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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70화 (170/200)

제170화

“마족 놈들이 물러간다!”

“허억, 헉… 드디어! 살았어, 살았다고!”

성벽 위에 올라 열심히 바위를 나르던 병사들은 슬슬 물러나기 시작하는 마족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천에 뜬 해가 아직 내려오지도 않았지만,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로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들보다 몇 배는 많은 적들이 성벽을 둘러싼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손이 부르트라 시위를 당기고 무거운 바위를 여럿이서 옮기는 것밖에 없었기에, 여느 전투 때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 탓이었다.

물론 그래도 성문을 열고 나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나았지만 말이다.

“이제 고작 하루를 버텼을 뿐이다! 다들 늘어지지 말고 당장 부서진 부분을 보수할 수 있도록!”

지휘관은 축 늘어진 병사들을 다그치며 부서진 성벽의 보수를 알렸다.

마법도 포로들을 가둔 철창도 모두 성벽을 넘어 쏘아졌지만, 개중에 몇몇은 성벽을 맞춘 것도 있던 탓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대부분 방어막에 막혔으니 큰 피해는 없었지만, 금이 가고 조금 부스러진 부분들이 쌓이고 쌓여 거대한 성벽을 무너트리는 법이었다.

앞으로 며칠을 더 버텨야할지 모르는데, 이런 건 시간이 날 때 빨리 빨리 보수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은 좀 어떤가?”

“아, 가제프 님!”

그는 제 명령에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병사들을 뒤로하고, 이곳 동문의 상황을 살피러 온 가제프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군데군데 부서진 곳이 조금 있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병사들도 열 명 남짓을 제외하곤 다들 멀끔하고 말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음?”

북문에서부터 서쪽을 돌아 마지막 동문에까지 도착한 가제프는, 끝에 가서 말 꼬리를 줄이는 지휘관을 보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두 곳보다도 더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잠시 자리를 옮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족 놈들이 철창에 가두어 날린 포로들에 대한 얘깁니다.”

“…일단 들어가지.”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으며 조용히 입을 떼는 상대를 보고선,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들어선 곤란해질 만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제프의 경험상, 그런 건 대개 쉬이 넘길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끼익-

“그래. 문제가 뭔가.”

금방 지휘관을 따라 적당한 건물 안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상석에 앉아 귀를 열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마족 놈들이 전염병에 걸린 포로들을 날려 보낸 것 같습니다.”

“…전염병?”

가제프는 지휘관의 입에서 나온 얘기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전염병이라니, 그게 무슨…

“아! 이, 이런….”

그러기도 잠시.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동그랗게 눈을 뜬 그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꾹 씹었다.

그래서였나.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포로들을 집어던지나 했건만.

“빌어먹을, 당했군.”

가제프는 자신의 실책을 탓하며 이를 악물었다.

떨어지면서 포로들이 완전히 박살난 데에다가, 혼란에 빠진 군중을 잠재우기 위해 빨리 시체더미를 처리하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게 전염병에 걸린 포로들을 날려 역병을 퍼트릴 생각이었다니.

단순히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함인 줄 알았건만.

“지독한 놈들 같으니….”

수도 하나에 몰려 웅크린 제국군과 마왕군과의 병력 차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다섯 배 남짓했다.

그마저도 숙련된 병사들만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닌, 창칼을 잡을 수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무작정 군에 밀어 넣은 상태임에도 그랬다.

상대방 입장에선 어느 정도 손해만 감수한다면 언제든 성벽을 무너트리고 도시를 유린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수를 들고 올 줄이야.

침착한 건지, 가능한 병력의 손실을 줄여보고 싶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제국의 입장에선 참 난처한 일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력으로 부딪쳐왔다면 끊임없이 재생하는 방어막을 믿고서, 마왕군에게 적지 않는 타격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병사들만 몇 잡고 만 꼴이었다.

“어쨌든 알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포로들이 떨어질 때마다 곧장 태워버려야겠군. 지금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모아놓은 자루들을 다 태워야겠어.”

금방 상황파악을 마치고 결단을 내린 가제프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투 중에 병력을 빼 시체를 태우고 앉아있을 순 없으니 잠시 한곳에 쌓아두었던 자루들을 모두 처리하러가기 위함이었다.

가능한 전염병이 더욱 퍼지기 전에 빨리.

“아! 혹시 그 전염병이 무엇인지도 알겠던가?”

그렇게 건물을 나서던 가제프는,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간 생각에 우뚝 멈춰 서며 지휘관을 돌아봤다.

포로들이 전염병을 달고 있었다고는 해도, 어쩌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혹시 역병이 돌더라도 미리 치료약을 구비해놓을 수 있을 터.

