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으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고작 이런 걸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콰아앙-!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주먹에 누군가 맞을 때마다, 폭음과 함께 붕 뜬 신형이 날아갔다.
“커헉! 끄윽….”
“사, 사제! 빨리 사제들을 모아 결계를 펼쳐라!”
고작 한 명에게 맥을 못 추리고 쓰러져 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을 목격한 기사들은, 황급히 사제들을 찾아 움직였다.
마족들이 신성력에 약점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물론 저 괴물 같은 놈을 결계 안쪽으로 끌어들인다고 해서 과연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안켈하임의 성문이 뚫려버린 이상, 그들에게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었으니까.
“크흐흐. 그래, 좋다. 어디 한번 해 보거라. 그렇지 않아도 요새 성문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느라 몸이 근질근질했던 참인데, 잘됐군.”
악투스는 기사들이 원하는 대로 사제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끔 잠시 놔두고선, 주변을 슥 살폈다.
저를 제외하더라도 제 부하들과 다른 마왕들의 손에, 도시는 이미 빠르게 함락되어가고 있었다.
그 하나 잠시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일탈을 부린다 한들, 결과는 달라질 바 없을 터였다.
“아직인가? 으음,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마왕은 꽤 시간을 줬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기사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야 여유를 부리곤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가만히 기다려 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근질거리는 몸을 풀기 위해 개인적인 욕심으로 멋대로 기회를 주고는 있었지만, 가능하면 일은 빨리 해치울수록 좋은 법이었으니까.
지난 회의 때 들었던 의식인지 뭔지에 대한 것도 아직 남아 있었고 말이다.
“하는 수 없군. 즐기는 건 다음에 하는 수밖에. 카르카쉬, 그놈이 먼저 다 끝내놓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많이 기다려 준 편이었다.
악투스는 아쉬움에 한숨을 푹 내쉬며, 아까 놓아준 기사들을 찾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저기 있다! 당장 둘러싸!”
그렇게 주변을 지나는 병사들을 하나씩 해치우며 서문으로 향하길 잠시.
마왕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다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마왕이다. 모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이 주변뿐만 아니라 도시에 있는 사제들을 전부 긁어모으기라도 했는지, 얼핏 보이는 것만으로도 백은 넘어 보였다.
거기에 저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 또한 최소 수십.
그럼에도 불안한지, 다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 흐흣. 으하하하핫!”
악투스는 찢어질 듯 입꼬리를 올리며 기쁨에 몸을 떨었다.
비록 그가 원하던 강자와의 싸움은 아니었지만, 제 목숨을 걸고 부딪혀오는 전사들과의 싸움 역시 무척이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좋다! 어디 전력으로 부딪쳐 보거라!”
“큿….”
“겁먹지 마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기백에 눌려 한순간 주춤거리며 뒷걸음친 기사들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말대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는 곳에 기대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죽어라!”
사제들이 기도문을 모두 읊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기사들이 덮쳐들었다.
“크하하하!”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뒤편에서 날아드는 검격을 제 등으로 받아낸 마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대로 정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커억!”
“무, 무슨 괴물 같은!”
시퍼런 검기를 두른 날붙이가 한낱 피륙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동시에 정면에서 파고들다 그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주먹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기사는, 흉갑째로 찌그러져 짧은 비명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박혔다.
“검을 멈추지 마라! 계속 그대로 밀어붙여!”
그 모습에 놀라 뻣뻣하게 굳어 버린 기사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호통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선 협공을 이어 나갔다.
누군가 쓰러지면 그 뒤에서 자리를 메우고, 동료가 나자빠지는 동안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으하하하! 참으로 훌륭하구나! 이 악투스를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그 용기. 내 너희들의 배짱을 높이 사마!”
악투스는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갈수록 도리어 더욱 강렬하게 몰아치는 기사들을 보며,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탓일까.
처음엔 손속을 두지 않고 적을 날려버리던 그의 주먹도, 어느 순간부턴가 검을 부수고 적당히 기절시키는 선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크으으… 젠장! 으아아아!”
얼마나 지났을까.
그 많던 동료들이 전부 쓰러지고, 홀로 남아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기사를 가볍게 제압한 마왕은, 찢어지고 붉게 물든 상의를 벗어던지고 이만 주변을 슥 살폈다.
