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콰앙-!
여신의 눈앞에서 허공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와 부딪힌 단검이 부르르 떨렸다.
호기롭게 덤벼든 것치고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으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여유를 잃은 적 없던 여신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삐져나왔다.
이쪽으로 내뻗은 팔에도 꽤나 힘이 들어간 것이, 미세하지만 자꾸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벌써 생명력을 이만큼이나… 쯧. 쓸모없는 늙은이 같으니. 역시 의식에 문제가 있었구나.”
부웅-
카가가각-
“크윽….”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의 공격은 거칠고 묵직했으니까.
“아쉽지만 더는 놀아 줄 수 없겠구나.”
보이지 않는 공격에 뒤로 쭉 밀려난 나는, 어느새 허공에 떠올라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신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마치 벌레를 상대하듯 제자리에서 손만 휘적거리던 놈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녀 또한 더 이상 이전만큼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벌써 생명력이 어쩌고, 의식이 어쩌고 했던가.
처음 그 늙은 사제를 붙잡아 생명력을 빼앗았던 것도 그렇고, 싸우는 와중에도 죽어 가는 황제를 찾아 꺼냈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녀석은 지금 주기적으로 생명력을 보충해 줘야 되는 상태가 아닌가 싶었다.
분명 의식이 뭔가 잘못됐던 거겠지.
황성 지하에 막 다다랐을 적에 사제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걸 생각해 보면, 본디 일러도 이틀 뒤에나 완성되었어야 할 걸 무리하게 앞당긴 모양새였으니까.
“이만 죽어라.”
후우우웅-
여신이 어깨 위로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 무슨….”
여기도, 저기도.
지금 내가 밟고 선 땅 근처… 아니, 황성 터 전체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피하기엔 늦었다.
재빨리 판단을 마친 나는, 곧장 발을 굴러 땅을 뒤집었다.
쿠르릉-
이윽고 꽤 깊숙이 파인 땅속으로 비집고 들어간 나는, 양팔을 들어 올려 단검으로 머리 위를 막고, 그거로도 모자라 혈마법으로 핏빛 방패를 만들어 뒤집어썼다.
쿠구구구구-
콰가가각-
“크으으읏…!”
나는 무언가를 막아서기 무섭게 곤죽이 되어 으스러지는 방패를 보며, 다급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으직- 으지직-
순간 마력을 받은 방패가 다시금 원형을 되찾아가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여신의 일격은 기어코 방패를 부수고 머리 위로 떨어졌다.
끼기기기긱-
뒤이어 그 아래에 버티고 있던 단검에서 불똥이 튀며 쇠를 긁는 소리가 났다.
마왕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패마저 가볍게 분쇄해 버린 힘과 마주한 팔뚝이 비명을 질렀다.
“크, 으아아아아!”
콰앙-!
그렇게 몇 초를 버텼을까.
팔뚝에 돋아난 핏줄이 하나둘씩 터지며, 악문 이빨이 갈리다 못해 깨져나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끝내 그 무지막지한 일격을 무사히 쳐낼 수 있었다.
“허억, 헉….”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파묻힌 땅 밖으로 나왔다.
황성터에 솟아있던 잔해들은 어느새 잔뜩 찌부러진 채로 땅속에 박혀 있었다.
“젠장, 놈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든 나는, 곧장 그 빌어먹을 여신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이런 망할!”
녀석은 그새 내성 벽을 넘어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양새가 생각보다 느린 걸로 봐선, 아무래도 방금 그 일격으로 생명력을 많이 소진한 모양이었다.
차르륵-
나는 곧바로 몸을 박쥐로 흩트려 놈의 뒤를 쫓았다.
저대로 내성을 벗어나게 놔뒀다간, 밖에 있는 녀석들을 흡수해 생명력을 다시 채워 버릴 터였다.
“…놀랍구나. 설마 그 일격에도 살아남다니. 하지만 아쉽게 됐군. 이미 늦었다.”
그녀 또한 내가 쫓기 시작한 걸 눈치챘는지, 슬쩍 이쪽을 돌아보며 속도를 높였다.
망할… 이렇게 놓치는 건가?
나 또한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을 쫓았지만, 갈수록 차이가 벌어질 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전의 일격을 버텨내느라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나와는 달리, 그녀는 그저 지치기만 했을 뿐이었으니까.
“하찮은 피조물치고는 제법이었다만, 그것도 여기까지…. 큭!”
쩌억-!
결국 녀석이 먼저 내성 벽을 넘으려던 찰나.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무언가와 부딪힌 녀석이 튕겨져 나갔다.
쿠웅-!
“지금 무슨….”
나는 그대로 폭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힌 여신을 보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턱-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그래, 이렇게 쉽게 끝나면 안 되지. 아직 몸도 제대로 못 풀었는데 말이야.”
…악투스?
나는 성벽을 타고 높이 뛰어올라 위쪽에 도착한 발록을 보며, 금방 상황파악을 마치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얼추 바깥이 마무리된 모양이군.
