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늦었군, 뱀파이어.”
“주술 때문에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질 않아서 말이야. 또 날래기도 엄청 날래더군.”
남문 쪽을 수색하던 병사들을 데리고 곧장 북문으로 향한 나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는지 우선 성문을 열 준비를 하던 사천왕 둘과 마주쳤다.
“죽였나?”
“그래. 가능하면 생포하고 싶었지만, 더는 그럴 여유가 없어보여서 말이다.”
“…알았다. 어쨌든 빨리 본대와 합류하지.”
그들은 슬쩍 내 손을 확인하고선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걸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을 감싸던 붉은색 기운이 사라졌으니 따로 깊게 파고들진 않기로 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시간을 꽤 오래 끌어버린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종족 간의 앙금이 남아있는 사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올 줄은 몰랐는데.
뭐 어떻게 보면 그만큼 빨리 대주술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거니, 적어도 실력에 있어선 이제 사천왕들에게도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마저도 이번 전투가 끝나고 나면 차이가 확 벌어져 있겠지만 말이다.
크그그긍-
나는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어떻게 되어있으려나.
가능한 마왕이 모두 죽어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투마왕 만큼은 살아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와 카르카쉬, 둘만큼은 사실상 다른 마왕들보다 한 단계 격이 높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쿵-
“뭐, 뭐냐! 성문이… 젠장, 세르노이 녀석. 정말로 당해버린 건가!”
이윽고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도시 밖의 상황을 마주한 나는, 가장 먼저 성벽을 등진 채로 발록들과 맞서고 있던 수인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 놈들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건, 그 이방인 셋이 제 할 일을 확실히 해주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아, 아아아아악!”
이후 천천히 놈들 너머로 시선을 옮기던 나는, 옆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에 슬쩍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라, 라이칸 님! 어째서, 어째서!”
저 멀리 한쪽 팔이 뜯겨져 나간 이방인 하나와 악투스가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곳 근처.
나는 쉽사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시체들 속, 거대한 늑대 사체를 하나 발견하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이, 이 씹어죽일 연합 놈들. 전부 다 죽여 버리겠다!”
참자, 참아야 한다.
난 처참한 광경에 정신을 잃고 수인들을 찢어발기며 검은 형체의 이방인을 향해 달려드는 두 늑대인간을 보고선, 자꾸만 치솟는 입 꼬리를 끌어내리느라 곤욕을 치러야만했다.
훌륭하군.
아주 잘해줬어.
기대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분발해줄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면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세르노이, 그 녀석을 오래 붙잡아둔 보람이 있었다.
라이칸뿐만 아니라 게르둠과 체르페슈까지.
사지가 완전히 뜯겨져나간 두 이방인의 시체와 함께, 마왕이 자그마치 셋이나 널브러져 있었다.
거기에 릴리스마저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보아하니, 어디 큰 부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후퇴, 다들 후퇴한다!”
“이놈들! 어딜 도망치는 거냐!”
기대 이상의 결과에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던 나는, 활짝 열린 성문을 보며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수인들을 보고선 조용히 단검을 들어올렸다.
도망이라니, 그렇게는 안 되지.
“젠장! 가제프, 그 놈만 여기 있었어도 저 망할 발록까지 전부 죽일 수 있었을….”
카앙-!
“큭, 누구냐!”
멍청한 늑대인간 놈들이 제 마왕의 사체를 보고선 전부 하나 남은 이방인을 향해 달려 나간 덕분에 홀로 수인들을 막아선 나는, 팔 한쪽이 찌부러져 덜렁거리고 있는 우르누이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상처를 보아하니 원래 이쪽이 악투스를 상대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대주술사는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보려고 하던데, 대족장이라는 놈이 꼬리를 말고 도망이나 치려들다니. 이제 보니 사자가 아니라 개새끼 수인이었나 보군.”
“네놈… 설마 네놈이 세르노이를!”
다른 수인들은 의식의 제물로 수십만이나 갈아 넣어버린 주제에, 대주술사의 죽음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걸까.
난 그녀의 이름을 꺼내기가 무섭게 제 무기인 대부를 꺼내드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족장님, 진정하십시오. 남은 이방인마저 쓰러지기 전에 어서 가야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한 명입니다. 저 놈은 저희가 맡을 테니, 빨리 자리를 피하십시오!”
“크으… 네 녀석, 뱀파이어. 조금만 기다려라. 다음번엔 기필코 네 목을 썰어다 세르노이, 녀석의 한을 풀어줄 테니!”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기세를 보이던 대족장은, 슬슬 뒤쪽에서 날아들기 시작한 마법과 점점 따라붙어오는 병사들에 저를 말리는 부하들을 보며 등을 돌리려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이쪽은 보내줄 생각도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다음번에 보자는 건지.
