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대주술사님을 지켜라!”
나는 순식간에 하던 일을 멈추고 세르노이를 둘러싸는 수인들을 보며, 조용히 단검의 날 세웠다.
대강 백 명 남짓인가.
대부분 대족장을 따라 밖으로 나간 터라, 남아있는 녀석들은 이게 전부인 듯했다.
물론 대주술사의 옆을 지키는 놈들이 어중이떠중이일 리는 없으니 다들 못해도 부족장급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세르노이의 주술이 깔려있다고는 해도, 저들의 절반은 전사가 아닌 주술사였으니까.
더구나 이번엔 이쪽도 혼자가 아니었다.
“…뱀파이어. 어디 가있나 했더니 먼저 와서 한바탕 저질러줬구나.”
“혹시 겁이라도 먹고 내뺀 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군. 보아하니 성문을 열어놓은 것도 네 녀석일 테고. 셀파스트 그 괴짜 놈이 마음에 들어 한다기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제법 터프하군.”
나는 소란을 듣고 뒤늦게 모여든 늑대인간 무리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사천왕 둘에 그 휘하의 병력들만 수백이었다.
사실상 한 자리를 셀파스트가 채우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랑왕 그놈이 제 곁을 지킬 하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력을 이곳에 쏟아 부은 셈이었다.
이 정도면 혹여 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다만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한지라, 제아무리 주술이 깔려있다고는 한들 너무 빨리 끝나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도시 바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왕군이 마냥 압도하기만 하는 그림이 나와선 좋을 게 없었으니까.
게다가 자칫하면 세르노이, 저 놈의 신변을 뺏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잔말 말고 바로 시작하지.”
난 낭패한 표정으로 이쪽의 전력을 살피는 대주술사를 보고선,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우웅-
바닥에 고인 핏물이 내 의지에 따라 구슬처럼 뭉쳐 허공에 떠올랐다.
어차피 한 번 발동한 주술은 시전자의 힘이 다하거나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놈이 어찌 방해하지 못하도록, 까딱하면 휘말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나 혼자 요란하게 녀석을 맡으면 될 일이었다.
“대, 대주술사님. 피하십시오!”
콰가가각-
구슬들은 순식간에 세르노이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 사방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흩뿌리곤 사라졌다.
“아아아아악!”
“어으윽. 히, 힘이….”
폭발 직전, 세르노이의 앞을 막아서며 대신 가시를 맞은 수인들의 몸이 마치 흡혈이라도 당한 듯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간 혈마법을 다루는데 능숙해져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술 중 하나로, 수준 낮은 적 여럿을 상대로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
“으으… 대주술사님, 어서….”
“다, 다들… 큿!”
나는 손짓 한 번에 일곱이나 당해버린 제 부하들을 보고선 입술을 꾹 물며 도망가기 시작하는 세르노이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녀가 알아서 제 부하들로부터 떨어져줄수록 나야 더 편했다.
물론 제 딴에는 거기 계속 있어봐야 머잖아 다 같이 금방 잡혀버릴 테니,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조금 끌어보려는 속셈이겠지만 말이다.
이거 참, 마침 이쪽도 시간이 좀 필요했는데.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아서 다행이군.
“뭐야, 대장이 벌써부터 꼬리 말고 도망치는 거냐? 그렇게는 안….”
“나머지는 맡기겠다. 저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응? 뭣… 이 모기 자식이 뭔데 제멋대로!”
늑대인간들이 대주술사를 쫓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나는, 혹여 무어라 불만이 나오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어딜 그리 급히 도망가나. 제 부하들은 전부 늑대 밥으로 버려두고선 말이야.”
“읏… 버, 벌써….”
10초 정도 먼저 자리를 벗어난 녀석을 금방 따라잡은 나는, 놀란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그녀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주술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고는 한들, 그녀는 어디까지나 전사가 아닌 주술사였다.
물론 한 종족의 그랜드마스터로 불리우는 만큼 그 둔한 주술사 치고는 꽤 날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애초부터 발놀림이 특기인 도적을 따돌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지의 어머니시여. 부디 이 땅을 어지럽히려드는 저 무뢰배에게 당신의 분노를 내려주소서.”
번쩍-
나는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긴박한 와중에도 침착하게 주문을 외워 주술을 발동시키는 세르노이를 보고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원하는 대로 그녀를 혼자 끌어내긴 했지만, 너무 티나지 않게 시간을 끌기 위해선 이쪽도 조금은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혼자 남은 그녀의 숨통을 끊는 것 정도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주술이 깔린 시점에서 대주술사의 공격을 피하는 건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으니까.
