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아, 아니야! 난 아니라고!”
“모함이다! 모함이야! 마족 놈들과 결탁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잖나!”
평소 검사를 하겠다며 사람들을 끌고 가던 시간이 아닌 다른 때에 몇몇 이들을 지목해 잡아가자, 도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간 잡아들인 마족을 고문해 그와 결탁한 이들을 밝혀냈다는 것이었지만, 그를 곧이곧대로 믿는 멍청이들은 몇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지난 닷새간 가만히 있다, 이제 와서 움직인단 말인가?
“…저, 정말로 시작됐어.”
자택에 숨어 창밖으로 흘깃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프랑크는 그 늑대인간의 예상대로 척척 진행되는 일들을 보며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동쪽을 시작으로 남쪽 그리고 서쪽, 마지막으로 북쪽마저 무너지자 제국은 전군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본디 안켈하임에 거주하고 있던 이들 중 노인과 여인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고, 남은 이들조차 창칼을 쥐고 군에 입대하지 않겠다는 자들은 모두 지하에 구금시켜버렸다.
“어떡해, 어떡하지?”
그럼에도 늙고 병들었으며 귀족도 아닌 프랑크가 아직 안켈하임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요상한 마족의 충고를 쉬이 넘기지 않고서 꾸준히 수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온 덕이었다.
물론 이젠 수도고 뭐고 그를 둘러싼 마족 놈들의 손에 떨어지게 생겼지만 말이다.
“이, 일단 연락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제 방 구석에 숨겨진 수정구들 중 먼지가 그득 쌓여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일 년 전, 프랑크가 아직 안켈하임과 제국 북부를 오가는 상단을 이끌던 시절.
파르메르 백작가의 영지를 나와 수도로 돌아오던 와중 마족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혔을 적에, 저를 셀파스트라 소개한 늑대인간과 거래하고 받은 물건이었다.
거래의 내용은 제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앞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알아다 자신에게 바칠 것.
한 마디로 지금 제국이 두 눈을 부릅뜨고 찾고 있는, 마족의 세작이 되어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세작이고 뭐고 일단 목숨은 살고 봐야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로 놈들이 아무런 해코지도 없이 그와 그의 상단을 풀어줬을 때만 해도, 그런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마족의 세작이라니.
혹여 들킨다면 교단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편하게 죽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지, 못해도 궂은 고문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언젠가 수정구에 불이 들어오고 이어진 제안엔, 상인으로서 쉬이 거절하지 못할 내용이 들어있었다.
만족스러운 정보를 보내준 세작에겐, 북부로 상행을 오더라도 붙잡지 않겠다.
더불어 이미 마왕군이 점령한 영지를 뚫고 지나가도 눈감아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제국 북부는 협곡을 타고 올라와 카르네몬을 함락시킨 마왕군들에게 당해, 점차 서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전선이 밀려나가던 중이었다.
영지를 잃고 밖으로 내몰린 제국민들이 산적으로 변모해 상로를 틀어막았으며, 제국 서쪽마저 공격당하고 있던 터라 멀리 돌아서 가기에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창 전란에 휩싸여 있던 북부는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점점 줄어들다 못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마왕군이 점령한 영지를 타고 상행을 계속할 수 있다면?
프랑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셀파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방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가 원하는 정보를 긁어모았다.
덕분에 상단주로서 많은 황금을 쥐게 된 프랑크는, 그간 관료들에게 먹여온 뇌물로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좀 받아라!”
그는 불이 들어왔는데도 연락이 없는 수정구를 보며 초초한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솔직히 북부가 무너져 내린 지금 계속 세작 노릇을 한다고 해서 더 얻을 수 있는 이권도 없었지만, 첫날부터 틀림없이 들어맞고 있는 예측은 그를 겁나게 만들었다.
황성에선 다른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수도에 남은 사람들을 안심시켰지만, 아무리 봐도 제국은 이미 망조를 걷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 끝에 다다라있었다.
남아있는 이들도 그저 황자와 황태자들마저 포로로 붙잡지 않고 그대로 죽여 버리는 마족들의 작태에, 항복해봐야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활로가 하나 뚫렸다.
마왕군이 성문을 열어젖히기 전에 먼저 성문을 열고 그들을 맞이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만큼은 목숨을 부지시켜주겠다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라 곧 도시 전체에 불어 닥칠 역병마저 치료해주겠다니.
프랑크로서는 전혀 거절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이! 어째서 아무도 받지 않는 것이냐!”
그렇지만 상행과 달리 안쪽에서 성문을 여는 것은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경비대장을 매수하고 휘하의 경비대까지 설득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바깥을 감시하고 있는 병사와 장군들의 눈까지 가려야하는 일이었다.
