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64화 (164/200)

제164화

“프흐….”

툭-

라이칸과 게르둠, 마지막으로 체르페슈의 사체가 놓여 있던 장소에까지 들러 모두 흡혈을 마친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만 자리를 떴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85]

[힘 : 240][민첩 : 254]

[체력 : 250][마력 : 235]

“훌륭하군.”

이미 시체들이었던 데다가 피를 모두 빨아버렸다간 금방 들통나버릴 것이 뻔했기에 적당히 조절해, 흡혈의 효과가 감소된 것이 이 정도였다.

마왕 셋에, 그 근처에 놓여 있던 사천왕들의 시체까지 총 아홉을 흡혈해 오른 능력치가 총 105.

다들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더라면 못해도 130은 올랐을 터였다.

“으윽… 머리야. 흐, 흐억! 야, 야 일어나! 젠장, 설마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혹여 들킬세라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체르페슈의 시체가 있던 방을 나온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둘 모두 갑작스레 정신을 잃었던 것에 의구심을 품긴 하겠지만, 절대 남에게 이 사실을 알리진 못할 터였다.

자그마치 마왕의 시체를 지키고 서있는 막중한 임무 중에 쓰러졌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기 싫다면 말이다.

물론 저들이 지키고 있던 시체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티가 안 나게끔 잘 처리했으니 별문제는 없을 터였다.

“에릭.”

“음?”

그렇게 볼일을 마치고 내성 밖으로 나온 나는, 회의가 끝났는지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던 아이시스와 마주쳤다.

“마왕님, 찾고 계셔.”

“그런가. 알겠다, 바로 가지.”

난 곧바로 그녀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떤 일로 부른 건지 대충 예상이 갔다.

늑대인간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또 도망치는 적장을 붙잡은 공적을 치하하기 위함이거나, 비어버린 혈마왕의 자리에 대한 얘기를 나눌 생각인 거겠지.

끼익-

“오, 왔나? 그렇지 않아도 자네 얘기 중이었네. 그보다 어때, 몸은 좀 괜찮나?”

“아, 예. 멀쩡합니다.”

금방 회의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는 악투스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구만. 그럼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어.”

“예? 시작하다니 무슨….”

“응? 거기 꼬마 아가씨한테 오면서 못 들었나? 체르페슈의 빈자리 말일세.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공석으로 둘 수는 없잖나. 라이칸 녀석의 자리야 마땅히 적임자가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둘은 빨리 뽑아야지 않겠나.”

나는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그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대충 예상은 하긴 했다만,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얘기가 진행됐을 줄이야.

전대 마왕이 죽은 지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후임자를 정하려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못해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하긴 마왕의 죽음으로, 그것도 단번에 셋이나 죽어버리는 바람에 잔뜩 혼란에 빠진 마족들을 통제하고 바로잡기 위해선 가능한 빨리 자리를 채워넣는 것이 옳았다.

아무리 이번 전투로 인해 연합뿐만 아니라 마왕군 또한 극심한 피해를 봤다고 한들, 악투스와 부상당한 릴리스 둘이서 다섯 개의 군대를 모두 통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본래대로라면 각 종족 내에서 적임자를 선출해 추대하고, 그가 다른 마왕들 중 절반 이상의 인정을 받아야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런 절차는 생략하기로 했네. 대신 심플하게 가장 강한 사람이 마왕에 오르는 걸세. 실상 그게 가장 우리 마족스러운 방법이기도 하니까.”

가장 강한 사람이 마왕이 된다.

확실히 심플한 방법이었다.

동시에 병사들 입장에서 제일 반발이 없을만한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그를 다른 사천왕들이 얌전히 동의했냐는 건데…

“에릭, 자네만 좋다면 끝일세. 이미 회의에서 다 결정 난 사안이니 말이야. 카르카쉬와 벨제붑 또한 찬성했지.”

“…그렇습니까?”

나는 내 물음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는 악투스를 보고선, 말없이 입 꼬리를 씰룩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긴 저들 딴에도 마룡왕의 총애를 받고, 당장 눈앞의 투마왕에게도 호의를 사고 있는데다가 가이오스 공작의 핏줄이기까지 한 나를 정치적으로 상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힘 대 힘으로 붙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으리라 판단했겠지.

심지어는 공적까지 내가 우위에 있었으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훑었다.

한 놈은 체르페슈의 시체가 있던 곳 옆에 다소곳이 누워있었으니, 남은 건 총 세 명.

일전에 다른 사천왕들의 시체를 흡혈했을 적에 마왕들과 달리 능력치가 넷 중 하나씩만 올랐던 걸 생각해보면, 이들 또한 마력을 제외하면 나보다 낮을 것임이 분명했다.

