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의식만 성공하면 다 죽일 수 있을 거라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오히려 괜히 자랑스러운 황실기사단과 마도사단만 잃고, 저 더러운 마족 놈들은 멀쩡히 살아서 수도 앞까지 밀려들었지 않소!”
“그래서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지금 내 탓이라는 거요? 그땐 다 같이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하지 않았소! 아니,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서쪽 전선에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만한 병력은 남겨놔야 된다고 했던 후작의 잘못 아니오! 실제로 그 이방인들을 이용해서 마왕을 셋이나 잡았던 것도 사실이니, 실상 조금만 더 병력에 여유가 있었다면 다 정리할 수 있었지 않았겠소? 누가 제 영지가 마족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거요!”
“이, 이… 지금 말 다했소!”
제국의 수도, 안켈하임의 중심.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황성에 모인 대신들은, 막막한 상황에 제 본분조차 잊은 채 서로 잘못을 떠넘기기 급급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가.”
왕좌에 올라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때 대륙의 절반 이상을 거느리던 부강한 제국은 이제 없었다.
남은 거라곤 이 안켈하임과 고작해야 백만도 되지 않는 제국민들과 오십만 남짓한 병사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기 위해, 늙고 병든 노인들을 쳐내고 아이들을 버려가며, 당장 창칼을 쥘 수 있는 이들을 긁어모아 강제로 징집한 수가 반이었다.
“황제폐하, 당장 결단을 내리셔야합니다! 이대로 있어봐야 저 더러운 마족 놈들의 발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말 뿐입니다! 부디 여신님을 이 땅에 현현시키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여신의 현현.
황제는 이방인들에게 제물을 먹여 마왕군을 쓸어버리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로, 계속해서 그리 권유해오는 대신들을 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멍청한 놈들 같으니.
지금 저들이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실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들 주제에.
그는 전대 황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을 적에 들었던 제국의 은밀한 비밀을 떠올렸다.
제국의 건국 이래, 계속해서 국교로 자리 잡고 있었던 교단의 실체.
지금은 자비와 박애의 이름으로 덧칠어진 그들의 뿌리는, 본디 제국이 아직 약소한 왕국이었던 시절에 온 대륙에서 박해받던 사교의 것임을 말이다.
여신.
교단이 믿고 따르는 그 자애로운 여인조차, 실은 사교의 무리들이 따르던 악신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 초월적인 존재들에 있어 선과 악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저 가능한 많은 이들이 저를 숭배토록 하고, 그에 도움이 될 신도들에게 제 힘을 나누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약소한 왕국은 힘이 필요했고, 박해받던 사교는 신도들이 필요했다.
그들은 성공했고 왕국은 제국이 되었으며, 사교는 국교가 되어 다른 모든 교단을 이교로 공포해 몰아낸 채 홀로 남아설 수 있었다.
그것이 제국과 교단에게 얽힌 설화였다.
“부디 의식을 허락하여주십시오!”
황제는 어느새 모두 엎드린 대신들과 그들의 뒤에서 고개를 숙인 대주교를 바라보며, 꾹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여신이 이 땅에 강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자기라고, 교황과 성녀라고 그런 방법이 있는 줄 몰라서 안 써먹고 있던 게 아니었다.
저 늙어빠진 대주교가 대체 어디서 그 의식에 대해 알아온 건진 모르겠지만, 여신의 강림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했다.
괜히 성녀에게 잠시나마 성역을 선포하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었다.
본디 여신을 강림시키는 의식은 성역이 선포되어있음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대륙은 여신의 존재 자체를 버틸 수 없을 만큼 나약했으니까.
헌데 성녀가 마족 놈들에게 붙잡힌 이 시점에서 여신을 부른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역 위에 강림한 여신은 그 바깥으론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적들이 낌새를 느끼고 도망치면 끝이었겠지만 말이다.
“폐하!”
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여기서 거절했다간 의식이고 뭐고, 당장 제 목부터 쳐버릴 기세였다.
“…좋다. 의식을 준비하라.”
황제는 그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말마따나, 이젠 더 이상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대책을 강구할 시간조차 없었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다들 의식을 준비하라!”
그는 자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사불란히 움직이는 대신들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애초부터 자신이 어떻게 나오든, 오늘 기필코 의식을 진행시킬 생각이었던 듯했다.
만일 또 거절했었다가는 정말로 목이 잘려나갔겠지.
“…가제프 경.”
“예, 폐하. 말씀하시지요.”
황제는 제 옆에서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던 가제프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대주교께 얘기를 전해 듣길, 의식이 모두 진행되기 위해선 닷새가 필요하다 하시더군요.”
가제프는 그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 또한 가늠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저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나마 잡아채기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볼 뿐이었다.
“부탁하오.”
황제는 이내 밖으로 나서는 그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성공하면 여신의 강림과 함께 모두 쓸려나갈 것이다.
반대로 의식이 실패하면 제국은 마족들의 발아래 짓밟히고 말겠지.
