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도시 내에서 전투가 한참이던 와중에도 그 웅장함과 화려함을 잃지 않았던 황성이 맥없이 무너져 내린 잔해 위.
여신은 고치처럼 저를 감싸고 있던 날개를 펼치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아이야.”
나는 귓가를 살살 간질여오는 달콤한 목소리에, 홀린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심한 듯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은 생기가 없음에도 마치 보석처럼 빛났으며, 그 외모는 순간 끓어오르던 적개심마저 다 날려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여신.
그녀는 그리 불리우는 말마따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내게 있어 너무나도 불합리한 존재였다.
저도 모르게 눈 녹듯 녹아내린 복수심과 증오가 있던 자리엔, 서서히 경외감이 차올랐다.
푸욱-
“크으….”
점차 정신을 잃어가던 나는, 들고 있던 단검을 역수로 쥐고선 허벅지를 깊게 찔렀다.
저릿한 고통이 골반을 넘어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순식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빌어먹을. 하마터면 싸우지도 못하고 끝날 뻔했군.
촤악-
정신을 차린 나는 피 묻은 단검을 뽑으며 다시금 그녀를 올려다봤다.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굳게 다진 의지 덕일까.
더 이상 이전처럼 그녀에게 홀리는 일은 없었다.
“흐응….”
여신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조용히 그 고운 인상을 찌푸렸다.
“기이하구나. 한낱 피조물이 내 씨를 품고 있다니.”
씨?
의미 불명한 그 말에 흠칫 몸이 떨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그녀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릉-
확실히.
무슨 뜻이던 간에 그 말마따나 아무 상관없는 얘기였다.
중요한 건 지금 그딴 게 아니었으니까.
원수가 내 눈앞에 있다.
빌어먹을 저주를 내게 붙인 장본인이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제 무엇을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오만하구나. 그리고 건방지기 짝이 없어. 감히 한낱 피조물 따위가 내게 이를 드러내다니.”
여신은 저를 향해 겨누어진 날을 보고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쿠구구구-
“으윽….”
동시에 무너진 잔해들이 들썩이며, 그 아래 파묻혀있던 인영이 밖으로 꺼내 올려졌다.
“쯧. 살아있었나.”
단련된 기사도 아니고 하물며 병사도 아니며, 늙고 노쇠한 몸뚱이의 사제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잔해에 깔려 죽었으리라 생각했건만.
놈을 둘러싸고 있는 허연 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신이 현신함과 함께 그를 지켜 준 모양이었다.
“위, 위대하신 분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녀석은 곧 여신의 얼굴을 마주하고선 주륵 눈물을 쏟아내며 바닥에 낮게 엎드렸다.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 저 악신을 불러낸 놈 치고는 의외로, 순수하게 감격에 찬 표정이었다.
하긴 선하고 악하고를 떠나, 제가 그리 모시던 신을 눈앞에서 본 것으로도 모자라 그에게 목숨을 구해지기까지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 볼 수 있었다.
“아이야. 네게서 진실된 신앙이 느껴지는구나.”
“아, 아아….”
여신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자애로운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내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맞잡은 신도를 향해 더욱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것은 더 이상 미소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기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예?”
그 소름 끼치는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늙은 사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흐읍!”
나는 순간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위화감에, 황급히 사제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몸을 던졌다.
카앙-!
“뭣….”
있는 힘껏 휘두른 단검이 무언가에 막힌 듯 불꽃을 튀기며 튕겨져 나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난 어느새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여신을 보고선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저를 노린 공격도 아니고 사제를 노린 일격이었다.
헌데도 굳이 저렇게 나섰다는 건, 저 노인네에게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
스륵-
그렇다면 우선 저놈부터 처리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여신의 탈을 쓴 저 악신이 과연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듯했으니까.
변수는 가능한 줄여놓는 편이 나았다.
“이미 늦었다.”
“큭, 끄윽…. 위, 위대하신 분이시여. 어째서….”
“무, 무슨?”
황성 아래 깔린 시체들로부터 뽑아낸 피로 몰래 창날을 갈던 나는, 마치 흡혈이라도 당하는 듯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노인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수명을 가져간 거냐.”
“후후. 알아보겠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명이 아니라 생명력이지만, 어쨌든 이걸로 확실해진 것 같구나. 네게 심어진 씨는 가짜가 아니었어. 무슨 수로 내 힘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또 그 씨 얘긴가.
“그건 한낱 피조물 따위가,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가지고 있어도 될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흡!”
