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도망치지 마라!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다!”
이른 아침.
여느 때처럼 방패병들을 일렬로 세우고 마법사들의 포격을 준비하던 나는, 갑작스레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는 제국군을 보며 벙찐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놈들이 왜 저러는 거지? 혹시 날려 보낼 바위가 다 떨어진 건가?”
“음. 어쩌면 조금 아껴두려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저들이 아무리 병력이 모자라다고는 해도, 성문 하나쯤은 병사들로 틀어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확실히.
카렌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나는, 용맹하게 뛰어나오는 적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찌됐든 언젠가 다 죽여야 할 놈들이었다.
다른 마왕들과 함께 성문을 열어젖히고 도륙하는 편이 훨씬 병력소모는 적겠지만, 그래서야 전공에 목마른 이들의 욕심을 채워줄 순 없었다.
혹자들은 차라리 병력을 아껴둬서 힘으로 위협하는 쪽이 더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단순히 흘러가진 않았다.
아무리 한쪽이 전력을 잘 보전해놓는다 해도, 나머지가 손을 잡아 대항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마왕감이 없는 늑대인간들이나 부상당한 릴리스가 이끄는 서큐버스들이야 발언권이 조금 떨어지긴 하겠지만, 다른 네 종족까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너무 튀다간 나머지에게 둘러싸여 피를 보는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활약했다는 명분을 쥐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희생을 치르고 더 많은 적을 베어 넘긴 만큼 가져간다.
이는 세간의 시선으로 보아도, 그리고 각 군을 이끄는 상류층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제 몫을 크게 주장해도 안 될 것이었지만 말이다.
“마왕님, 어떡하시겠습니까?”
“일단 성벽에서 화살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서며 천천히 대응하도록 한다. 놈들이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굳이 그에 동요할 필요는 없다.”
나는 천천히 군을 물리며 달려드는 녀석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가능하면 역병을 더 빨리 퍼트리기 위해 계속해서 포로들을 날려 보내고 있긴 했지만, 굳이 애꿎은 병사들을 잃어가면서까지 그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다고 해서 눈에 띌 만큼 공적을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마법사들은 모두 물러서라! 방패병들은 전열을 재정비할 때까지 앞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앞서 나가있던 방패병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시 배치한 나는,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제국군을 보며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콰가가각-
“아아아악!”
“뭐, 뭐야! 앞에 무슨 일이냐!”
뒤쪽으로 빠지는 마법사들을 보며 황급히 방패병들을 넘으려던 놈들은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맥없이 쓰러졌다.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마라! 성벽에서 멀어지면 북쪽에 자리 잡은 녀석들이 와서 허리를 공격당할지도 모른다!”
아쉽게 기회를 날린 제국군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병력을 살짝 뒤로 물렸다.
보아하니 결판을 내러 나온 것 같진 않고, 예상대로 쌓아둔 바위를 아끼고 시간을 끌어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형님, 이참에 확 쓸어버리시지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로 적들을 훑는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꽝 부딪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순 있었지만, 오늘 완전히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전투에선 어찌 승리한다 하더라도, 부리나케 안으로 돌아가 성문을 걸어 잠글 놈들을 다시 끌어낼 순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긴다고 해도 완승을 거둘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들이 북문과 서문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두고 이쪽에 전력을 쏟아 붓고 있는 만큼, 병력의 수는 거의 차이나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숫자로만 따지자면 제국군이 한 수 위였다.
물론 병사들의 질은 감히 비교할 바가 못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기서 붙어봐야 상처뿐인 승리를 가져올 뿐이었다.
제국을 무너트린다 하더라도 마왕군의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보단 싱거운 승부가 되긴 하겠지만 아직 엘븐하임도 남아있었고, 드워프들의 왕국도 아직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또한 중간계를 모두 정복하고 난 후의 일도 염두에 두어야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준비해라. 나머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나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적당히 대치상황을 이루며 시간을 끌어주기로 했다.
꿍꿍이가 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차피 머잖아 안에서 성벽을 열어줄 텐데, 굳이 그 편한 길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그것만 믿고 있을 순 없으니, 적당히 마법으로 놈들을 갉아먹을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쏴라.”
콰앙-!
난 이윽고 내 손짓에 따라 제국군의 머리 위로 쏘아져나간 마법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전장을 훑었다.
* * *
“가제프 경!”
쾅-!
긴 교전이 끝나고 안켈하임으로 돌아온 가제프는, 씩씩거리며 저를 찾는 장군들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을 피우는 건가.”
