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81화 (181/200)

제181화

눈부신 빛이 점차 수그러든 자리엔, 마치 늪처럼 질퍽이는 핏물로 변한 바닥이 보였다.

-끼야아아악!

이윽고 그 아래에서 마치 귀곡성처럼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지며, 피로 이루어진 손들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크읏… 뭐, 뭐냐! 이 징그러운…. 웁, 으읍!”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빠르게 내성 밖으로 피한 마왕들과 달리 핏물에 발이 묶인 여신은, 사방에서 덮쳐오는 손에 둘러싸여 늪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소름 끼치는 마법이로군.”

“흐응…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저대로 질식해 죽는 건가?”

툭-

나는 금방 지면에서 사라져 버린 여신을 보며 수군대는 마왕들을 보고선, 후들거리는 다리에 무릎을 꿇었다.

“에릭, 괜찮나?”

“후욱, 흐… 마력을 너무 많이 썼어. 조금만 쉬면 움직일 정도는 될 거다.”

“으하하! 그거 다행이군.”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킨 나는, 이쪽으로 손을 내밀어 오는 악투스를 잡고선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쓰러져 쉬고 싶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서 군을 재정비하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안켈하임의 보수도 생각해야 했다.

빠르게 제국 놈들을 압박하기 위해 그냥 지나쳐 왔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제국이 멸망해 버린 지금은 굳이 그리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 우선 여신의 시체부터 찾아야겠지.

가능하면 흡혈할 수 있는 상태면 좋겠군.

너무 갈가리 찢겨져 있으면 효과가…

“…응?”

슬슬 마법이 풀리며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 바닥 위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우뚝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여신이 죽었더라면 지금쯤 눈앞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상태창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물론 녀석이 죽지 않고 빈사 상태로 남아 있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가 늪 아래로 끌려 들어간 곳이 수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보통이라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수면 위로 작은 물살이라도 일어야 정상이었다.

“이거… 자네도 눈치챈 모양이구만.”

나는 옆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악투스를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얼핏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어딘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발록인 그의 입장에서 그럴만한 일이라면…

부그르르-

“뭐, 뭐야!”

“수면이….”

빌어먹을.

난 늪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들을 보고선 단검을 꾹 쥐었다.

혹시나 하면서도 부디 아니었으면 했는데.

콰아앙-!

촤악-

“큿….”

이윽고 수면에서 폭발이 일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하찮은 피조물들 주제에 감히, 감히 내 육신에 상처를 입히다니!”

눈가에 묻은 피를 닦고선 고개를 쳐든 나는, 온몸이 피에 절여진 채 수면 위로 올라온 여신을 보고선 이를 악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시뻘겋기만 한 터라 놈이 과연 무사한 건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꽤나 멀쩡한 모양새였다.

“괴물 같은 놈….”

남아있던 마력을 전부 짜낸 회심의 일격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다니.

나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살기 위해선, 그리고 복수를 위해선 결국 싸워야만 했다.

스릉-

마법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집어넣었던 단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저 빌어먹을 여신에게 쌓인 분노는 고작 여기서 낙담하고 물러설 정도가 아니었다.

놈이 멋대로 잡아 죽인 황제의 몫까지 전부 뱉어내기 전까진,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애당초 저쪽도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고 말이다.

“고작 하계에서 진신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거늘. 이젠 다 필요 없다. 내 신도들도, 내 땅도.”

으득- 꾸드득-

여신의 몸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뼈와 뼈가 맞물리는 소리.

근육이 찢어지고 다시 맞춰지는 소리.

꾸물거리는 내장이 살갗을 밀어내며 요란스럽게도 자리를 옮겨갔다.

“모두 여기서 어읍, 새… ㅈㅜㅁㅏ….”

꾸르륵-

점점 목소리가 잠기더니, 가느다란 목이 불룩하게 부풀었다.

동시에 멀리서 봐도 선명하게 돋아난 핏줄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끔찍하군.”

“저런 걸 신으로 모시고 숭배하다니. 인간 놈들 취향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나를 비롯한 마왕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이것이 여신의 탈을 뒤집어쓴 악신의 정체란 말인가.

촤악-!

나는 이내 살가죽을 뚫고서 여신의 모습을 한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악신을 보며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꾸물거리는 여덟 개의 촉수.

짐승 내장을 여럿 엮어놓은 듯 기이하게 생긴 몸통.

