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업적!]
[자신보다 압도적인 격을 가진 적을 상대로 불가능을 넘어선 위업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힘이 ‘15’ 증가합니다.]
[민첩이 ‘15’ 증가합니다.]
[체력이 ‘15’ 증가합니다.]
[마력이 ‘15’ 증가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악신의 죽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단순히 놈을 처치한 것만으로도 마왕 셋의 시체를 모두 흡혈한 만큼이나 뛰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능력치가 더 높은 걸 감안하자면, 휘하의 사천왕 아홉을 모두 더한 것보다 높을지도 몰랐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레벨이 증가합니다.]
[레벨이….]
그 이후로도 메시지는 시야의 반절을 덮을 만큼이나 계속 튀어나왔다.
척 보기에도 레벨이 열 이상은 껑충 오른 것 같았다.
백 남짓이나 늘어난 능력치 덕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한계까지 짜내어진 육체에 금방 활력이 돌았다.
“하아… 읏, 벨제붑마저….”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릴리스를 보고선 그녀에게 다가갔다.
“살아있군.”
조금이지만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잖아 숨이 끊어질 만큼 위태로웠다.
“음….”
살려야 하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발라크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보통은 제 종족을 이끄는 마왕의 아래에 복속하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릴리스가 죽도록 내버려 둔다고 한들, 그녀 휘하의 서큐버스들을 병합시킬 수는 없었다.
괜히 다른 놈이 그 자리를 잇도록 둘 바에야, 차라리 외팔이인 그녀가 살아남아 계속 군을 이끌게 두는 편이 나았다.
지금도 사이가 좋았으면 좋았지, 벨제붑처럼 틀어진 건 아니었으니까.
훗날을 염두에 두더라도, 내게 빚을 진 릴리아나에게 호의를 가진 그녀를 살려 두는 편이 이득이었다.
“으으….”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가능하면 이대로 업고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편이 최선이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볼일이 남아 있었다.
곧 죽어도 마왕이니 적당히 응급처치만 해놓는다면 죽지는 않으리라.
찌익-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길게 찢은 나는, 파편에 찢겨져 나갔는지 길게 난 자상에 천을 대었다.
격렬한 싸움에 피로 흥건하게 젖은 데에다가 흙먼지로 더러워진 터라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당장은 지혈이 우선이었다.
꾸욱-
“…이만하면 됐겠지.”
나는 붕대 대용으로 감은 옷을 단단하게 매듭 묶고서, 볼일을 보는 동안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바닥에 잘 눕혀놓고선 난장판이 된 시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콱-
[악마왕, ‘벨제붑’을 흡혈했습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마력이 ‘3’ 증가합니다.]
다행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흡혈의 효과가 반감되는 일은 없었다.
헌데 고작해야 마력이 조금 오르는 게 전부라니.
그만큼 다른 능력치들에 비해 마력이 월등하게 높은 녀석과 비교해 봐도, 이젠 그 마력조차 얼마 차이나지 않을 정도로 내가 강해졌다는 얘기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삭-
바짝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가루 내어 부스러트린 나는, 새하얗게 뼈만 남은 악신의 잔해를 보고선 밀려들어 오는 실망감에 혀를 찼다.
용암에 빠져 몸뚱이가 전부 녹아버린 터라, 흡혈할 만한 부분이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 바닥에 남은 거라도 없나.”
그렇다고 그 귀한 능력치 덩어리를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게르베스의 시체도 흡혈해 버릴 겸,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따라 돌아가며 바닥에 질펀한 핏물을 모았다.
“음.”
금방 산산조각 난 게르베스의 시체를 찾아 볼일을 마친 나는, 손등으로 피 묻은 입가를 닦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죽으면 돌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가고일들의 특성 때문에 직접 이를 박아 흡혈할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 흥건히 쏟아진 핏물만 해도 아주 약간이나마 능력치를 올릴 수 있었다.
본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천왕으로 있다가 게르둠의 죽음으로 그 빈자리를 채운 놈치고는, 체력이 하나 올라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고대의 악신, ‘기는 혼돈’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자신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격을 가진 존재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대상의 모든 피를 마시지 않아, 흡혈의 효과가 대폭 감소합니다.]
[힘이 ‘10’ 증가합니다.]
[민첩이 ‘11’ 증가합니다.]
[체력이 ‘9’ 증가합니다.]
[마력이 ‘13’ 증가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바로 이거였다.
난 그 악신을 죽였을 때만큼이나 막대한 보상에 침을 꼴깍 삼켰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100]
[힘 : 275][민첩 : 290][체력 : 285][마력 : 285]
레벨이 100.
능력치의 총합은 1000을 우습게 넘어서고 있었다.
저주로 인해 수명을 모두 끌어다 썼던 용사 시절의 나조차 감히 디뎌보지 못한 경지였다.
