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자네, 그 소문 들었나? 어제 황제폐하의 명이라고 끌려간 상인들 말일세. 아직 황성에서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라더구만!”
“그걸 왜 못 들었겠나. 지금도 곳곳에서 남편 잃은 아낙들의 신음이 끊이질 않는데.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지금 성벽밖에는 마족 놈들이 진을 치고서 우글거리고 있는데 말이야. 뭐든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마족 놈들이 안켈하임을 둘러싸고 주둔지를 세운 다음 날.
그렇지 않아도 도시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맞추기 위해 제 부모, 제 자식을 떼어놓고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은, 지난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정숙, 정숙! 어제 각출한 인원들은 머잖아 돌아올 겁니다. 그저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마족이 있을까, 직군별로 나누어 면밀히 조사를 하고 있는 것뿐이니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십시오!”
병사들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좌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무지렁이 같은 일반 백성들과 달리, 끝내 버려지지 않고 안켈하임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귀족이거나 못해도 각 지방에서 알아주는 거부들 뿐이었다.
지난 전쟁 동안 보고 들은 것이 얼만데, 마족을 색출해내는 게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마족이 아닌, 마족과 결탁한 이들을 잡아내고 있다. 단순히 마족을 색출해내고 있다고 둘러댄 것은, 군중의 분노를 달래고 그와 손을 잡은 배신자들이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프란츠 대주교는 황성 안쪽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리 읊조렸다.
의심 많은 귀족들을 눈을 속이기 위해선, 이렇게 한두 번은 얘기를 꼬아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를 덮어놓은 구덩이 위에 비교적 들키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만한 흠을 놓아두는 편이 좋았다.
깊이 파놓은 구덩이에 시체를 묻고선 그 위에 또 동물 사체를 묻는다면, 혹여 누군가 구덩이를 발견하더라도 동물 사체를 묻어놓았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 말이다.
“진짜는 의식에 필요한 제물들을 모으고 있는 건데 말이지. 허허.”
프란츠는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만 군중들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어제 불러들인 상인들 중 일부만 제물로 잡아들이고 나머지를 모두 풀어준다면, 저 헛똑똑이들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마족과 결탁한 배신자들이었으리라 생각하며 넘길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리 오래 속이진 못할 터였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저들이 진실을 깨달을 때쯤이면, 이미 모든 의식이 끝나있을 테니까.
“여신이시여.”
그는 군중들 사이사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귀족들을 비웃으며, 이만 등을 돌렸다.
“미천한 종이 곧 당신을 뵙겠나이다.”
황성 안쪽.
프란츠는 그 커다란 건물의 지하를 내려다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의식은 순조롭게 진행중이었다.
앞으로 길어야 열흘이었다.
* * *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
“예, 마왕님. 모두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시 북쪽에서 회의를 마치고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하룻밤새 준비를 끝마친 병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훌륭하군. 셀파스트, 도시 안쪽은 좀 어떻던가.”
“제국 놈들도 아무런 생각 없이 안쪽에 틀어박힌 건 아닌 거 같던데? 어제부터 조사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조금씩 잡아들이고 있다는 모양이야. 물론 대부분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몇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나?”
나는 미리 구슬려놓은 세작들을 통해 도시 안쪽의 정보를 전해 받은 셀파스트의 얘기를 들으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역시 무언가 꿍꿍이가 남긴 남은 모양이었다.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보니, 또 제물을 바쳐서 무슨 의식을 치르려는 건가.
뭔지는 몰라도 가능한 서두르는 게 좋겠군.
“셀파스트! 마왕님의 앞에서 그게 무슨 추태인가. 이래서 못 배운 똥개들은….”
“하.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정작 에릭 본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데, 왜 아랫놈이 이렇게 나서는 건지.”
“뭐, 뭐? 이 빌어먹을 늑대인간 놈이!”
“조용.”
난 셀파스트의 태도에 얼굴을 붉히는 사천왕들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아직 완전하진 않다곤 해도 일단은 나를 마왕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있긴 했지만, 이건 별개의 얘기였다.
아니, 오히려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셀파스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녀석이 괴짜라고는 하나, 다른 종족도 아니고 우리 뱀파이어들과 앙숙인 늑대인간이었다.
그런 놈이 저들의 마왕한테 저리 경거망동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당사자인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이대로 두어선 안 될 거 같았다.
