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흡!”
부웅-
나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 허리를 젖히며,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는 촉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쯔즈즈즉-
-#$%&!
질긴 빨판이 마치 종이처럼 쉽사리 찢어지며, 먹물 같은 피가 콸콸 흘러내렸다.
확실히 공격은 통했다.
앞서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공격은 차곡차곡 피해를 쌓아가고 있었다.
“허억, 후욱….”
하지만 그보다 빨리 이쪽의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도 저 무식하게 큰 덩치 때문에 피하기가 쉽지 않은 공격들이었지만, 조금 전 게르베스의 죽음으로 인해 힘이 더 바짝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 냈을 법한 공격도, 이젠 몸이 제멋대로 크게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두려움.
처음부터 각오가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눈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가만히 있고 싶어도 이빨이 절로 딱딱 부딪혔다.
콰아아앙-!
“큭….”
거대한 촉수가 바닥을 찍으며,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날카롭게 깨진 조각이 스치며 살갗을 주욱 찢었다.
방울진 핏방울이 상처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에릭, 피해라!”
쐐액-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악투스의 호통과 함께 보라색 촉수가 흘깃 보였다.
“이런 망할!”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촉수는 내 몸뚱이를 거의 가릴 정도로 커다랬다.
더구나 설령 어찌 피한다 한들 녀석이 눈치 채고 경로를 휘면 끝이었다.
여태껏 촉수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면 생각처럼 그리 자유로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끄트머리를 살짝 휘는 것 정도는 가능해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만 하더라도 나를 옭아매기에는 충분했다.
카가가각-
나는 몸을 던지는 대신 뽑아 든 단검을 교차해 막아서는 쪽을 택했다.
촉수와 부딪힌 단검에서 시뻘건 불똥이 튀며, 잔뜩 힘이 들어간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카앙-!
젖 먹던 힘을 짜내 간신히 촉수를 빗겨 올린 나는, 그 사이 옆에서 날 후려치기 위해 휘둘러져 오는 팔을 보고선 황급히 박쥐로 몸을 흩트렸다.
부웅-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팔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긁고 지나갔다.
바닥에 깔려 있던 잔해들이 마치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듯 멀끔히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게르베스의 뒤를 따를 뻔했군.
“허억, 헉….”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콱 막힌 숨을 몰아쉬며 촉수를 막아선 단검을 내려다봤다.
그 동안 마른 헝겊으로 피만 닦아줘도 예리함을 잃지 않던 아다만티움 단검이, 그 한 방에 완전히 이가 나가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촉수를 빗겨내기 위해 아주 잠시 날을 기울였는데도 이 정도였다.
그나마도 이놈을 앞에 세워서 망정이지, 자칫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단검을 앞에 두었다면 아예 부서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흐으….”
짧은 휴식을 마친 나는, 번갈아 가며 조금씩 악신을 갉아먹고 있는 세 마왕을 살폈다.
애초에 주로 뒤에서 마법을 날리며 화력을 지원하던 벨제붑은 그나마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한 번 녀석에게 붙잡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뻔했던 악투스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피란체에서 시커멓게 물든 이방인들에게 한쪽 팔이 날아간 릴리스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 악투스처럼 어디 다친 곳은 없던 터라 나름대로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척 보기에도 날갯짓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저대로 두었다간 아마 머잖아 붙잡히고 말 테지.
스륵-
가만히 있어도 양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까 무리하게 공격을 막아내느라 힘줄이 끊어지기라도 했는지, 솔직히 단검을 쥐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이대로는 아무리 잘 휘둘러봐야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을 터였다.
찌익- 찍-
소매를 찢어 단검을 쥔 채 주먹을 꽉 묶었다.
혹 한 번이라도 스친다면 무기를 놓치는 게 아니라 손목이 뜯어져 날아가겠지만,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무기를 잃는다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제대로 휘두르는 편이 나았다.
타닥-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금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능하다면 또다시 혈마법으로 녀석을 갈아버리는 쪽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두 단검에 검기를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읏, 이런….”
“빠져라.”
후욱-
난 내가 잠시 동안 빠져있던 사이, 전보다 더 많은 촉수를 상대해야 했던 릴리스가 기어코 붙잡혀버리려던 것을 잡아 뒤로 보냈다.
“가서 벨제붑을 도와라. 그동안 어찌 시간을 끌어볼 테니.”
“…알았어. 그리고 구해 줘서 고마워.”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서 승기를 쥐려면 저 커다란 덩치를 단번에 눕힐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화력이 필요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맡아도 충분한 역할이었지만, 지금 쥐꼬리만큼 남은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부우웅-
나는 릴리스를 뒤로 물리기 무섭게 사방에서 덮쳐드는 촉수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거의 내 몸뚱이만 한 촉수가 네 개.