결과가 어찌됐든 제국의 최후는 정해져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저 간악한 마족 놈들이라도 길동무로 삼는 수밖에.
그는 푹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저 멀리 보이는 성벽 너머를 지그시 바라봤다.
* * *
“으하하! 에릭, 잘 있었나? 신수를 보아하니 그런 거 같구만! 몇 주 사이에 제법 정말로 마왕다워졌어.”
“뭐, 그렇지.”
안켈하임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주둔지를 펼친 다음날.
도시 북쪽에 도착한 악투스의 군세가 있는 곳으로 향한 나는, 벨제붑을 포함한 그들 네 마왕과 마주했다.
“오랜만이군, 벨제붑.”
“…소식은 들었다만, 직접 보니 더욱 놀랍군. 정말로 그 애송이가 체르페슈의 뒤를 잇다니.”
이내 미리 준비된 막사에 모여 안켈하임의 공략을 위한 회의를 앞둔 나는, 사뭇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벨제붑을 보며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제 소중한 부하들을 죽이고 다른 작전지로 떠났던 녀석이 이젠 저와 같은 마왕이 되어 나타났으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닐 터였다.
“자, 기 싸움은 그만들 하고 어서들 자리에 앉지. 자잘한 불만이야 중간계를 완전히 정복한 후에 따져도 되는 거 아니겠나. 일단은 저 성벽부터 어떻게 할지 얘기를 좀 나눠보자고.”
악투스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주억인 벨제붑은, 이만 자리에 앉아 제 뒤에 선 부관을 돌아봤다.
스륵-
“서쪽의 지도다. 시간이 없어 일단은 조잡한 대로 완성시켰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적어도 이쪽에서 둘러본 성벽들에는 다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있었다. 꽤 튼튼한 방어막이 저 거대한 도시를 전부 둘러싸고 있는 것 같더군. 생각 외로 공략이 쉽진 않을 거다.”
곧 그에게서 간략하게 지형을 표시해둔 지도를 받아 책상에 올린 벨제붑은, 진지한 얼굴로 성벽을 나타낸 그림을 짚었다.
“어머, 악마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의외네. 그쪽의 마법으로도 부술 수 없는 건가?”
“부술 수는 있지. 다만 마법진의 형태를 보니 우리 마족들의 것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분명 수복과 관련된 술식으로 보이는 것이 짜여있었다. 한마디로 방어막을 부순다한들, 다시 저절로 고쳐질 거라는 얘기지. 물론 그 텀이 얼마나 되는지, 언제까지 수복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흐응… 그러면 일단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편이 좋겠지. 그래서 해답은?”
“그걸 구하려고 이렇게 모인 거 아닌가.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릴리스는 벨제붑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해답이라.
그거야 이미 나와 있지.
물론 이게 100점짜리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벨제붑. 부탁했던 건 다 끌고 왔나?”
“…그 투석기 말이냐. 그런 걸 어디에 쓰려고 부탁한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주둔지까진 가지고 왔다. 헌데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 혹시 그게 네가 생각한 해답의 열쇠라도 되는 건가?”
그야 당연한 소리를.
나는 그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필요도 없는 걸 괜한 수고를 끼치면서까지 가지고 와달라고 했던 건 아니니까. 발라크!”
“예, 형님.”
스륵-
이내 내 뒤에 서있던 발라크를 부른 나는, 잠시 막사 밖으로 나가 미리 준비한 것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콜록, 콜록! 케헥!”
“…이게 뭐하자는 거지? 설마 지금 저게 그 열쇠라고 하고 싶은 건가?”
수척하고 시퍼렇게 뜬 인상의 인간 포로.
막사에 들어서기 전부터 거칠게 기침을 하며 막사 바닥에 피까지 토해내는 놈을 본 마왕들의 눈살이 팍 찌푸려졌다.
“물론이지. 보면 모르겠나? 결계에 걸릴 일도 없고 혹시나 마법에 격추당하더라도 제 몫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는 최적의 병기가 아닌가. 벨제붑 네 말대로 저 성벽에 저절로 수복하는 방어막이 쳐져있다 한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네놈, 그 말은 설마….”
나는 큰 병이라도 걸린 듯 아직도 기침을 멈추지 않는 포로와 나를 번갈아보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벨제붑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는 길에 산맥마다 짐승이 참 많더군. 적당히 나누면 병사들이 모두 배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더군. 그런 걸 한 열흘쯤 썩혀선 먹였지. 그런 놈들이 몇 만이다. 마침 확실하게 저 성벽 너머로 날릴 수 있는 무기도 셋이나 있지.”
전염병에 걸린 포로들.
그런 게 몇십 몇백도 아니고 몇만이나 있었다.
썩은 고기를 그렇게 먹이고도 정작 병에 걸린 건 열 명 남짓이었지만, 전염병이 왜 전염병이겠는가.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뭐, 안 될 거라도 있나?”
“그건….”
난 무어라 입을 뻥긋거리다 할 말을 잃었는지 무겁게 고개를 젓는 벨제붑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전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