“…쯧. 그새 다 도망친 건가. 빌어먹을 겁쟁이들 같으니.”
분명 처음 기사들이 저를 둘러쌌을 때만 해도 바글바글했던 사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들의 예상과는 달리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한 기사들을 보고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악투스 님!”
그 한심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저 멀리서 저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부하들을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 살아있는 놈들을 전부 챙기도록. 그들 모두 훌륭한 전사들이었다.”
“아… 예, 예!”
비록 적이지만 눈앞의 쓰러진 기사들의 용기는 충분히 존경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훌륭한 전사들이 여태껏 아무도 없던 것도 아니고, 그들 모두 이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전세가 완벽히 마왕군에게로 기운 지금이라면 이 정도 관용은 베풀어 줄 수 있었다.
본디 여유는 승자의 것이었으니까.
“그럼 빨리 서문을… 음?”
번쩍-
쓰러진 기사들을 보내고 남은 부하들과 함께 이만 서문을 열러 걸음을 떼던 악투스는, 순간 뒤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건….”
거대한 기둥.
내성 안쪽에서 솟구친 새하얀 기둥을 마주한 그는, 순간 전신을 휘감는 듯한 불안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위험하군.”
느껴지는 신성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당장은 그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혹여 저 기둥 속에 갇힌 신성력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악투스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들 서문으로 향하도록. 그리고 그곳을 점령한 뒤엔, 모두 이곳에서 멀찍이 도망치도록 한다.”
“예, 예? 하지만 그럼….”
짧은 고민을 마친 마왕은,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선 내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악투스 님! 저희들만이라도 데리고….”
“바보 같은 놈들! 너희가 빠지면 부하들은 누가 이끈단 말이냐!”
“그, 그건….”
이상함을 느끼고 제 뒤를 따라오려던 사천왕들마저 호통을 쳐 돌려보낸 악투스는, 망설임 없이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크으….”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본능이 자꾸만 도망치라 외쳤지만, 그럴수록 그는 제 다리를 더욱 채찍질했다.
그토록 원하던 강자와의 싸움이,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념이 마왕의 결의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었다.
* * *
끼익-
“…빌어먹을.”
황성 내부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모두 정리하고 지하에 도착한 나는, 커다란 문을 열고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향기.
이 넓은 지하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혈향과 달리,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흐흐, 왔구나.”
늦었군.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제단 위에서 꽤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밖에 있는 놈들은 모두 죽었나? 뭐, 상관없다. 이미 의식은 모두 끝났으니까.”
그는 목에 건 여신상을 만지작거리며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놈이 완성시킨 의식이 과연 무엇을 불러올지는 모르겠지만, 척 보기에도 쉬이 넘길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저 제단 아래 붉게 흐르는 피로 그려진 마법진의 크기와 복잡하게 들어찬 도형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경배하라. 그분께서 드디어 이 땅에 강림하시니.”
퐁당-
무어라 중얼거리던 남자는, 이내 목에 걸린 여신상을 뜯어내며 연못에 던졌다.
“회개하라. 빌어먹을 마족 놈들아!”
쿠구구구-
번쩍-
“큿….”
이윽고 땅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연못에서부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쿠웅- 쿵-
“이런 빌어먹을!”
곧 갈수록 거세지는 진동을 버티지 못한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깔리기 전에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며, 아직도 제단 위에 남은 사제를 노려봤다.
“오오, 여신이시여! 미천한 종이 감히 그대를 뵙나이다!”
그는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솟아오른 빛기둥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쿠르르릉-!
“젠장….”
결국 녀석은 황성이 완전히 무너져 지하가 매몰될 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유 모를 찝찝함에 마른침을 삼키며, 무너진 틈을 비집고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는 빛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번쩍-!
“읏….”
콰아아앙-!
그러기도 잠시.
난 이내 한 번 더 빛을 뿜어내며, 곧 굉음과 함께 일은 거대한 폭발에 휩쓸렸다.
“컥!”
망할, 대체 무슨 일이…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 내성에 부딪힌 나는, 찌르르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이런.”
하얀 날개.
나는 새하얀 날개로 제 몸을 가린 채 꼿꼿이 선 여자를 보고선, 입술을 꾹 씹었다.
여신.
그 빌어먹을 것이 기어코 이 땅에 현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