저것들을 다 피하는 걸로도 모자라 벨제붑에게 갈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해선, 전처럼 크게 여유를 두고 피해서는 안 됐다.
스치듯이.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쳐야 했다.
촤악-!
서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덤벼드는 공격을 가까스로 모두 피해낸 나는, 마지막 네 번째 촉수가 지나가기 무섭게 다시 돌아오는 첫 번째 촉수를 향해 단검을 가져다 댔다.
마치 두부를 자르듯 끝까지 박힌 날이, 그대로 녀석이 움직인 만큼 부드러운 살을 주욱 베어냈다.
-%@#[email protected]@!
콰르르륵-
단검인 만큼 깊진 않았지만, 길게 베인 상처에서 시커먼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동안 쌓인 상처들도 있어서인지, 악신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촉수를 내리쳤다.
콰앙-! 쾅-!
“큽….”
덕분에 산산조각 난 바닥이 사방으로 파편을 튀겼다.
개중 일부가 살갗을 찢고 지나간 걸로도 모자라 몇몇은 몸뚱이에 박히기까지 했지만,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분노한 녀석이 나를 향해 팔까지 휘두르기 시작했으니까.
콰가가각-
“크흐… 아직 멀었나, 벨제붑!”
“…금방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래도 벨제붑에게 갈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는 건 성공이었다.
본디 악신의 두 팔까지 상대하고 있던 악투스가 숨이 좀 트이며, 촉수 둘 만큼을 더 제 몫으로 잡아두기 시작했으니까.
“될 수 있는 한 서두르라고! 흐읍!”
하지만 오래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물론이고, 악투스는 당장이라도 촉수에 얻어맞을 듯 아슬아슬했으니까.
허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먼저 나가떨어지느냐, 아니면 벨제붑이 먼저 마법을 완성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부웅-
“에릭, 조심해라!”
“뭣….”
홀로 촉수 둘에 더해 그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양팔까지 피하며 차곡차곡 녀석의 몸에 상처를 쌓아가길 몇 분.
난 기어코 바닥을 보이는 체력에 그만, 악투스를 노리다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오는 촉수를 놓치고 말았다.
“읏, 큭!”
핏-
다행히 악투스가 늦지 않게 경고해준 덕에 어찌 몸을 틀어 피할 순 있었지만, 촉수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크흣….”
살짝 스친 것뿐임에도 어깨의 살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며,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힘이 다 빠졌는데, 이런 상처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지금 비틀거리고 있을 때가….”
“악투스, 앞을 봐라!”
핏물이 쏟아지는 상처를 꾹 누르며 휘청거리던 나는, 잠시 이쪽을 신경 쓰느라 뒤에서 날아드는 촉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악투스를 보고선 크게 소리쳤다.
“…이런 젠장.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구만.”
내 외침에 황급히 뒤를 돌아본 그였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촉수를 마주한 악투스는 이를 악물며,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크헉!”
“악투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악투스의 몸이 저 멀리 성벽을 뚫고 날아가 도시 바닥에 처박혔다.
“빌어먹을….”
단단한 그의 육체도 악신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서 버텨내진 못했다.
게르베스처럼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었지만, 무너진 잔해 속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죽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은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가장 거슬렸던 적을 처리한 악신이 기괴한 음성을 흘리며 포효했다.
여기까진가.
악투스가 무너진 이상, 나 혼자서 녀석의 촉수를 모두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에릭, 거기서 빨리 나와!”
패닉에 빠진 순간.
나는 귓가에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잡아, 어서!”
어느새 내 뒤로 바짝 다가온 릴리스가 손을 뻗었다.
황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은 나는, 그대로 공중에 들려 내성 밖으로 향했다.
-$#@%@##!
뒤쪽에서 다 잡은 먹이를 놓친 악신의 괴성과 함께, 군데군데 시커먼 피로 젖은 촉수들이 뒤를 바짝 따라왔다.
“릴리스, 좀 더 빨리 날 수는 없는 거냐?”
“…이게 지금 최선이야.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이쪽도 꽤 지쳤다고.”
높이 솟은 내성이 머지않았건만.
이대로 가다간 그 전에 붙잡힐 모양새였다.
촤악-
물론 가만히 그 꼴을 바라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 다가온 녀석들부터 하나둘씩 단검으로 베어내며 시간을 벌었다.
격한 움직임에 한 팔로밖에 나를 지탱할 수 없는 릴리스의 팔이 당장이라도 놓아버릴 듯 부들부들 떨렸지만, 덕분에 내성을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번쩍-
그렇게 내성을 막 벗어난 찰나.
성벽 너머로 들려오는 괴성과 함께, 성문 앞에서 가만히 주문을 외우던 벨제붑으로부터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마그마 블레이즈.”
일순간 도시가 새하얀 빛에 완전히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