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타올라라!”
화륵-
성벽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린 카렌은, 반대편에서 날아드는 마법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를 피워 올렸다.
콰아앙-!
그녀는 곧 얼음덩어리, 낙석과 부딪혀 사라진 불덩이를 보며, 곧장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법을 막기 위해선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제길, 끝이 안 보이는구나.”
카렌은 또 다시 하늘을 가득 수놓은 마법을 보고선, 입술을 꾹 물었다.
물론 대단한 양이긴 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왕이 다섯이나 모였으니 가볍게 막아내다 못해 진즉에 성벽을 무너트렸어야 정상이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만 없었어도…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어서 비켜라! 다들 물러서!”
“연합 놈들, 도대체 무슨 괴물을 만들어낸 거냐!”
그녀는 어느덧 마왕군 한가운데까지 파고든 세 검은 것들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놈들이 에릭의 걱정처럼 정말로 마왕들을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확실한 건 지금껏 아무런 생채기도 없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이 잘려도 온몸이 터져나가도 금방 다시 재생해 날뛰고 있었다.
“…카렌.”
“아, 미안하군. 아무래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말이다.”
악투스를 제외한 네 마왕의 공격에도 아랑곳 않고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렌은,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수많은 마족들이 맥없이 죽어나가고 있긴 했지만, 그를 상대하는 네 마왕과 사천왕들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놈들이 이쪽의 공격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게 재생해버리는 것처럼, 그들의 공격 또한 마왕들에게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고 해도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
확실히 저 검은 것들의 신체능력이 마왕들과 비교하더라도 우위에 서있긴 했지만, 그간 쌓아온 경험과 기술의 차이로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대로 싸움이 장기화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네 마왕과 사천왕이 저 검은 것을 상대하는 동안, 투마왕의 군세가 대족장과 그 휘하의 수인들을 잡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조금 전에 떠난 마랑왕 휘하의 무리들이 성벽을 돌아 놈들의 뒤를 칠 때까지, 저 너머에서 날아드는 마법을 막는다.
그러니까, 이쪽은 늑대인간들이 도시 안쪽을 헤집어놓을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때가 되면 저 이지가 없는 검은 것들이야, 성문을 틀어막고 버티면 어찌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화륵-
“좋아, 몇 번이고 막아주… 음?”
또 다시 쏟아지는 마법들을 보며 불씨를 피워 올린 카렌은, 무언가 이상을 감지하고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콰아앙-!
후두둑-
“큿, 뭔가….”
그녀는 불덩이에 닿은 암석들이 폭발하며 떨어진 잔해를 맞으면서도, 방금 전에 느낀 위화감을 되새겼다.
분명 마법이…
“…줄었어.”
아이시스의 말에 황급히 성벽을 올려다본 카렌은, 이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지금 한 번 정도는 더 날아들어야 됐을 마법들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에도 수가 좀 모자랐던 것 같았다.
설마 놈들이 지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전투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게 아니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이라면 벌써부터 마력고갈에 허덕인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적들은 황실 뭐시긴가 하는, 적어도 인간들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 말은 즉, 저 안쪽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설마 늑대인간들이…
“에릭!”
카렌은 어느덧 꽤 오랜 시간 동안 마법이 날아들지 않는 것을 보고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늑대인간들의 다리가 재빠르다고는 한들,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었다.
에릭.
아무래도 그가 지금 도시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말도 없이 사라졌던 건 그래서였나.
“나쁜 놈….”
그 정도는 미리 말해줘도 좋았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어쨌든 이걸로 방해는 사라졌으니, 어서 빨리 투마왕을 도와서 성문 밖으로 나온 수인 놈들을…
“…카렌!”
“뭣….”
홀로 악투스를 상대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대족장을 향해 지팡이를 돌린 카렌은, 아이시스의 외침과 함께 저 하늘 위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력에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건….”
쿠구구구-
시커먼 밤하늘 위로 시뻘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거대한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한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릴 수 있는 초고위 마법이, 지금 이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막아야….”
카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다행히 이변을 눈치 챈 것은 그녀와 아이시스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좀 위험하군. 게르둠, 릴리스.”