쿠구구구-
아래쪽인가.
나는 번쩍이는 빛이 잠시 스쳐지나간 직후, 굉음과 함께 떨리기 시작하는 바닥을 보고선 황급히 근처 가옥으로 뛰어올랐다.
쿠직- 쿠직-
콰가가각!
이윽고 방금 전까지 내가 달리던 자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손바닥이 튀어나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쥐어 박살내버렸다.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군. 그 대지의 어머닌가 뭔가 하는 녀석 말이야.”
난 의식에 희생되어 말라비틀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체들이 물 먹은 휴지를 꽉 짜놓은 것 마냥 짜부라진 것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녀석도 급히 준비한 터라 범위가 그리 넓진 않아 피하는데 어려울 건 없었지만, 파괴력 하나 만큼은 확실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혹 잘못해서 휩쓸리기라도 하면 뼈가 가루가 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뭐, 그래봐야 안 맞으면 그만이지.”
“불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딸이 바라나니, 부디 이곳에 당신의 숨결을 내리어, 우리를 지켜주소서.”
번쩍-
나는 첫 공격을 피해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다음 주술을 준비해 날리는 세르노이를 보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생각보다 텀이 훨씬 짧은데.
이래서야 숨 고를 시간도 없겠어.
화륵-
온다.
난 또 다시 환하게 터진 빛이 잠잠해지기 무섭게 허공에 피어오르는 불씨를 보고선, 빠르게 옆으로 몸을 틀었다.
화르르륵-
“큿.”
이거 위험하군.
나는 처음 불씨가 지핀 곳에서부터 단숨에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번진 불길을 보고선,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옆구리가 완전 녹아내렸겠어.
화르륵-
“…이런.”
잠깐 불길에 닿았을 뿐인데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옷가지를 보며 황급히 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그새 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에워싼 불길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나를 가둬둘 속셈이었나.
“귀여운 짓을 하는군.”
나는 주변을 완전히 막아선 채로 바닥의 시체들을 타고 내가 있는 곳까지 번져오는 불을 보며, 두 단검에 마력을 때려 넣었다.
우웅-
금세 새하얗게 피어오른 검기를 보며 자세를 잡은 나는, 곧바로 앞을 가로막은 화염의 벽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화륵-
후우욱-
한 번, 두 번, 세 번.
검기가 불길을 가를 때마다, 맹렬히 타오르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후욱, 훅… 흡!”
나는 점점 좁혀오는 불길과 갈수록 뜨거워지는 공기에, 더더욱 빨리 검기를 휘둘렀다.
후웅-
그렇게 몇 초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단검을 휘둘렀을까.
난 내 몸에 불이 번지기 전에 가까스로 벽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오며, 거친 숨을 훅훅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 그새 튀었군.”
금방 어질어질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말끔히 모습을 감춘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뭐 그래봐야 아직 도시를 벗어나진 못했을 터.
찾고자하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차르르륵-
곧장 몸을 박쥐로 흩트려 하늘로 날아오른 나는, 빠르게 아래쪽을 살피며 세르노이를 찾았다.
끽해야 10초 남짓이었다.
멀리 가봐야 아직 이 구획 근처…
“흐흐, 뭐야. 거기 있었나.”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바로 옆에 있는 건물 뒤쪽에 몸을 숨긴 채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녀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째 그 불길 속을 헤치고 나온 나보다 더욱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 딱 봐도 나를 떼어놓기 위해 무리해서 주술을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그랜드마스터라 할지라도, 그리 짧은 시간에 그만한 위력의 주술을 연달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제발, 제발….”
“까꿍.”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아선 애타게 무언가를 빌고 있는 녀석을 보고선, 지붕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마주했다.
“아, 으… 어, 어떻게….”
“그러게, 가능한 멀리 도망쳤어야지. 이런 얄팍한 수가 나한테 통하리라 생각했나?”
난 나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벌벌 몸을 떨면서도 슬금슬금 옆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르노이를 보고선, 빠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콱 부여잡았다.
“컥, 컥….”
“더는 안 되지.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지금 바로 죽이진 않을 테니까. 일단 우리 어디 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있자고.”
그대로 녀석의 목을 움켜쥔 나는, 그녀를 들고 남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 이 년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 소리 지르지 못하게 혀부터 자르고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