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다, 다 되셨습니다. 워낙에 회복력이 좋으셔서 겉에 나신 상처들은 하루 이틀만 푹 쉬셔도 금방 아무실 겁니다만, 내상은….”
“으하하! 괜찮다, 괜찮아. 중간계에 약재가 없는 걸 어쩌겠나.”
수십 명의 의원과 약사들에게 둘러싸여 치료를 마친 악투스는, 겉으로 보기엔 꽤 멀쩡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본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뭉개졌던 얼굴은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고, 피가 철철 흐르던 자상은 가슴팍을 길게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를 제외하곤 전부 아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거대한 촉수에 후려쳐진 충격에 터져버린 근육과 장기들이었다.
본래대로라면 그마저도 금방 재생되어야 했을 것이, 무슨 일에선지 아물고 말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 그 악신이 가지고 있던 특수한 능력이라도 되는 거겠지.
“굳이 급하게 굴 필요 없다. 어차피 가장 눈엣가시였던 제국도 점령했으니까.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린다 싶으면 포탈이라도 열면 그만이야.”
악투스는 송구함에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선 이만 물러나라 손을 휘휘 저었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 나머지는 자네와 카르카쉬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구만. 릴리스마저 저 꼴이니 말이야.”
“후후… 이거 참, 면목이 없네.”
이번 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은 건 악투스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악투스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릴리스를 보고선,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싸우다 다친 걸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
릴리스 또한 악투스와 같은 내상으로 고생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녀는 악신에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헌데 내상이라니.
의원이 직접 개복하고 장기가 썩어 문드러진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듣기로는 놈의 피를 뒤집어쓴 게 문제라더군. 녀석의 몸이 닿았던 땅을 밟고 있던 것도 말이야.”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악투스가 거무죽죽하게 죽어 버린 땅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본디 악신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새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시험 삼아 내성에 포로들을 던져 봤더니, 다들 1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더구만. 내장은 물론이고 살갗도 전부 썩어 버려선 악취도 장난이 아니었다는 모양이야.”
“으음… 완전히 죽은 땅이 돼 버렸군.”
“그래. 천만다행인 건 오염된 부분이 주변으로 확산되진 않았다는 거지. 자칫하면 기껏 점령한 땅을 전부 버려야 될 뻔했어.”
피와 땅이라.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멀쩡한 거지?
악신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오염된 땅을 밟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헌데 아프기는커녕,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오른 능력치 덕에 쌩쌩하다 못해 활기가 넘쳤다.
단순히 흡혈 덕분일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부정했다.
흡혈로 인한 회복은 어디까지나 재생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능력치가 오름에 따라 기력이 돌아온 것도 마찬가지.
도리어 그건 회복조차 아닌, 총량이 높아진 만큼 더해진 것에 불과했다.
“…설마.”
씨.
나는 악신이 껍데기를 벗고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 나를 향해 중얼거렸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쩌면 똑같은 힘을 근간으로 두고 있기에, 내게만 통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잠깐 내가 상태를 좀 봐도 되겠나?”
“음?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헌데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건가?”
만일 그런 거라면 혹시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장담은 못 하겠지만, 악신이 다루던 힘이라면 나 또한 써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
텁-
아직 덜 아문 개복 흉터 위로 손을 가져다 댄 나는, 조용히 그 아래 썩어 들어가고 있는 내장의 움직임에 정신을 집중했다.
[고대의 악신, ‘기는 혼돈’의 잔재를 발견했습니다.]
[막대한 생명력의 잔재를 흡수하시겠습니까?]
“역시….”
나는 머잖아 반응을 보이는 메시지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 발견한 거라도 있나?”
“그래. 아무래도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군.”
“그, 그게 정말이냐?”
놀란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악투스를 향해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인 난, 곧바로 메시지를 조작했다.
“크읏….”
꿀럭-
벌어진 상처를 통해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와 손끝에 달라붙었다.
악신의 잔재는 곧 자연스레 피부를 통해 흡수되어, 전신으로 쭉 퍼져 나갔다.
“크, 하악!”
“에, 에릭! 괜찮나?”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만큼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내달렸다.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머리, 발끝까지.
누군가 뜨겁게 달군 철로 속에서 천천히 지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명력의 잔재를 흡수합니다.]
[*주의* 흡수한 생명력이 너무 많습니다! 과한 생명력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젠장!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어떻게 해야….”
“크흐, 으으윽….”
[고대의 악신, ‘기는 혼돈’의 잔재를 무사히 흡수했습니다.]
[힘이 ‘5’ 증가합니다.]
[민첩이 ‘5’ 증가합니다.]
[체력이 ‘5’ 증가합니다.]
[마력이 ‘5’ 증가합니다.]
다행히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시간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자니 금세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의원! 어서 의원을….”
“…아니, 이제 괜찮아졌다. 두 번은 못 해 먹겠군.”