“인간 놈들, 제 편이 휩쓸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건가.”
“흐응… 어쩔 수 없네. 라이칸, 잠깐 혼자서 괜찮겠어?”
“크륵… 걱정하지 말고 일단 막아라. 그게 우선이다.”
네 마왕은 점점 가까워지는 운석을 보며,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 그들이 발목을 잡아두고 있는 검은 것들의 공격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두었다간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니, 적어도 재생하는 중에는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봐서 상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지금 당장은 놈들보단 운석 쪽이 더 문제였다.
이럴 때 벨제붑이나 카르카쉬가 있었다면 편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저런 무지막지만 마법과는 거리가 먼 다섯만 딱 모였을 줄이야.
하다못해 이렇게 갑작스레 싸움이 일지 않고 준비할 여유가 조금만 있었더라도, 나름대로 방어 마법을 튼튼히 쳐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다행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이 주 전공은 아니라지만, 늑대인간인 라이칸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어느 정도 손을 써볼 만 했으니까.
“데이몬 이놈! 우리도 있는데 어떻게 저런 마법을….”
쩌억-!
“컥!”
“크하하하! 지금 한눈팔 시간이 어디 있느냐! 운석이 떨어지든 벼락이 치든, 승부는 내야 할 것 아닌가!”
대족장, 우르누이는 피아구분 없이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있는 운석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인간 마법사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그놈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이, 망할 마족 놈이!”
“으하하! 망할 마족이 아니라 악투스, 악투스 바알이라고 몇 번을 말했나! 흐흐, 그나저나 이거 참 아깝구만. 우리 북쪽에서부터 참 즐거웠는데 말이야. 자네와 부딪히는 것도 이걸로 끝이라니.”
으득-
가뜩이나 미친 마족 놈을 홀로 상대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운석이라니.
“세르노이! 주술은 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냐!”
치이이익-
어느덧 운석이 지상에 닿을 듯 가까워지며, 전장의 온도가 확 치달았다.
쿠르르르-
“크윽!”
이윽고 가해지는 압력에 지면이 갈라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
카렌은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한 충격에 입술을 꾹 물며, 그 동안 모아온 마력을 터트렸다.
“파이어 실드!”
화륵-
시뻘건 불길이 허공을 넓게 둘러쌌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아이시스와 그녀를 따라온 악마족을 비롯한 마족들 모두 방어막을 펼쳤다.
콰아아아앙-!
“크흑… 퉷!”
곧 수백 겹으로 이루어진 방어막들 위로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
충격에 왈칵 올라온 핏물을 뱉어낸 카렌은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고선 더욱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쩌적-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단번에 백이 넘는 방어막을 깨트린 운석의 표면이 쩍쩍 갈라졌다.
카가가각-
균열이 점점 커질 때마다 방어막이 수십 장식 갈라지며 조금씩 운석이 가까워졌다.
“큿, 제발….”
쩌적-
콰아아아앙-!
그렇게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코 앞에 둔 운석을 맞이한 순간.
결국 먼저 충격을 버티지 못한 운석이 산산조각 났다.
“흐억, 헉….”
“조심해라.”
“…어?”
쿠웅-!
“흡….”
가까스로 운석을 막아내고서 헐떡이는 숨을 고르던 카렌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뒤로 잡아당겨지기 무섭게 제가 있던 곳에 떨어진 파편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고, 고맙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이런 거라도 도와야지. 고생했다.”
카렌은 저를 구한 발라크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파편이 많이 꽂히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녀석들은 많이 없는 것 같았다.
하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질 뻔했던 파편을 제외하곤 거의 잘게 조각난 수준이었으니까.
“다행이구나. 이제 저 검은 것들은 다시 마왕님들께 맡기고 우리는… 어, 어?”
그렇게 잠시 전장을 살피던 카렌은, 마왕들과 검은 인영들이 있던 장소를 보고선 우뚝 고개를 멈춰 섰다.
“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그녀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으로 변한 마왕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손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삭-
검은 것.
아니, 어느새 불그스름하게 변한 그것은 손아귀에서 펄떡이는 심장을 터트리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라, 라이칸 님!”
마왕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