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이런 젠장! 씹어죽일 마족 놈들, 겁쟁이처럼 멀리서 마법만 쏘아대기는!”
성벽을 둘러싼 마왕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무한히 재생되는 방어막을 믿고서 투석기로 바위를 날리며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도시에 틀어박히기 전, 가능한 많이 구해다 쌓아놓았던 바위들이 이젠 말라가고 있었으니까.
길어야 이틀.
이후부턴 직접 군을 내보내 싸우든, 삼면에서 날아오는 마법에 벌벌 떨며 제 머리 위에 박히지만은 않기를 빌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제프 경,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진행 중인 의식을 끝마치기 위해선 못해도 나흘은 더 필요했다.
이마저도 전염병이 돌지 모른다는 동문 지휘관의 말에, 군중들의 의혹을 살 것을 각오하고 조금 무리한 수를 빼돌려 제물로 바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이상 제물의 수를 늘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조만간 한 번 일이 터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일부턴 병력을 한쪽으로 몰아, 밖에서 시간을 좀 끌어야겠군. 그리하면 지금 남아있는 바위로도 앞으로 사흘은 버틸 수 있을 터. 그리고 마지막 하루는….”
가제프는 나지막이 침음을 흘리며 뒷말을 줄였다.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 중 한쪽이라도 직접 나가 사흘을 버티는 것조차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만일 어찌 잘 버텨낸다고 해도, 병사들은 바닥을 치고 있겠지.
남은 하루는 그저 성벽과 그를 둘러싼 방어막이 어떻게든 버텨주기만을 신께 기도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츠 대주교. 그보다 의식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의식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저 제물이 없어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
대주교는 가제프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황성 지하를 내려다봤다.
그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제단의 연못에는, 벌써 절반이 넘는 핏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빈곳을 전부 채우고, 순결한 사제 넷이 차례로 그곳에 몸을 던지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넘친 피가 연못을 둘러싼 마방진 모양의 홈을 모두 붉게 물들이고 나면, 드디어 위대한 분께서 현신하실 수 있었다.
“알겠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저벅-
“가제프 님, 오셨습니까!”
“그래. 다들 전염병에 걸린 포로들의 처분은 어떻게 됐지?”
“예! 북문, 잿더미조차 남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전부 불태워 없앴습니다!”
“서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성을 나와 지휘관들이 모여있는 건물로 들어선 가제프는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를 올리는 그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북문과 서문은 아직까지 별 문제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대단한 역병이라고 한들, 그를 퍼트릴 새도 없이 전부 불살라버리면 그만이었다.
혹 전염병에 관한 얘기가 돌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까 사실을 통제한 터라 포로들의 시체를 다짜고짜 태워 없애는 병사들을 향해 사자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는다며 손가락질이 날아들긴 했지만, 매립시키면 저들이 지낼 땅이 좁아질 거라 얘기하니 딱히 폭발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은 건 이제 지금껏 해온 그대로 시체들만 빠르게 처리한다면…
“잠깐, 동문은? 동문은 어떤가. 설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잠시 잡생각에 빠져들던 가제프는, 홀로 대답을 잇지 못하는 동문 지휘관을 보고선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말이 없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동문도 시체들의 처리는 확실하게 했으나….”
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여는 장군을 보며, 눈살을 팍 찌푸렸다.
빌어먹을, 그러니 꼭 제때 늦지 않게 처리하라고 그리도 일렀거늘!
“도대체 거기서 무얼 하고 있던 거냐! 어찌 시체를 모아 그 자리에서 태우는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해서, 도시에 역병을 들인단 말인가!”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가제프 님! 분명, 분명 시체는 모두 그곳에서 불태워버렸습니다! 정말입니다!”
가제프의 질책에 지휘관은 억울한 표정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와 동문의 병사들은 지시받은 대로 곧장 시체를 태워 없앴다.
다만 그들은 역병의 전염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한데 모으고, 길가에 튄 피와 살점을 닦아내는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역병이 퍼져버렸다는 걸 말이다.
북문과 서문도 약간의 시간차만 있을 뿐, 이제 곧 사방에서 역병에 걸린 자들이 튀어나올 터였다.
그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차고,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부르짖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래서 역병에 걸린 놈은 어떻게 됐나?”
“이, 일단 따로 경비대 건물에 가두어두었습니다.”
“멍청한 놈! 잡았으면 바로 죽여서 불태워버리든 했어야지, 어쩌자고 그걸 살려뒀나! 그렇지 않아도 병사 하나하나가 귀중한 이 판국에, 그들 사이에서 역병이라도 돌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가제프는 역병에 걸린 이를 병사들이 머무는 경비대 건물 안쪽에 가두어놨다는 지휘관의 말에, 입술을 꾹 씹었다.
“태워라.”
“예, 예! 바로 불태우겠습니다!”