알 수 없는 얘기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순간 머릿속에 울리는 경종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후웅-
…뭐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분명히 내 위를 스쳐 지나간 무언가에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아까 내 일격을 막아낸 것과 같은 녀석인가.
아무래도 무슨 염동력이라도 다루는 모양이었다.
“젠장. 신이라는 녀석치고는 참 쫌생이 같은 능력을 다루는군.”
“…불경한 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콰가가각-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킨 나는 마치 짐승이 할퀴고 지나가듯 내 발치에서부터 움푹 파이기 시작한 바닥에, 있는 힘껏 머리 위로 단검을 쳐올렸다.
카아앙-!
“큿….”
젠장, 이거 난감하군.
나는 저릿한 손목을 툭툭 털며, 나지막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야 쉽사리 놈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을 거 같았다.
물론 혈마법으로 잘 빈틈을 만들어볼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까부터 계속 제 뒤를 향해 흘끔흘끔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몰래 준비하고 있던 마법마저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언젠가 내게 빈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릴 속셈인가? 그렇다면 안타깝게 됐구나. 네가 바라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카가각-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에, 정신없이 몸을 굴려야 했다.
“꿰뚫어라!”
후웅-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혈마법을 이용해 빈틈을 노려보았으나, 녀석은 그저 무심한 눈으로 공격을 쳐낼 뿐이었다.
“흥. 같잖은 짓을.”
티잉-
“빌어먹을….”
그나마 다행인 건 여신의 공격 또한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대로 가다간 결국 이쪽이 먼저 지쳐 쓰러질 터였다.
“칫.”
이런 상황이 답답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 순간 날아오던 공격이 뚝 끊겼다.
황성이 웅장하게 서 있던 터는 여기저기 깊게 파이고 조각난 땅들로 엉망이었다.
“후욱, 훅….”
뭐가 어쨌든, 나는 간만에 숨을 고르며 여신의 동태를 살폈다.
그녀는 조용히 무너진 황성 터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지?
쿠구구구-
언제 또 날아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옅어진 검기를 채우며 바짝 경계심을 세우던 나는, 갑자기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닥에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설마 아래에서 튀어나오는 건….
투두둑-
“저건….”
허나 그런 내 예상은 기우였는지, 곧 흔들림이 멈추고 잔해 속에서 무언가 들어 올려졌다.
그리 신봉하던 여신에게 뒤통수를 맞고 제 생명력을 빨려 양분이 되어버린 그 늙은 사제처럼, 허연 막에 둘러싸여….
“으으….”
“프리디리히!”
나는 잔해에 깔려 정신을 잃은 듯 맥없이 신음을 흘리는 황제를 보고선 놀란 눈을 떴다.
처음부터 저 막에 둘러싸여 멀쩡하던 사제와는 달리 하반신이 완전히 짓뭉개져선, 당장 놈이 죽는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난 여신의 손짓에 따라 점점 그녀에게로 끌려가는 녀석을 보고선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놈 또한 생명력을 빨려 죽어버리고 말 터였다.
후웅-
황급히 혈마법을 이용해 창을 만들어 날린 나는, 슬쩍 이쪽을 보며 고개를 틀어 피하는 여신을 보고선 곧바로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흐응… 그 늙은 사제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구나. 헌데 이상하군. 마족인 네가 이놈과 무슨 관계가 있을 리 없는데.”
부웅-
“큿… 제기랄!”
그렇게 황제에게 닿기 직전.
나는 갑작스레 사방에서 덮쳐오는 공격에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어찌 됐든 안타깝게 됐구나. 무슨 사이든, 뭘 하려고 해도 이미 늦어 버렸으니 말이야.”
콱-
여신은 이내 보란 듯이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떨어진 황제의 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어, 으으….”
녀석은 의식을 잃은 채 부르르 몸을 떨며, 점차 야위어 갔다.
대륙의 절반 이상의 다스리던 제국의 통치자가 가지는 최후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변변찮았다.
“쯧. 역시 늙은 놈들은 얻을 게 얼마 없군.”
파스스-
나는 여신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황제를 보고선 악귀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 이 씹어 죽일 년이 감히!”
그건 내 먹이였다.
내 손으로 직접 찢어발기고, 남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놈이었다.
헌데 그걸 가로챈 걸로도 모자라, 저리도 편히 보내 버리다니.
“죽여 버리겠다!”
난 분노를 터트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이 빌어먹을 여신의 살점을 하나하나 다 발라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