아무리 마족 놈들이라도 대륙에 도는 전염병의 증세와 치료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잘만 이용하면 놈들의 노림수대로 역병이 도는 척 연기해,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저쪽도 괜한 병력 손실을 감수할 필요 없이, 이쪽이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게 될 테니까.

“…사제들이 말하길, 플러그라고 하더랍니다.”

“뭐, 뭣?”

하지만 지휘관의 입을 통해 병명을 전해들은 그는, 이만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플러그.

한때 제국 서부를 휩쓸고 깊은 상처를 남긴 역병.

큰 도시에 너덧 명만 감염자가 발생해도 일주일 만에 대부분 시커먼 반점을 달게 된다는 끔찍한 전염율을 가진 녀석은, 걸리기만 하면 절반 이상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치, 치료법은? 설마 없지는 않겠지?”

“예, 예. 치료법을 알고 있던 자가 있긴 합니다만….”

천만다행이군,.

눈앞이 캄캄해지려던 찰나.

가제프는 지휘관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의 푹 내쉬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치료법이 밝혀져 있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합니다만?”

“그, 그것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계속해서 말 꼬리를 늘이는 그의 모습에 다시금 불안감을 느낀 가제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설마, 치료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이를 테면 수도에선 약재를 구할 수 없다던가…

“…역병이 수그러들 때까지 청결을 유지할 것.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쿵-!

그는 절망적인 대답에 꾹 쥔 주먹으로 문을 쾅 두드렸다.

청결을 유지하라니.

제국이 멀쩡한 상태였더라면 적당히 금화를 풀어 빈민들을 잠시 도시 밖으로 내보내든 사제들을 대거 고용하든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지만, 지금 만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디 안켈하임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인원이 도시에 꽉 들어차 있는 상태였으니까.

집도 식량도 한참 모자라 절반 가까이가 거리에 나앉아 쫄쫄 굶어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인원들을 통제하고 청결을 유지시키라고?

“…다들 황성으로 돌아간다! 장군, 내 대신 북문과 서문에 시체를 태우라 전할 수 있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가제프는 심각한 얼굴로 지휘관에게 일을 맡기고선, 곧바로 데리고 온 병사들을 이끌고 황성으로 향했다.

조금 수군거림이 더해지더라도, 의식에 필요한 제물들을 빠르게 채울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 * *

“다들 수고했다. 보초를 설 인원들만 남고, 모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예, 마왕님!”

포로들을 가둔 철창을 대략 스무 개쯤 던져놓고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지금쯤이면 도시 안에 심어놓은 세작과 연락을 나누고 있을 셀파스트를 찾아 천천히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사락-

“셀파스트.”

“…잠깐, 나중에 다시 연락하마.”

툭-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첫날이니까 말이야. 어차피 역병이 퍼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벌써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지.”

나는 내가 들어오기 무섭게 연락을 끊고 수정구를 집어넣는 녀석을 보며,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안쪽 상황은 좀 어떻지?”

“아직까진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사상자도 거의 없이 첫 공격을 막아낸 셈이니까.”

“뭐, 그렇겠지.”

그거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은 사들뿐이긴 해도 거의 천 명 가까이 쓸려나갔는데 축제 분위기가 아닌 편이 더 의아할 따름이었다.

“잘 막아내긴 했어도 아직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니까. 게다가 놈들도 언제까지고 던져댈 바위가 남아있진 않으리란 건 알고 있는 거겠지.”

“흠, 그런가. 그보다 다른 쪽은 어떤가. 부탁한 대로 잘해줬으려나 모르겠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던데? 북쪽도 서쪽도, 다 멀리서 마법만 열심히 날려댄 모양이야. 특히 악마왕이 이끄는 서쪽은 철창을 거의 오십 개는 떨어트렸다나?”

“…그거 훌륭하군.”

나는 마왕들이 생각보다 계획대로 잘 따라줬다는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쪽은 몰라도 악투스와 발록들은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뛰쳐나가진 않았을까 싶었는데, 꽤 의외로군.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무래도 안쪽에 우리 계획을 눈치 챈 녀석이 있는 모양이야. 동문은 중간부터 시체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불태워버렸다 하더라고.”

“상관없다. 놈들이 눈치 채든 말든 시체를 태우든 말든, 결국 전염병이 도는 걸 막을 순 없을 테니까.”

저들이 계획을 눈치 챈다고 문제가 생길 거였다면, 애초에 들킬 일이 없도록 포로들의 피부를 가리던 도려내던 미리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포로들이 걸린 역병, 플러그는 안다고 해서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특히 저렇게 도시 하나에, 집이 모자라서 거리에까지 사람들이 우글우글 거리는 상태에선 더더욱 말이다.

“우린 계속 오늘처럼만 하면 된다.”

도시에 전염병이 돌 때까지.

그리고 버티다 못한 시민들이 성문을 비집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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