“오, 에릭.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악투스는 얼얼한 주먹을 쓰다듬으며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이대로 놓쳐버리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늦지 않게 지원이 와서 다행이었다.
일단은 그뿐이긴 했지만, 하나가 왔다는 건 이제 곧 다른 마왕들도 속속들이 모여들 거란 얘기였다.
“크으… 감히, 감히 피조물 따위가 내게 상처를!”
부스스-
그사이 찌부러진 잔해들 사이에 처박힌 여신이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탈탈 털어내는 먼지 사이로 팔 한쪽이 덜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악투스의 일격에 맞아 부서진 모양이었다.
“오! 제대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구만 그래! 이거 참, 이렇게 재미있는 녀석이랑 혼자서만 즐기고 있었던 건가, 에릭?”
“…딱히 즐겁진 않았지만 말이지.”
“으하하! 하긴, 꼴을 보아하니 된통 당하고 있던 모양이구만! 흐흐, 이거 더 기대되는군. 자네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적이라니.”
악투스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여신을 내려다봤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솟아선 꿈틀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저 아래로 뛰어들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애써 참고 있는 건, 내게 무언가 듣고 싶은 얘기라도 있는 거겠지.
이를테면 조심해야 될 만한 공격이라든가, 약점이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그 또한 발록이니 만큼 강자와의 싸움을 앞두고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구 돌진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기엔, 이 전쟁에 걸려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꽤나 특이한 공격을 해 오더군. 녀석의 손짓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 그거 참 재미있겠구만! 보이지 않은 공격이라니. 흐흐.”
악투스는 내 충고에 더욱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고선, 팔을 돌리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럼 먼저 가지. 힘들면 잠시 빠져 있어도 좋아!”
콰앙-!
나는 마치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간 그를 보고선, 조용히 숨을 고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말이야 조금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여신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치긴 했어도 아직 몸은 멀쩡했다.
부러진 팔도 그새 다시 붙은 듯 붓기가 가라앉아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질 거 같진 않았다.
처음엔 상처는커녕 일말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던 그 모습이 커다란 벽과 같이 느껴졌었지만, 지금은 몇 번 두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금이 가 있었다.
공격이 통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으하하하! 죽어라!”
콰아아앙-!
직전까지 여신이 서 있던 자리에 악투스의 주먹이 꽂히며, 바닥의 갈라지고 부서진 파편이 사방에 비산했다.
픽-
“읏! 이 빌어먹을 것이 감히 또 내게 상처를… 꺼져라!”
날카로운 파편이 얼굴을 스치며 주욱 살갗을 갈랐다.
화끈거리는 부분에 손가락을 대어 본 여신이, 먹물처럼 시커멓게 묻어나오는 피를 보고선 이를 악물었다.
부웅-
“크흐! 이런 느낌이구만! 확실히, 제대로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군!”
여신의 손짓에 따라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황급히 뒤로 몸을 뺀 악투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자고로 싸움이란 이래야지!”
후웅-!
그는 잠시 몸을 뺀 사이 거리를 벌리려는 그녀를 향해, 놓치지 않고 다시 바짝 달라붙었다.
투둑-
나는 생각보다 매섭게 여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악투스를 보고선, 손목을 그어 피를 뚝뚝 떨어트렸다.
콰르르륵-
내 것에 더해 무너진 황성에 깔려 죽어 나간 이들의 피까지.
그를 모두 조종해 내성 안쪽으로 커다란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쩌억-!
“아윽… 이, 꺼져라!”
“크학!”
콰아앙-!
한 절반 정도 그렸을까.
나는 한 팔을 내주고선 기어코 악투스를 쳐내 멀리 날려버린 여신을 보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빌어먹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쥐새끼 같은 놈. 위에서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건지, 악투스를 떼어낸 그녀는 빠르게 마법진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악투스를 상대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생명력을 많이 써먹었는지, 이전과 달리 부러진 팔을 다시 치료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크으… 머리야.”
저 멀리 날아가 성벽에 처박힌 악투스 또한 타격이 꽤 컸는지, 금방 정신을 차리긴 힘들어 보였다.
어찌 일어나긴 했지만 휘청거리며 중심을 못 잡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제기랄, 어떻게 해야….
콰아아아앙-!
“꺄아아아악!”
그렇게 결국 혈마법을 포기하고 막 자리를 뜨려던 찰나.
나는 내성 성문 쪽에서 날아든 무언가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여신을 보고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하나! 빨리 마무리하지 않고!”
벨제붑.
나는 양손에 이글거리는 화염구를 든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신을 향해 다가가는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타이밍 한 번 죽여주는군.
“다들 내성 밖으로 피해라!”
뒤이어 다른 두 마왕까지 몰려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끝내 마법진을 완성시킨 나는, 여신을 상대로 시간을 끌던 넷을 향해 소리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번쩍-!
곧 내성 안쪽을 전부 둘러쌀 만큼 거대한 마법진에서 터져 나온 빛이, 도시 전체를 새하얗게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