“무슨 일?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도대체 왜 오늘 돌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오! 그 잘난 황실 마도사단도 없이, 마족 놈들과 거리를 둔 채로 마법만 쏘아댄 이유가 뭐요!”
장군은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쏘아붙였다.
오늘 전장에 나섰던 장군들 중 불만이 있었던 이들을 대표로 찾아왔으니 만큼 가제프 또한 쉬이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면전에서 이리 무례하게 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군사재판에 회부해 이번 전투에서 그의 지휘권을 박탈할 수 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무리 황제의 신임을 받고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라 칭송받던 가제프라 할지라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쇠퇴한 제국과 휘하의 단원들을 모두 잃은 상태에선 별달리 힘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럼 거기서 놈들과 정면으로 붙어야 했나? 아무리 이쪽이 수가 많더라도 태반이 제대로 된 훈련조차 거치지 않은 풋내기 징집병들이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괜히 부딪혔었다간 걷잡을 수 없이 피해가 커져버렸을 걸세.”
“그래서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얻어맞고만 있던 거요? 성문을 열고 나갔으면 제대로 한판 붙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지금껏 그래왔듯 성벽을 끼고 버티기라도 했어야지! 이래서야 병사들을 화살받이로 써먹고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지 않소!”
병사들을 대신해 열변을 토하는 장군의 말에, 가제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미간을 짚었다.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랬단 말인가?
처음 돌격 때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오른 피 바늘에 상황이 약간 꼬이긴 했었지만, 애초에 그럴 의도로 군을 이끌었던 것이었다.
의식을 마칠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바위를 아끼기 위해서.
더불어 병사들의 죽음을 통해 입을 줄여 약간이라도 식량을 아끼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나는 더 이상 경을 지지해줄 수 없소. 피차 목이 달려있으니 병력을 물리진 않겠지만, 더는 병사들의 불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겠소. 경은 오늘 일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져야할 것이오.”
쿵-!
가제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칠게 문을 닫고 돌아서는 장군을 보며, 수치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망할 잡것들이….”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건, 이를 감내하고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콰앙-!
“후욱, 훅….”
끓어오르는 분노에 책상을 내리쳐 부순 그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멍청한 기사 놈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시간을 끌려고 드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혹 병사들의 귀에 들어갈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가제프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쳐댔다.
“…그러고 보니 제물은 가능한 많이 모을수록 좋다고 했던가.”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지만, 의식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이면 장군 한둘쯤은 없어져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물론 그들로 훌륭한 기사이니만큼 전력에 손실이 올 수도 있었지만, 그 희생으로 의식이 좀 더 성공적으로 끝날 수만 있다면야 오히려 이득일 터였다.
“기다려라.”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가제프는 아까 그 장군의 얼굴을 떠올리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 * *
“에릭, 에릭!”
차르륵-
나는 전날보다 더 들뜬 표정으로 천막을 열어젖히는 셀파스트를 보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직감하고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시간은 언제지?”
“응? 알고 있었어?”
“아니, 그렇게 기뻐하면서 들어오는 걸 보니 슬슬 때가 됐구나 했지.”
“그, 그런가? 어쨌든 이틀 뒤 새벽이야. 가능하면 오늘이나 내일이었음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아직 충성심이 남아있는 모양이더라고.”
모레 새벽.
셀파스트의 보고를 들은 나는, 조금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쉬지 않고 날아드는 마법사들의 폭격에 안전부절못하는 얼굴로 자꾸만 가제프를 흘깃거리던 기사들을 생각하면 당장 오늘 기회가 오더라도 이상할 게 없겠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아직 충성을 지키는 놈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제대로 돌격 한 번 못해보고, 그렇다고 안으로 돌아가서 성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보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이 가만히 병사들을 잃은 격일 텐데.
“어쨌든 알았다. 다른 마왕들에겐 내가 일러두도록 하지.”
곧이어 그를 내보내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운 나는, 다른 마왕들과 연결된 수정구를 꺼내 들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레 새벽. 다들 늦지 않게 시선을 끌어줬으면 좋겠군.”
서문과 북문의 소란으로 이목이 끌린 사이, 안쪽에서 동문을 열고 우리가 들어선다.
그리고 성벽을 돌아 북문을 열어젖힌 뒤, 악투스들과 합류해 마찬가지로 서문을 열고 안켈하임을 점령한다.
나는 간단명료하고 효과적인 작전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성벽이 있는 곳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