실패하면 그대로 붙잡혀 궂은 고문을 당하게 되는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쪽은 누군가?]
“아!”
그렇게 한참을 수정구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던 프랑크는, 곧 의심 가득 찬 목소리로 연락을 받은 누군가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것은 평소 그가 사용하던 셀파스트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놈이 아닌, 저와 마찬가지로 마족의 세작으로 활동한 모두와 연락을 나눌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저쪽에서 의심을 품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혹 지난 닷새간 끌려간 이들 중에, 고문에 못 이겨 지난 사실을 털어놓은 멍청이가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자칫하면 이 모든 게 세작들을 끌어들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거, 걱정하지 마라. 난 아직 붙잡히지 않았으니까. 그보단 그쪽도 그리고 지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도 모두 제안을 받았을 거라 생각한다.”
[으음….]
프랑크는 금방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최대한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보를 꺼내들었다.
뒤이어 처음 연락을 받았던 남자를 비롯해 몇몇의 침음이 들려왔다.
역시 다들 얘기는 안 해도 상황은 잘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우려대로 누군가 이미 황성에 붙잡혀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일전의 제안은 바로 직전에 내려온 것이었다.
혹 수정구를 빼앗겼다고 하더라도, 그 조심성 많은 늑대인간 놈이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정보를 흘렸을 리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얼마나 추궁을 당했던가.
그렇다는 건, 제안을 받은 이들은 아직까진 세작임을 들키지 않은 이들일 것이란 소리였다.
“빙 둘러 말하지 않겠다. 같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나? 다들 눈치 챘겠지만 제국은 이미 끝났다. 그놈 말대로 역병이 퍼지고 있어. 황성은 어떻게든 쉬쉬하려는 모양이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정하려면 빨리 정해야만 했다.
물론 제안을 받은 이들 중에 누군가 홀로 배신하고 황성에 밀고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까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결국 마왕군이 성문을 직접 열고 나면 모두 죽을 운명인 건 마찬가지였다.
저만 살겠다고 밀고하는 작자도, 결국 마족 놈들의 손에 붙잡혀 갈가리 찢어져버리리라.
프랑크는 지금 수정구를 비추고 있는 이들 모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을 만큼 멍청한 놈들은 아니리라 믿었다.
그 늑대인간 놈들이 붙잡았던 상단 모두에게 세작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뿌리진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여기 있는 모두 어느 정도 잔머리가 굴러가는 이들일 확률이 높았다.
[…동참하지. 같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놈들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단 낫겠지.]
“다들 훌륭한 선택이다.”
프랑크는 이내 짧은 고민을 마치고 우후죽순 동참할 의사를 표하는 이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연 몇 명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를 들어서는 대강 열댓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어느 쪽을 택하느냐로군.]
“확실히….”
세 성문 중 어느 쪽을 매수해 열어젖히느냐.
섣불리 세 곳 모두를 찔러보았다간, 거절당한 쪽에서 낌새를 느끼고 다른 곳의 계획마저 무너질 수 있었다.
[그거라면 제가 알아서 하지요. 한쪽에 꽤 친분이 두터운 자가 있으니 말이오. 자세한 건 다들 위쪽에서 전해 들으시게.]
“그거 다행이군!”
하지만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랑크는 명쾌하게 결론을 지어준 누군가의 향해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고선 이내 수정구를 꺼트렸다.
남은 건 살아서 이 지옥을 떠나는 것뿐이었다.
* * *
“에릭, 에릭!”
깊은 밤.
막사에 누워 잠을 청하려던 나는, 들뜬 목소리로 천막을 젖히고 들어오는 셀파스트를 보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셀파스트.”
“안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였어. 동문을 열어주겠다는 모양이야.”
“…그게 정말인가?”
졸린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난,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여진 제안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도시 안쪽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 모양이군.
뭐가 됐든 잘 된 일이었다.
“훌륭하군. 그래서 언제 열어주겠다던가?”
“그건… 일단 매수를 해봐야겠다는데?”
“…뭐?”
나는 이어진 대답에 어이가 없어 눈살을 팍 찌푸렸다.
아직 성문을 맡은 경비대가 매수되지도 않았는데, 그걸 또 보고하러 왔단 말인가?
“아! 정확히 말하자면 경비대는 매수가 끝났는데, 그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이 문제인 모양이야.”
뭐야, 그런 거였나.
난 구겨진 내 표정을 보고선 황급히 말을 잇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길어야 이틀 안에 결판이 나겠군. 좋아, 수고했다 셀파스트.”
“뭘, 이 정도야.”
나는 할 말을 마치고선 곧바로 손을 흔들며 천막을 나서는 녀석을 데려다주고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겠어.
아무래도 역병이 다 돌기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