쐐액-
푹-
“컥….”
곧바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시뻘건 창들을 쏘아 보낸 나는,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가슴이 꿰뚫린 수인들의 시체를 밟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네놈.”
난 이윽고 도망치는 우르누이의 앞에 시뻘건 피의 벽을 세워 올리고선,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을 보며 핑그르르 단검을 돌렸다.
뒤에서 따라붙는 마족들의 발목을 잡느라 빠진 놈들을 제외하면 대강 2000명 정도인가.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대족장도 그렇고 다들 상태가 정상은 아닌 거 같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았다.
그 바보 같은 사천왕 두 놈 중에 한 명만 남아있었어도 금방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래도 덕분에 이놈을 붙잡으면 따로 눈치 볼 것 없이 흡혈해버릴 수 있을 테니, 썩 나쁘진 않은 거 같았다.
“세르노이, 그년과 약속한 게 있어서 말이야. 가는 길이 외롭지 않으라고, 곧 네놈도 같이 보내주기로 했거든.”
“이, 이 빌어먹을 마족 놈이!”
어차피 퇴로도 막혔겠다, 방금 그걸로 제 부하들로는 내 발목을 잡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는지, 우르누이는 고함을 지르며 그 커다란 대부를 훙훙 휘둘러왔다.
콰아아앙-!
한쪽 팔이 완전히 박살났는데도 이만한 위력이라니.
녀석의 공격을 피해 뒤쪽으로 몸을 날린 나는, 조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바닥이 처참하게 갈라져 박살나버리는 것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콰앙-! 콰아앙-!
“놈! 촐싹촐싹 도망만 다니지 말고, 어디 한 번 나와서 맞서 싸워 보거라! 말은 자신만만하더니, 이제 와서 그렇게 쥐새끼마냥 시간이나 끌어볼 셈이냐!”
하지만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맞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녀석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꽤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저렇게 커다란 대부를 고작 한손으로 휙휙 휘두르는데 제 속도가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망이라니, 그건 방금 전에 겁먹은 개새끼마냥 굴던 네가 한 짓이겠지.”
푸욱-
“크윽….”
몇 번 정도 녀석의 대부를 피하며 기회를 노리던 나는, 말과 달리 빠르게 나를 정리하고선 도망치려고 무리했던 건지, 녀석이 잠시 도끼질을 멈추고 숨을 고르려는 찰나를 노려 단검을 쑤셔 박았다.
“대, 대족장님!”
후웅-
촤악!
이윽고 단검을 하나 더 꺼내 녀석의 힘줄을 모두 끊어버리려던 찰나.
난 놈을 구하기 위해 양쪽에서 달려드는 족장들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단검을 빼고 뒤로 물러섰다.
“허억, 크으….”
“대족장님, 괜찮으십니까!”
빌어먹을.
나는 상처 입은 대족장을 보고선 황급히 녀석을 둘러싸는 수인들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젠장, 젠장!
놈들을 모두 죽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물론 수가 수인지라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신중하게 하나씩 썰어나간다면 큰 부상 없이 모두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뒤쪽에 마족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녀석들이 도망칠 수 있게끔 시간을 벌러 미리 빠진 수인들이 생각보단 꽤 잘 버텨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다른 놈들이 이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우르누이 녀석의 신변을 차지하는데 괜히 뒷말이 나올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혼자서 다 쓸어버렸다는 당연히 놈들의 처우는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다른 이들의 공적이 끼기 시작한다면 따로 협의를 봐야했으니까.
“…어쩔 수 없군.”
놈에 대한 복수도 복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당장 내가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저 씹어죽일 대족장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관대한 처사이긴 했지만, 괜히 녀석이 포로로 잡혀 고문도 흡혈도 못하게 되는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운이 좋구나, 우르누이.”
스억-
푸슛-
곧바로 결심을 마치고 양 손목을 깊게 그은 나는, 콸콸 쏟아지는 핏물을 보고선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에 몇 번 연습했을 땐 모두 실패했던 혈마법이었지만, 이젠 마력을 꽤 많이 올랐으니 충분할 터였다.
“뭐, 뭐냐 이건….”
“쓸어버려라.”
콰가가가각-
“아아아아아악!”
“흐아아아악!”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올라 수인들이 뭉쳐있는 곳을 향해 날아간 피들은, 이내 내 손짓에 날카로운 바늘들로 변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잘게 갈아버렸다.
“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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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툭-
피를 너무 많이 썼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목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는 피를 보며, 현기증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뭐…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