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으음….”
“아, 에릭. 일어났나?”
낯선 천장이다.
다 무너져가는 건물 안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옆에서 어딘가 푸근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카렌을 보며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윽….”
“너무 무리하지 마라. 어차피 전투는 다 끝났으니, 조금은 더 쉬어도 괜찮다.”
상체를 조금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핑하고 머리가 도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린 나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눕히는 손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얼마나 지났지?”
“네가 정신을 잃은 뒤로 말이냐? 얼마 안 됐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그러니까 좀 더 누워있으라고 하는 거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그렇게까지 피를 쏟았는데 어떻게 벌써 멀쩡해지겠느냐.”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쏟아내는 카렌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 시간 정도인가.
혹시나 하루 이틀 이렇게 지나버린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참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메리엘도 데이몬도 아직 멀쩡히 살아있을 테니까.
물론 그것도 계속 이렇게 죽치고 있다가는 언젠가 내가 그들을 숨겨놨다는 사실을 들켜버릴지 모르니, 빠르게 동굴로 돌아가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아! 우르누이… 대족장 녀석은 어떻게 됐나!”
“그 사자 수인 녀석 말인가? 걱정하지 마라. 다행히 투마왕님께서 네 공적을 인정해 포로로 붙잡아두셨으니까. 뒤처리는 네게 맡기시겠다고 하시더군.”
그런가.
다행이군.
물론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쪽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결국 악투스가 녀석의 소유권을 완전히 내 것으로 공인해버린 셈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정말 내 마음대로 녀석을 처분한다면 반발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제 와서 딱히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악투스와 릴리스를 뺀 나머지 세 마왕은 죽어버리고 없었으니까.
살아남은 몇몇 사천왕들의 눈총 따위, 이젠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며칠 전과 달리, 지금의 난 놈들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있었으니 말이다.
[에릭 가이오스]
[뱀파이어]
[레벨 : 85]
[힘 : 220][민첩 : 224][체력 : 220][마력 : 210]
도합 800을 훌쩍 넘어, 이제는 900을 바라보고 있는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민첩은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나머지 세 능력치는 도리어 용사 시절의 나를 뛰어넘어있었다.
이조차도 우르누이와 메리엘, 데이몬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곧 그 셋마저 흡혈하고 나면, 그때는 정말로 마왕들과도 한 번 정면으로 붙어볼 만할 터였다.
지금 내겐 용사 시절의 경험과 실력은 물론, 뱀파이어 에릭 가이오스로서 다룰 수 있는 혈마법까지 있었으니까.
촤락-
“음? 에릭, 또 일어난 건가?”
“이젠 정말 괜찮다. 그보다 다른 녀석들은 어디 갔지?”
“발라크랑 릴리아나는 병사들과 함께 뒤처리를 하고 있을 거다. 아이시스는 악마왕님께 잠시 보고 드리러 간 거 같더군. 그리고 셀레스트 녀석은… 으음.”
셀레스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줄이는 카렌을 보며,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 마왕님들께서 셋이나 돌아가셨지 않나. 그 때문에 나온 공석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지금 남은 사천왕과 두 마왕님들께서 회의에 들어가신 상태다. 헌데 늑대인간 쪽은 다른 도시에서 정보를 모으고 있던 셀파스트를 제외하곤 사천왕도 전부 공석이 되어버려서 말이다.”
모두 공석이라고?
그 두 놈들, 결국 그렇게 쏘아져 나가더니 이방인한테 죽어버린 건가.
“그럼 마랑왕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셀파스트가 그대로 올라가기엔 무리가 있을 텐데. 애초에 녀석은 강함으로 올라간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본녀도 그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구나. 그래도 일단은 적임자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자는 의견이 지배적인 모양이다. 허나 만일 누군가 꼭 그 자리에 올라야 한다면….”
설마 셀레스트가 마왕이 된다는 건가?
“마왕인가… 셀파스트 녀석이 참 자랑스러워하겠군.”
“만일 누군가 올라야 한다면이라 하지 않았나. 아마 당분간은 공석으로 놔두게 될 거다.”
하긴 아무리 자리가 없어도 셀레스트가 지금 마왕에 오르기는 좀 무리겠지.
이전 마왕들하고는커녕 당장 사천왕들과 비교해 봐도 살짝 모자라면 모자랐지, 더 뛰어나진 않았으니까.