스윽-
벌벌 떨리는 손으로 뜨뜻한 코밑을 훔쳤다.
고통이 심했던 탓인지, 찐득한 코피가 묻어나왔다.
“그보다 몸은 좀 어떻지. 이제 괜찮나?”
“몸 말인가? 그거야… 어, 어?”
혹시나 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악투스는, 말끔하게 씻겨나간 고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신기하군. 확실히 나아졌어. 아니, 나아지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군. 이게 도대체….”
그의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악신의 생명력을 끄집어낸 덕인지, 슬슬 재생력이 제대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몸이 다 나을 때까진 계속 쉬는 게 낫겠어. 어차피 병사들도 다들 휴식이 필요해 보이니 말이야.”
악투스의 그 경이로운 회복력이라면 길어야 이틀 정도면 다시 멀쩡해질 터였다.
다만 죽은 마왕들을 기리고 그들의 빈자리까지 채워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하루쯤은 더 머물러야겠지.
“끄응… 그래야겠지. 이거야 원, 방금까진 별 방법이 없으니 이 이상 전선에 나서는 건 체념하고 있었건만, 막상 이렇게 되니 욕심이 나는군. 카르카쉬 그놈이 먼저 다 정리해 놓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만.”
“그래.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엘프와 드워프.
더는 황제처럼 남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만일 시간이 없다면 소수 정예로만 군을 나누어서라도….
“…그보다 에릭, 괜찮으면 나도 어떻게 안 될까?”
“아.”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서문 너머를 바라보던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나를 부르는 릴리스를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염된 녀석이 하나 더 있었군.
[고대의 악신, ‘기는 혼돈’의 잔재를 발견했습니다.]
[막대한 생명력의 잔재를 흡수하시겠습니까?]
나는 곧 다가올 고통에 입술을 꾹 깨물며, 천천히 그녀의 상처 위로 손을 올렸다.
* * *
“끄으… 제기랄, 이제 더는 정말로 못 해 먹겠군.”
저릿저릿한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차피 살리기로 했으니 군말 없이 고통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후 떨어지는 보상이 영 시원찮았다.
악신과 가까이 붙어 핏물을 흠뻑 적시다 못해 아주 절여졌던 악투스와 달리 대부분을 날아다닌 데에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릴리스에게서 잔재를 흡수하고 얻은 거라곤 고작해야 네 능력치가 하나씩 오른 게 전부였다.
물론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한 수확이었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똑똑-
“형님, 형님!”
“발라크냐? 들어오도록.”
휴식도 잠시.
나는 북쪽을 살피고 돌아온 발라크를 보고선,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큰일, 큰일 났습니다!”
“…큰일?”
그는 꽤 다급한 얼굴로 슬쩍 바깥을 훑었다.
저 침착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다니.
난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에릭.”
“셀파스트?”
곧이어 셀파스트가 열린 천막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또한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날 맞지 않고, 꽤나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반란이다. 마계에서 온건파 놈들이 들고일어난 모양이야.”
반란이라니.
난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셀파스트를 쳐다봤다.
중간계의 정복이 끝물인데, 이제 와서 뒤를 치겠다고?
“체르페슈, 라이칸, 게르둠에 이어 벨제붑과 새로 가고일들을 이끌던 게르베스까지 죽었다. 거기에 그 악투스가 중상. 릴리스는 지난 전투 때 팔 한쪽이 날아간 걸로도 모자라서, 마찬가지로 앓아누운 상태지. 녀석들에겐 아마 두 번 다신 안 올 절호의 기회일 거야.”
확실히.
이대로 중간계의 정복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간, 어떻게든 침략을 막으려고 했던 온건파들 입장에선 더 이상 설 자리가 위태로워질 터였다.
마침 그 강대했던 마왕들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인 악투스가 앓아누웠으니, 더 늦기 전에 승부를 보려는 속셈인 거겠지.
“하, 하하! 흐하하하하!”
바보 같은 놈들.
생각을 마친 나는, 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광소를 터트렸다.
“뭐, 뭐야. 왜 그래? 설마 미쳐 버린 건 아니지?”
나는 상정 외의 반응에 놀라 흠칫 몸을 떠는 셀파스트를 보며, 삐져나온 눈물을 훔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흐… 셀파스트. 그 정보, 언제 들은 거지?”
“그, 그건… 일단 듣자마자 여기 덩치를 만나서 바로 달려오긴 했는데….”
역시 그렇군.
놈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악투스와 릴리스가 금방 몸을 회복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어, 어디 가십니까. 형님?”
“앓아누운 녀석들 얼굴 좀 보러 갈 생각이다. 그들도 알고는 있어야 할 테니 말이야.”
두 사람한테 어차피 휴식을 취해야 하니 그냥 들어가서 푹 쉬고 있으라 하길 잘했군.
나는 곧바로 먼저 악투스가 쉬고 있을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 정리해야 될 놈들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나서 줄 줄이야.
이거 참, 수고를 덜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