지휘관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분노를 꾹꾹 억누르고 있는 그를 보며, 사색이 되어선 자리를 뛰쳐나갔다.
“북문, 서문도 잘 듣도록. 앞으로 역병에 걸렸다 의심이 가는 이가 있다면, 그 자리에 곧장 끌고 가 태워버리도록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병사나 기사라면 따로 격리해 하루를 보낸 뒤, 군의 머리에 배치해 돌격시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가제프는 앞서 동문을 맡은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밖으로 나서는 둘을 보고선,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성내의 누군가가 병에 걸려버린 이상, 역병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문제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의식이 완성되기까지 앞으로 나흘.
아무리 플러그가 끔찍하리만큼 높은 전염성과 사망률을 가지고 있다한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을 때까진 꽤 시간이 있었다.
만일 모두가 역병에 걸린다 해도, 당장 전력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터.
“가, 가제프 경?”
“대주교는 안에 있나?”
“그, 그것이… 아직 지하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다만 문제는 의식이었다.
제물로 바쳐져 그 피로 연못을 채우는 이들이야 상관없었지만, 끝에 몸을 던진 수녀들에겐 꼭 순결해야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과연 역병이 순결함을 해치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여신이 내세우는 조건들은 다 까다롭기 그지없었으니까.
만일 평소 교단의 성녀에게 주어지는 순결함이라는 덕목이 그 순결함과 같다면, 애써 준비한 의식이 망가질 수도 있었다.
단순히 얼굴에 상처가 나는 것만으로도 순결하지 못하다 흠이 잡히곤 했으니까.
“프란츠 대주교.”
“…가제프 경? 어쩐 일로 돌아오셨습니까?”
사제의 말에 따라 곧장 황성 지하를 찾은 가제프는, 연못 앞으로 제물들을 옮기고 있는 이들을 부리는 프란츠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시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네.”
“예? 하지만 분명 시체를 모두 태우고 계시다고….”
“멍청한 지휘관 놈이 손을 늦게 쓴 모양이야.”
대주교는 청천벽력 같은 가제프의 말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언젠간 터지리라 예상하곤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역병이 돌기 시작할 줄은 몰랐다.
플러그의 악명은 그 또한 익히 들어본 바 있었다.
도시에 한 명이라도 역병이 돌기 시작하면 사흘에 반절, 칠일이 지나면 대부분이 검은 반점을 달게 된다고 했던가.
“…알겠습니다. 일단 마지막에 바칠 사제들은 더욱 신경 써서 관리해야할 듯싶군요.”
“그래, 부탁하지. 혹시 모르니 다들 방을 좀 떨어트려놓는 것도 좋겠군. 만에 하나 한 놈이 역병에 걸리더라도 나머지는 무사할 수 있게 말이야.”
가제프는 그리하겠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는 프란츠를 보고선, 곧바로 등을 돌려 황성 밖으로 나섰다.
이미 역병이 돌기 시작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주의를 주는 것밖에 없었다.
당분간 병사들은 모두 황성에 들어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야될 것 같았다.
* * *
“에릭… 아니, 혈마왕님!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 도시 안쪽에서 말인가?”
전사자들의 시체를 하나씩 묻어주며 남은 병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에릭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달려온 셀파스트를 보고선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그래. 아무래도 슬슬 역병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야. 오늘 군을 물리고 나서 머잖아 경비대가 시민 한 명을 잡아갔다더라고. 얼굴은 자세히 못 봤지만, 목 부근에 검은 반점이 나있던 건 확실하다는 것 같아.”
나는 내 옆에 붙어 소곤대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드디어 역병이 돌기 시작했단 말이지.
“알겠다. 그럼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도 괜찮겠군. 고생했다. 혹시 또 다른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지금처럼 바로 알려주도록.”
“걱정 마. 전투 중이라도 달려가 줄 테니까.”
“그거 든든하군.”
도시에 역병이 돈다.
저들은 어떻게든 그 사실을 숨기려 들겠지만, 언제까지고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 늦어도 모레.
머잖아 도시 안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겠지.
밖에선 계속해서 마왕군이 성벽을 두드리고 있는데, 안쪽에선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니.
분명 살기 위해 어떻게든 성문을 열어 도망치려는 이가 나올 터였다.
“북쪽과 서쪽에도 얘기를 해놔야겠군.”
그럼 우린 성문을 열어주는 자에 한해 해치지 않고 오히려 역병까지 치료해주겠다 약속만 하면 끝이었다.
물론 그간 포로들을 다뤄온 행적이 있으니 쉽사리 믿고 밖으로 나서진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한둘쯤 혹하는 이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걸로 제국도 끝이로군.”
성문이 열리면 거기서 더 볼 것도 없었다.
제국은 곧 마왕군의 손에 떨어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