물론 그것도 계속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금방 강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에릭, 넌 어떻게 할 건가.”
“음? 나 말인가?”
“뭘 모르는 척을 하는 거냐. 이번에 혈마왕님께서도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그 자리 또한 채워야지 않겠나.”
혈마왕.
나는 그때 라이칸의 시체 근처에 널브러져있던 게르둠과 그의 시체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 그랬었지.
“마왕, 인가.”
“뱀파이어는 사천왕이 셋이나 남아있긴 하다만. 에릭, 너도 한 번 나서볼만 하지 않겠나? 공적도 실력도. 네가 그 셋에 비해 모자랄 건 없을 거 같은데.”
난 은근히도 아니고 대놓고 밖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카렌을 보며, 조심스레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군.”
대부분 아직 북문 밖에서 뒤처리를 하고 있어 많이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나처럼 부상을 입어 들어온 이들 중에서는 딱히 이견을 토하는 자는 없는 것 같았다.
개중엔 뱀파이어가 여럿 섞여있었음에도 말이다.
물론 얘기가 없다고 해서 그게 꼭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간 내가 쌓아온 공적이 그리고 지금껏 보여준 실력과 행보가 나머지 셋에 비해 도리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지.”
나는 마왕의 좌에 대한 얘기는 이만 접어두고, 우선 북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직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설마 정말로 마왕님들께서… 아! 충성!”
“그래, 고생이 많군.”
금방 북문을 지나 밖으로 나온 나는, 한창 뒷정리 중인 병사들을 지나쳐 전투의 흔적이 진한 크레이터들을 살폈다.
마지막 악투스와 이방인이 겨루고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아직 남아 있다면 이쯤에 있어야 할 텐데.
“젠장….”
역시 없나.
하긴 마왕의 옥체를 언제까지고 이 찬 바닥에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가장 먼저 챙겨뒀겠지.
빌어먹을, 역시 어떻게든 그때 버텼어야 했는데.
“형님?”
씁쓸한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저 멀리 나를 발견하고선 달려오는 발라크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 멈춰 섰다.
“깨어나셨군요,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난 곧바로 내 걱정을 쏟아내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꼴을 보아하니 여기저기 찢어진 옷 사이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저부터 걱정할 것이지.
“괜찮다. 조금 피를 많이 썼을 뿐이야. 그보다 혹시….”
카렌의 얘기대로라면 그는 계속 뒷정리를 하고 있었을 테니, 마왕들의 시체를 어디로 챙겨뒀는지 대충 알고 있지 않을까.
슬쩍 크레이터가 있는 곳을 살피며 녀석을 돌아본 나는, 이내 무언가 눈치 챈 듯 고개를 주억이는 그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은 도시 안쪽에, 아마 영주성이 있던 자리에 옮겨뒀을 겁니다. 각자 병사들이 지키고 있긴 하지만, 지금이라면 사천왕들도 모두 회의에 들어갔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발라크!”
이 똘똘한 녀석.
난 곰처럼 생긴 덩치와 달리 머리가 빠삭하게 돌아가는 그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아닙니다, 형님.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발라크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장 영주성을 향해 움직였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겠지.
“젠장… 빌어먹을 연합 놈들! 그 시꺼먼 놈들은 대체….”
사삭-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마족을 가뿐히 지나쳐 내성 안으로 들어선 나는, 사방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적도 없는데 인원을 이렇게 많이 배치해놨는지.
이럴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뒷정리하는 쪽으로나 좀 많이 뺄 것이지.
달칵-
그래도 딱히 수준이 높진 않았기에, 금방 그들의 눈을 속이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자, 어디 모셔 놨으려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이야기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마왕의 사체가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누군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가능한 병사들이 있는 곳을 위주로 찾으면 될 터였다.
“젠장… 이러면 이제 누가 마왕님의 자리를 잇는 거지?”
“사천왕님들께서도 모두 돌아가시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런….”
하나 찾았군.
나는 꽤 커다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늑대인간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러다 정말로 셀레스트 그 계집….”
툭-
둘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손가락을 튕겨 혈마법으로 만든 바늘로 급소를 찌른 나는, 맥없이 허물어지는 놈들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늑대인간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길어야 3분 정도가 한계겠지.
좀 서둘러야겠군.
끼이익-
“…훌륭하군.”
라이칸.
난 커다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넝마가 된 거대한 늑대인간의 시체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