별 문제가 없는 한, 내가 질 일은 없다는 얘기였다.

“으하하하! 역시 자네는 참 터프해서 좋아. 그럼 꾸물거릴 것 없이 바로 나가서 시작하자고. 넷 중에 가장 마지막에 서있는 쪽이 체르페슈의 뒤를 잇는 걸세. 물론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뒤집어엎어도 상관없네. 그건 자네 뱀파이어들 간의 일이니까 말이야. 단 어디까지나 중간계 정복은 모두 끝마친 뒤의 이야기일세.”

드르륵-

악투스는 차근차근 설명을 마치고, 우리 넷을 이끌고서 회의실을 나와 성벽 밖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가고일들은 둘이 가릴 것 없이 이미 정한 모양이로군.

그럼 이쪽만 잘 정리되면 끝이겠어.

“자, 다들 준비됐나?”

금방 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온 곳에 자리를 잡고 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 채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서로 죽이지는 말게. 가뜩이나 마왕이 셋이나 죽었는데 여기서 더 제 살을 깎아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악투스를 보고선,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거 어째 느낌이 싸하군.

투웅-!

“에릭 가이오스!”

“낯짝 한 번 뻔뻔하구나! 여태껏 투마왕의 아래에 있던 주제에, 갑자기 이제 와서 타군의 마왕이 되겠다 나서다니!”

역시나.

난 악투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셋이서 한꺼번에 내게로 달려드는 것을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야 굴러들어온 돌이 갑자기 박혀있던 돌을 쳐내려는 모양새라고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앞에 서보니 다들 느낀 거겠지.

예전의 그 반푼이가, 가이오스의 이름에 먹칠했던 그리고 긍지 높은 뱀파이어 종족에 수치를 안겨줬던 그 에릭 가이오스가.

이제는 사천왕인 그들의 머리 위에 설 존재가 되어 돌아왔음을 말이다.

우웅-

따로 무기를 들 것도 없었다.

들어 올린 손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린 나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세 녀석의 몸뚱이에 흐르는 피를 향해 조용히 의지를 쏘아 보냈다.

“무릎 꿇어라.”

쿵-

“큿….”

“무, 무슨….”

나는 무심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달려오던 그대로 무릎을 꿇고 미끄러진 세 놈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억지로 날 받들라하진 않겠다. 한때 반푼이었던 내가, 여전히 네들 눈에는 눈엣가시로 보일 테니.”

피의 지배.

난 체르페슈의 시체를 흡혈하고 깨우친 혈마법의 극의를 떠올리며, 옴짝달싹 못 한 채 당황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는 놈들을 향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허나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피를 마시며 강해지고 피를 다루는 뱀파이어에게 있어, 저보다 더 짙고 강력한 피를 가진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뱀파이어 귀족들의 사회에서 피를 다루는 혈마법을 익힐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대우가 확연히 달라지듯, 신체 바깥으로 흘러나온 피를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제 위치가 달라졌다.

아무리 남작가의 출생이라도 혹은 귀족이 아닌 평민의 출생일지라도, 그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상위의 귀족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나아가 만일 제 것이 아닌 타인의 혈액까지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눈앞의 셋처럼 사천왕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타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까지 제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된다면.

마왕이, 될 수 있었다.

“크으…”

나는 분한 얼굴로 주먹을 꾹 쥐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손을 내렸다.

“…인정하마. 아니, 인정하겠습니다.”

동시에 주박이 풀린 셋은 고개를 푹 숙이며 내 앞에 부복했다.

“마왕님.”

난 귓가에 울리는 달콤한 울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만 돌아섰다.

“이거 참 싱겁구만. 한바탕 재밌는 싸움 좀 구경해볼 수 있을까 했는데 말이야.”

“하하… 아까 하셨던 말씀대로, 굳이 제 살을 깎아먹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악투스 님.”

나는 퍽 아쉬운 표정으로 이쪽을 훑는 악투스를 보며,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됐네. 아무튼 축하하네. 혈마왕. 가능하면 내 사천왕으로 두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이제부터 경칭은 쓰지 말게.”

“예… 아니, 음. 알겠다.”

“좋아. 그럼 이만 돌아가자고. 새로운 마왕의 탄생을 알려야지. 그리고 이제부턴 하나의 군을 이끌어야 될 테니, 그에 관련된 인수인계도 빨리 받아야할 걸세.”

난 그리 말하며 다시 도시로 향하는 악투스를 보며, 조용히 그의 옆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체르페슈의 사천왕… 아니, 이제는 내 사천왕이 된 세 뱀파이어들을 뒤에 거느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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