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카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가제프의 목을 파고들던 단검이 튕겨져 나갔다.
단번에 끝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빨랐다.
나는 찔끔 피가 흘러내리는 목덜미를 보고선, 입술을 핥으며 그대로 빈 옆구리를 향해 반대쪽에 쥔 단검을 휘둘렀다.
후웅-
“…이거 참, 꽤나 거슬리는군.”
난 아슬아슬하게 뒤로 물러나 검기를 피하는 녀석을 보고선, 어딘가 삐걱거리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결계 때문에 반응이 좀 느려진 모양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가볍게 찢어발길 제국군 병사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다른 마족들과 달리 크게 약화되진 않았지만, 이래서야 놈을 잡는 게 마냥 쉽진 않을 거 같았다.
“괴, 괴물… 괴물이야!”
“도망….”
콰작-
“다들 물러서지 마라! 이대로 빠르게 북문까지 닿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가제프를 붙들고 있는 동안 발라크와 사천왕들이 조금씩 북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여기서 홀로 이놈을 잡지 못하더라도, 북문을 열어 악투스들을 합류시키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문제가 없을 거란 얘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들여 이놈에 대한 몫을 나눌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빌어먹을….”
가제프 또한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점점 밀려나는 제국군을 힐끔힐끔 살피며 입술을 꾹 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머잖아 북문이 열리고 말 거라는 생각에, 꽤나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후웅-
“어딜 보는 거냐. 네게 그런 여유는 없을 텐데.”
혹시나 놈이 등을 돌릴까 곧바로 녀석에게 붙어 단검을 휘두른 나는, 다시금 이쪽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는 놈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또 언제 벗어나려 할지 모르니, 가능한 더는 잡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편이 좋겠지.
“지금 네가 가서 막는다고 해도, 조금 돌아서 이미 열려 있는 동문을 통해 들어오면 끝이다. 네놈도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애써 봐야 이제 와서 동문을 다시 닫아버리기는 늦었다는 걸 말이야.”
카앙-!
“큿, 이 더러운 마족 놈이… 오냐. 그리 원한다면 설령 북문이 열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네놈을 찢어발겨 주겠다!”
저도 느끼고는 있었던 건지, 그는 내 말에 곧장 미련을 버리고선 빠르게 달려들었다.
부웅-
“흐흐, 그래. 그래야지.”
단번에 반으로 갈라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낸 난, 슬쩍 거리를 벌리고선 단검을 쥔 손을 까딱였다.
쐐액-
“잔재주를….”
카각-
제 뒤쪽에서 몽글몽글 솟아올라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갖춘 핏물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겨낸 가제프는, 더욱 선명하게 검기를 피우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핏-
투둑-
“…훌륭하군. 과연 그랜드 마스터. 제국을 대표하는 강자라 칭할 만하구나.”
싸한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기울인 나는, 분명 허공에 검을 휘둘렀음에도 볼 끝을 살짝 찢어낸 검풍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법도 아니고, 단순히 세게 칼을 휘둘러 일으킨 검풍으로 이리 유의미한 물리력을 낼 수 있다니.
그 마흐제브도 이런 묘기를 보이진 못했는데.
노쇠한 그와 달리 아직 팔팔한 현역이라 그런가, 힘 하나만큼은 악투스와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을 듯싶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다, 뱀파이어. 본래 다른 마왕들을 상대할 것까지 생각해서 힘을 좀 아껴두려고 했건만… 흐읍!”
부우웅-
“이건… 큿!”
콰가가각-
콰앙-!
짧은 기합과 함께 또다시 날아드는 검풍에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린 나는, 곧 굉음과 함께 뒤쪽에서 일어난 폭발에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무시무시한 괴력이군. 이 정도면 검이 아니라 마법이라 해도 믿겠어.”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곳부터 시작해, 한참 떨어진 뒤쪽 성벽까지.
일자로 깊게 파여 헤집어진 땅과, 검풍에 휩쓸려 산산조각이 나 버린 병사들을 보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튀어나왔다.
이게 어찌 사람이 검을 휘두른 결과란 말인가.
“죽어라, 이 더러운 마족 놈아!”
부우웅- 부웅-
가제프는 당황한 나를 보고선 기세를 몰아 더욱 빠르게 검을 몰아쳤다.
사방이 갈라지고 터지고, 놈 하나 때문에 제국군이고 마왕군이고 전장이 아주 아비규환이 되었지만, 그런 건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어떻게든 빠르게 나를 죽이고선 늦지 않게 성문을 막아보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후웅-
하지만 아무리 위협적인 공격일지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검풍을 피해낸 나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일격 속에 잠깐 틈이 생긴 찰나, 손가락을 들어 녀석의 아래에 혈마법을 발동시켰다.
“꿰뚫어라.”
콰가가각-
“이런….”