“적진을 앞에 두고서 같은 편끼리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 일단 모두 자리로 돌아가도록. 서쪽과 북쪽의 준비가 끝난다면 바로 돌격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셀파스트, 넌 잠시 자리에 남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락-
나는 천막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서는 뱀파이어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장은 잘 참아주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머잖아 곧 폭발할 듯싶었다.
그전에 바로잡아놓아야겠지.
빌어먹을, 이전엔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마왕이라는 자리가 참 유용하고 편하긴 했지만, 단순히 싸우고 계책을 짜는 것 외에 신경 써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셀파스트.”
“하하… 미안. 앞으로 남들이 보는 앞에선 좀 자중하도록 할게.”
“…꼭 좀 부탁하지.”
난 뱀파이어들이 모두 나가고 남은 천막에서 바로 사과를 건네는 그를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런 짓을.
뭐 왜 그랬는지는 알 거 같았다.
그저 조금 골려줄 셈이었던 거겠지.
별종이라고는 하나 늑대인간은 늑대인간.
마계에 있을 적부터 그들과 부딪히며 쌓인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래도 마음 같아선 머리라도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었지만,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다.
지금껏 꽤 많은 도움을 받아오기도 했고, 지금도 도시 내부의 상황을 대충이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건, 전부터 제국의 귀족들을 살살 구슬려온 그의 수완 덕분이었으니까.
“그보다 전에 얘기했던 그건 어떻게 됐지?”
“안쪽에서 몰래 성문을 열어주는 거 말이지? 아무래도 그건 힘든 모양이야. 불안한 건 성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지금껏 마왕군이 포로들을 상대로 취해온 입장이 있으니까 말이야. 문을 열고 투항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럴 바에 차라리 맞서 싸워라도 보겠다고.”
“그런가.”
확실히, 포로들의 처우가 별로 안 좋긴 했지.
처우가 어떻고 저떻고 얘기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대부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모두 죽인 것은 또 아니었지만…
조금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건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니었으니까.
마족들이 원하는 것은 이 중간계에 있는 자원들이었다.
포로라고 괜히 살려둬 봐야, 그 아까운 자원을 같이 좀먹을 뿐이었다.
더구나 포탈을 타고 넘어온 데다가 함부로 마계와 이어진 통로를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없으니만큼, 뒤에서부터 계속 물자를 지원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지나오는 곳마다 포로들을 전부 살려둔다면?
당장 군이 소모할 군량조차 모자라질 터였다.
“하는 수 없군. 그래도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또 마음이 바뀌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계속해서 연락은 해보도록.”
항복을 하나 싸우다 붙잡히나 달라지는 게 없다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곳에 기대어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이렇게나 불리한 상황에도 병사들 중에 배신자가 나오지 않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얘기일뿐.
곧 전투가 시작되고 그나마 있던 가능성도 전부 사라져버린다면, 과연 그때도 버티고 서있을 수 있을까?
그들은 머잖아 차라리 성문을 열고 곱게 목을 내주는 편이 더 좋으리라는 걸 깨닫게 될 터였다.
“뭐,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그럼 필요할 때 다시 부르라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는 셀파스트를 보고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다른 쪽도 준비가 됐을 터였다.
준비라고 해봐야 벨제붑의 군대가 끌고 온 투석기 하나를 북쪽으로 옮기고, 내가 끌고 갔던 포로들을 잘 옮겨놓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형님!”
난 셀파스트가 나서기 무섭게 천막을 젖히고 들어온 발라크를 보고선, 때가 됐음을 깨닫고 장비를 챙겼다.
“서쪽과 북쪽 모두 준비가 완료됐답니다.”
“좋다. 카렌! 그들에게 전하도록. 지금 바로 시작하겠다고.”
“음! 알았다.”
근처에서 수정구를 통해 교신을 보고 있던 카렌은,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장 반대편에 신호를 보냈다.
“다들 모였나? 출정이다!”
“와아아아아!”
“출정이다! 다들 대열을 갖추고 진격하라!”
쿵- 쿵-
북소리와 함께 수많은 병사들이 천천히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땅을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기분좋게 울렸다.
“가제프, 프리디리히.”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와 황제.
머잖아 둘은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죽여 달라 빌게 되겠지.
물론 그런다고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평생, 내 아래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었다.
사지가 갈고리에 꿰여 저 천막 안쪽에 가두어진, 세 마리 짐승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