이 정도면 악투스… 아니, 어쩌면 카르카쉬와 정면으로 맞붙더라도 충분히 승리를 점쳐 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빌어먹을.”
뿌듯한 얼굴로 이만 미뤄뒀던 악투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발을 뗀 나는, 달달하다 못해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보상 뒤로 밀려드는 분함에 이를 갈았다.
황제.
그 빌어먹을 놈은 죽더라도 꼭 내 손으로 찢어발겼어야만 하는 건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부질없는 짓이었다.
비록 이리도 허망하게 한 놈을 놓쳐 버리고야 말았지만, 아직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녀석들이 셋이나 남아 있었다.
그밖에도 악신과의 전투가 있기 전에 붙잡은 가제프까지.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가 황제 놈의 몫까지 부담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악투스. 살아 있나?”
푸스슥-
“그으… 에, 에릭인가?”
성벽을 부수고 날아간 흔적 끝에 처참히 무너져 있는 건물 잔해를 들어 올린 나는, 그 아래 처참하게 박살 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고깃덩이를 보고선 혀를 내둘렀다.
이런 모습으로라도 어찌 숨은 붙어 있는 건가.
뱀파이어도 늑대인간도 이 정도 재생력은 보여 주기 힘들 텐데.
그나마도 어느 정도 회복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처음엔 이보다 더욱 끔찍한 형태였을 테지.
“다른 놈들이 보면 기겁하겠어. 이쪽이 악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군.”
“흐, 흐흐. 내가 몸뚱이 하난 기가 막히게 튼튼한 편이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상태가 겉보기엔 이래도 속은 꽤나 멀쩡한 모양이군.
“혼자 설 수 있겠나?”
“아니면 애들이 있는 곳까지 업어다 주기라도 할 건가?”
“…금방 데리고 오지. 그냥 누워 있도록.”
나는 실없는 소리나 내뱉는 악투스를 그 자리에 두고선, 기절한 릴리스를 업고 도시 밖으로 향했다.
물론 도중에 부스러진 시체까지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혀, 형님!”
“에릭!”
마왕군은 서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악신과의 싸움에 휘말려 개죽음을 당한 이들은 없는 듯했지만, 척 보기에도 남아 있는 이들의 수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물론 모든 이들이 서문을 통해 도망치진 않았을 테니 실질적으로 생존자는 이보다 더 많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처음 끌고 온 군의 반이나 될까 싶었다.
생각보다 연합의 저항이 격렬했나 보군.
아니면 악신 때문에 마왕들이 제대로 날뛰어보지도 못하고 발이 묶인 터라 그랬던 걸지도 몰랐다.
“리, 릴리스 님!”
“어서 데려가 치료해라.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 안쪽에 환자가 있으니 따라오도록.”
업고 온 릴리스를 살포시 바닥에 눕힌 나는, 얼른 그녀를 데리고 커다란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약사와 의원들을 보고선, 잠시 제자리에 서서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발라크, 카렌….”
와락-
“에릭,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옆에서 얘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발라크와 카렌을 향해 아이시스와 나머지들의 행방을 물으려던 찰나.
나는 걱정했다는 듯 눈물 섞인 얼굴로 안아 오는 카렌을 보고선,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천만다행이지.”
“읏….”
탁-
조용히 손을 내려 이제 괜찮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려 했지만, 카렌은 갑작스레 나를 밀치고선 살짝 붉어진 얼굴로 등을 돌렸다.
“의, 의원들이 왔다! 빨리 도시로 가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나는 금세 견적을 냈는지 막사에서 나오는 이들을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발라크. 나머지는 어디 갔는지 아나?”
“아무래도 북문으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북문이라.
역시 도망칠 때 여럿으로 갈라진 모양이군.
“찾아서 같이 도시로 오도록.”
“예, 형님!”
저벅-
“의원들 모두 집합했습니다. 혈마왕님!”
씩씩한 대답과 함께 곧장 북쪽으로 향하는 발라크의 뒷모습을 믿음직스럽게 지켜보던 나는, 곧 내 앞에 정렬한 인원들을 보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바로 출발하지.”
딱히 서두를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죽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악투스가 어찌 숨은 붙어 있는 데다가 부상도 천천히 회복되고는 있더라도, 중상인 건 변함없었으니까.
“아! 잠깐 기다려라, 에릭. 본녀도 같이….”
“아니. 카렌 너는 혹시 모르니 남쪽으로 대피한 이들이 있나 살펴보고 오도록.”
어차피 도시로는 악투스를 치료하러 갈 뿐이었다.
굳이 다들 따라오는 것보단 필요한 인원만 챙기고, 나머지는 어디로 흩어졌을지 모를 인원들을 찾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뒷정리를 마치고선,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응, 알겠다.”
“부탁하지.”
나는 어딘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는 카렌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만 도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