쉼 없이 검을 휘둘러대던 녀석도 중간에 이변을 느꼈는지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바닥을 꿰뚫고 나온 창은 그보다 한 발 더 빨랐다.
푸욱-
“큽!”
갑주째로 놈의 허벅지를 꿰뚫은 창이 사방으로 가시를 치며 상처를 헤집었다.
“어딜! 고작 이런 것에 굴할 성싶으냐!”
부웅-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놈의 힘줄을 잘라버리려던 난, 바닥을 박차고 녀석의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시금 날아오는 검풍에 눈살을 찌푸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역시 고작 상처 하나 가지곤 녀석을 제압할 수 없는 건가.
차라리 죽이는 거라면 모를까, 어떻게든 가능한 놈을 산 채로 붙잡아 두려다 보니 난이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나.”
녀석이 이쪽을 주시하며 슬금슬금 다리에 박힌 창을 빼내는 동안 슬쩍 전장을 살핀 나는, 머잖아 북문에 닿을 듯한 병사들을 보고선 두 단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가능하면 이 선물은 녀석을 붙잡고 나서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정석대로 계속 몰아붙이기만 해도 놈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서야 북문 밖에서 지원이 오기 전까지 끝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그의 정신을 먼저 무너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스릉-
나는 등 뒤에서 잘 벼려진 검 하나를 뽑아 들며, 보란 듯이 놈을 향해 조소를 지었다.
“네, 네놈… 그건!”
“흐흐. 알아보겠나? 하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네놈이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이니 말이야.”
제 손에 들린 검과 마찬가지로 황금빛으로 영롱히 빛나고 있는 검신을 마주한 가제프는, 떨리는 눈으로 내 손에 쥔 검을 바라봤다.
손잡이에 찍힌 틀림없는 황가의 문양.
그의 스승이자 전대 그랜드 마스터였던 검귀, 마흐제브가 현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제국의 보물이었다.
“이, 이 더러운 마족 놈이… 그건 네까짓 게 함부로 가지고 있어도 될 물건이 아니다. 어디 감히 내 스승의 명예를 더럽히려 든단 말이냐!”
나는 분노에 찬 얼굴로 일갈하는 그를 보고선, 그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스승? 웃기지도 않는군. 검귀에게 어디 제자가 있었단 말이냐.”
마흐제브와 가제프.
스승과 제자라기엔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제국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였다.
얼마나 유명하면 그 사실이 과거 용사로 뽑히기 전, 그저 전도유망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내 귀에도 들려왔을 정도겠는가.
물론 보통은 가제프가 마흐제브와의 대련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의 자리를 빼앗아 올라서는 과정에서 사이가 틀어졌다 알고 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황제의 부탁으로 억지로 받아들여진 반푼이 주제에. 양심이 있어야지.”
가제프는 한 시대에 하나는 나올까 싶을 만큼 훌륭한 재능을 가진 검사였지만, 그런 그조차도 마흐제브의 마음에 들지는 못했다.
그저 다음 세대의 그랜드 마스터를 길러내기 위해, 황제의 부탁으로 떠안은 것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흐제브가 가제프를 대충 지도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엔 자신을 꺾고 새로이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올랐을 만큼, 보란 듯이 훌륭하게 그를 길러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정말로 그의 실력이 스승을 넘어섰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대련이었기에, 그리고 마침 그맘때쯤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었던 마흐제브의 바람이 겹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오오오옴!”
나는 내 말에 격분해선 달려드는 녀석을 보며,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화나겠지. 그리고 분하겠지.
저는 끝내 얻을 수 없었던 마흐제브의 검이, 지금 더러운 마족 놈의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 이상 내 스승을 모욕하지 마라!”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히고, 그 충격에 발을 디딘 땅이 쩍쩍 갈라졌다.
시큰거리는 손목에 순간 이를 악문 나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놈의 면상을 보고선 조용히 히죽였다.
“모욕이라니. 그건 네가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반푼이 가짜 녀석아.”
녀석도 귀가 달렸으니 들리는 소문에 대해 모를 수 없었다.
제국 서부에 마흐제브의 제자가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마흐제브의 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 빼앗은 것일 거라 생각했겠지.
마흐제브는 결국 마룡왕의 손에 쓰러져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싸움을 목격한 이가 없는 지금, 어찌 진실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당시에도 검귀가 늘그막에 새 제자를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말이다.
카앙-!
힘을 주어 녀석의 검을 쳐낸 나는, 동요한 듯 흔들리는 칼끝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비록 마흐제브에게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를 존경하던 마음만큼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랜드 마스터라는 자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목표이자, 존경을 받고 살아가는 위치였으니까.
헌데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눈앞의 원수라 할 수 있는 마족이 제 스승의 인정을 받고 검을 넘겨받았다니.
가제프에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또 참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리라.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