그 위로 더듬이처럼 길쭉하게 솟아오른 머리.

여신… 아니, 그것은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당장이라도 우릴 씹어 먹을 듯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릭, 움직일 수 있겠나?”

“…움직이는 것 정도야 문제없다만,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난 머리가 성벽을 넘어설 만큼 거대한 녀석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놈은 어찌 그 가냘픈 몸에 전부 들어가 있던 건지 모를 정도로 거대했다.

크기가 큰 만큼 때리긴 쉽겠지만, 맞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순 있을지 미지수였다.

연약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조차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도 않았는데, 제 모습을 드러낸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오히려 이쪽만 저 커다란 촉수와 길쭉한 팔 때문에 피하기가 더 어려워질 성싶었다.

촤악-

“다들 피해라!”

콰아아앙-!

후두둑-

쭉 뻗은 촉수가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가까스로 바닥에 붙어 몸을 피한 나는,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 내성벽을 허물어트린 촉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으하하! 무지막지하구만. 이거야 원, 조금만 스쳐도 그대로 터져버리겠어. 가능하면 한 번 힘으로 겨뤄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헛소리하지 말고 움직여라, 악투스. 다시 온다!”

콰앙-!

나는 곧바로 마법을 준비하는 벨제붑과, 그동안 시선을 끌기 위해 악신에게 바짝 붙는 악투스를 보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앗-

“으헉! 이거 위험하구만!”

악신은 금세 제 앞에 다다른 악투스를 보고선, 그를 잡기 위해 촉수와 팔 모두를 뻗었다.

벨제붑이 준비하는 마법 정도야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건지, 조금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한 명씩 천천히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악투스가 가장 위협이 되리라 여겨 처음부터 그를 먼저 노릴 작정이었던 건지.

어찌 됐던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연격에, 악투스는 놈의 몸통을 눈앞에 두고서 다시 물러나야 했다.

촤르륵-

콱!

“크윽!”

하지만 악신은 그대로 보내주지 않았다.

집요하게 따라붙은 촉수들은 기어코 그의 등 뒤를 가로막고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끄흐… 이거 꽤 위험, 하군.”

그렇지 않아도 두꺼운 촉수가 힘을 받으며 더욱 부풀었다.

동시에 악투스의 몸을 옭아매던 힘 또한 강해졌다.

“으으윽….”

붉게 물든 얼굴에 핏줄이 돋았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그의 혈관이 하나둘씩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져 나가며, 금세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으드득-

촤악-!

끝내 온몸의 뼈가 조금씩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찰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으며 휘둘러진 채찍이 악투스를 감싼 촉수 위로 떨어졌다.

쯔어억-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시퍼런 검기를 두른 채찍이 빨판을 찢어발기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악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풀고 뒤로 물러났다.

툭- 투둑-

반쯤 잘려 나간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핏물과 함께, 악투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악투스, 괜찮겠어?”

“크흐… 아파 죽겠구만. 여기저기 다 금이 간 모양이야. 그런데 뭐, 싸움이란 게 원래 다 이런 거 아니겠나?”

그는 릴리스가 내민 손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못 이길 것도 없겠구만. 생각보다 그리 단단하지 않아. 크기가 크기니 잡는 데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이쪽이 먼저 당하지만 않는다면 어찌 죽일 수는 있겠어.”

그 말대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의 방어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저 거대한 덩치를 쓰러트리려면 어지간한 공격으론 소용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뻐억-!

“크학!”

릴리스가 악투스를 구해 내는 사이 단단한 육체를 앞세워 악신의 몸통을 밀어붙이던 가고일이, 다잡은 먹이를 놓치고 저를 타겟으로 바꾼 촉수들을 피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게르베스!”

그 모습을 본 릴리스가 황급히 그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악신은 두 번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높이 들어 올린 촉수를 쓰러진 녀석 위로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아, 아….”

촉수가 내리친 자리.

뭉게뭉게 솟아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거 야단났군.”

단 한 방.

단순히 맷집으로만 따지자면 그 발록들보다도 더 단단하다 여겨지는 가고일들의 정점이, 고작해야 촉수질 한 번에 산산조각 났다.

“아까 했던 말은 다 취소해야겠어. 이래서야 싸움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구만.”

-#@#$@!

게르베스를 박살 낸 악신이 또다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이쪽을 내려다봤다.

순간 절망이 우리를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