다 자멸했다고 하는 편이 더 그럴싸하겠어.”
엘프와 드워프.
그 둘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만큼이나 앙숙이라 할 수 있었다.
용사 시절, 서로 마주칠 때마다 귀쟁이, 난쟁이라 멸시하며 싸움이 날 뻔했던 것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나마 둘 모두 보통은 제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 종족들이라 전쟁이 없었을 뿐.
괜히 연합에서 엘프와 드워프들의 전선을 가능한 멀리 찢어놨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구나. 그 엘프 놈들이 아버지의 군대를 상대로 지금까지 오래 버티고 있을 수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으음….”
나는 카렌의 말에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용족의 군세는 그 수가 적을지언정, 자타공인 마계 최강의 군대라 할 수 있었다.
당장 그들을 이끄는 카르카쉬부터, 그를 섬기는 사천왕들까지.
애초에 강성한 제국이나 수인 연합이라면 모를까, 소수 정예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력으로만 보면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엘프들이 버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숲을 끼고 게릴라전을 통해 소모전을 유도한다면 두 달 남짓일까.
하지만 사이에 드워프들을 끼고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그들의 뛰어난 축조술로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과, 용족의 질긴 가죽마저 가벼이 꿰뚫을 수 있는 수호자들의 궁술이 합쳐진다면 충분히 오래 버텨 볼 만했다.
물론 그마저도 식량이 동나면 땡이겠지만.
“곤란하군.”
드워프인가.
본디 사흘 안에 엘븐하임을 비롯한 근처의 엘프 촌락들을 정리하고선 드워프들이 있는 남쪽으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잘못하면 여기서 한 달을 꼬박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다고 이쪽이 질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언제 마계에서 포탈을 열고 뒤통수를 치러올지 모를 온건파 놈들이었다.
되도록 악투스와 릴리스 선에서 정리되면 좋겠지만, 녀석들이 꼭 안켈하임을 지나오리란 법은 없었다.
혹여나 곧장 엘븐하임으로 향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전장이 커지면 내 눈이 닿지 않는 반경도 넓어지는 법이었으니까.
만에 하나 그 때문에 에리스나 드워프 왕, 그랜드 마스터가 다른 놈들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으득-
상상만 해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역시 조금은 서둘러야겠어.
“행군 속도를 높이라 전해라. 해가 지기 전에 숲으로 들어간다.”
“예, 형님! 속도를 높여라!”
“속도를 높여라!”
세계수가 뿌리를 뻗은 숲이, 금방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제기랄, 또 맛대가리 없는 과일인가. 도대체가… 술은 없는 거냐, 술은!”
“하여간 귀쟁이 놈들은 도통 뭐 하나 제대로 즐길 줄을 모르는구만!”
왕과 족장들의 명령에 따라 엘븐하임에 다다른 드워프들은, 벌써 두 달이 넘게 마셔 보지 못한 술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수레에 가득 담아 싣고 온 술통은, 한 달도 채 안 돼서 동이 났다.
“짜리몽땅한 제 키만큼이나 생각이 짧은 난쟁이 놈들 같으니. 술은 뭐 거저로 만들어지는 줄 아나?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그 귀한 곡식과 과일들을 가지고 무슨 술을 빚겠다는 거야!”
불안이 쌓일 대로 쌓인 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격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미개한 종족들과 부대낀 지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들의 추함과 무식함이 병균처럼 옮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었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찌 참고 넘길 수 있었던 건, 당장 성벽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강대한 적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선 아무리 싫은 상대라도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칼릭소. 그들에게서 추가적인 연락은 없었나요?”
왕좌에 오른 고귀한 품새의 엘프.
에리스는 제 옆에 앉은 드워프 왕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길어야 사흘이라더군. 멀리서 숲이 보인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미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지.”
사흘.
여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 난쟁이들은 참으로 불쾌한 존재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능하진 않았다.
그들이 쌓아 올린 성벽은 이전에 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튼튼했으며, 괘씸하지만 숲의 나무를 잘라다 급히 만든 투석기들조차 훌륭한 성능을 보여 줬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드워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 바깥의 적들에게 하루도 채 버티지 못하고 숲을 내줬을 터였다.
“다들 들으셨겠지요? 사흘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원군이 올 거예요. 제국이나 수인 연합은 아니지만, 어쩌면 적들에게 그보다 더 성가신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요.”
마족.
이제껏 눈치만 보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숲을 찾아온 드워프 왕이 꺼내든 카드는, 다름 아닌 저 가증스러운 마족들이었다.
정확히는 지금 중간계를 침략하고 있는 녀석들과 반대편에 선 마족들.
처음엔 마냥 신뢰할 순 없었지만, 금방 무언가를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당장 눈앞에 닥쳐온 위기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으니까.
또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사흘 말입니까?”
“석 달도 참았는데 사흘 정도야….”
콰앙-!
“여, 여왕님! 밖에… 밖에 새로운 마족들이 왔습니다!”
술렁이던 장내에 바삐 달려온 전령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품위 없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에리스였지만, 이내 금방 표정을 풀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흘이라더니, 벌써 원군이 도착한 모양이군요.”
“오오. 벌써!”
원군 소식에 금방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까진 견고한 성벽을 끼고도 그저 숨죽여 버티는 게 고작이었지만, 도착한 원군과 함께 앞뒤로 적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저… 폐, 폐하. 그것이….”
하지만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소식을 들고 온 전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욱 죽어가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왕의 물음에 전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힘들게 답을 내뱉었다.
“…원군이, 아닙니다. 적의 대군이 텅 빈 촌락을 불태우면서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여왕의 몸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