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콜록! 콜록! 무슨, 대체 무슨 일이냐!”
데이몬은 폭음과 함께 매캐하게 솟은 연기를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설마 그릇에 비해 제물이 너무 많아서 의식이 실패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 제물은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릇 하나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깨지기는커녕 아직 금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젠장, 앞이….”
당장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가 있다면 고쳐도 모자랄 판에, 연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윈드 배리어!”
후우웅-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연기를 밀어낸 그는, 황급히 제단이 있는 곳을 살폈다.
“제, 제단이….”
데이몬은 폭발에 휩쓸려 처참히 무너진 제단을 보고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떨궜다.
실패.
한순간 그 두 글자가 뇌리를 스쳤다.
콰앙-!
넋을 놓은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는, 제단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정신을 차렸다.
“아아아악! 파, 팔… 내 팔이!”
뒤이어 들려온 비명에 슬쩍 자리를 옮긴 데이몬은, 곧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히, 히익… 오지 마! 오지….”
콰작-
“하, 하하… 하하하하하!”
의식은 성공했다.
그는 한쪽 팔이 뜯겨나간 기사의 머리통을 망설임 없이 짓이긴 남자를 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 피하셔야 합니다! 그릇들이 폭주를….”
으직-
데이몬은 뒤늦게 저를 찾아 내성 밖으로 이끄는 부하의 몸이 맥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선,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바라봤다.
“괴로, 워… 죽여… 이제, 그만…”
그녀는 쉰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천천히 데이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인간! 그만 정신 차리고 어서 이놈들 좀 어떻게… 아아아악!”
그는 기사와 수인들을 그야말로 아이 다루듯 가볍게 찢어발기는 그릇들을 보고선, 조용히 등을 돌렸다.
의식은 성공했다.
아직 그들이 정말로 마왕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새어나오는 기운만 보더라도 터무니없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했다.
황실에서 그랜드 마스터인 마흐제브와 가제프의 실력을 보고 자란 그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기술은 그들에 비해 한참 모자랄지언정, 단순히 육체의 강함만으로 따지자면 둘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물론 한낱 피륙이 그 방대한 힘을 담고선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데이몬!”
그릇들을 피해 내성 밖으로 향하던 데이몬은 저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대족장. 그리고 대주술사.
그밖에 폭주한 그릇들로부터 도망친 족장들이 잔뜩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왜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걱정하지 마시지요. 의식은 성공했습니다. 다만 온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세뇌가 풀려버린 모양입니다.”
“세뇌가 풀렸다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계속 저렇게…”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살피며 제게 물어오는 대주술사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세뇌가 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기들을 그릇으로 쓴 인간들을 찾아 복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방금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왔을 때부터 놓치지 않고 쭉 쫓아와야 했으니까.
저건 그저 천천히 육체가 붕괴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뜻대로 부려 먹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마왕들을 죽이는 데는 이대로도 충분할 겁니다. 마침 다행히도 놈들이 바로 바깥에 진을 치고 있으니까요.”
물론 만일 처음 계획대로 며칠 정도 거리까지 이 녀석들을 데려가야 하는 거였다면 꽤 애를 먹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들이 성벽 앞을 둘러싸고 있는 상태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저 마구잡이로 주변을 파괴하고 있는 녀석들을 그쪽까지 유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콰앙-!
“젠장! 그럼 빨리 어떻게든 해보시오! 이러다 다 죽게 생겼소!”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데이몬은 점점 가까워지는 폭음에 저를 재촉하는 수인 족장을 보며, 저 멀리 뒤늦게 이리로 도망치고 있는 병사들을 훑었다.
천 명이 넘던 이들이 그 짧은 사이에 고작 백밖에 남지 않았지만, 저 정도면 성문 밖으로 유인하기엔 충분했다.
“데이몬 님! 살려주…”
“파이어 볼.”
화륵-
“어, 어째서…”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망쳐 온 병사들을 향해 화염구를 띄워 올린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살피는 그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너흰 이제 죽은 목숨이다. 저놈들에게 죽든, 나에게 죽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서, 어서 마법을 거두어주십시오! 지금 뒤에…!”
“아아아아악!”
데이몬은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희가 목숨을 바쳐 저 세 명을 성문 바깥까지 유인할 수 있다면, 너희 가족들만큼은 저 더러운 마족들의 손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을 거다.”
“데, 데이몬 님….”
“그리고 그 모두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크윽….”
배신감 그리고 두려움.
복잡한 얼굴로 그와 폭주한 그릇들을 잠시 번갈아본 병사들은, 이내 눈을 꾹 감고서 발을 움직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들 걱정하지 마라. 내 꼭 약속을 지킬 테니.”
“젠장… 이쪽이다, 이 썩을 놈들아!”
데이몬은 이내 목숨을 바쳐가며 북문을 향해 그릇들을 모는 그들을 보고선, 천천히 내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걸로 어찌 그릇들은 마족 놈들에게 보냈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그 셋이 다섯이나 되는 마왕과 그 휘하의 마족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남아있는 수인들과 자신도 이만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바깥의 저 빌어먹을 마족들로부터, 안전하게 제국을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 * *
콰아앙-!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나는 도시 안쪽에서 연달아 울리는 폭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어느새 대열을 갖추고 모인 병사들을 바라봤다.
처음 폭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직후, 곧바로 마왕들이 소집령을 때린 덕이었다.
“에릭, 무슨 일이냐!”
“괜찮으십니까, 형님!”
난 마찬가지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렌과 발라크,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난 괜찮다. 딱히 아직 바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까. 다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
처음엔 의식에 실패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계속해서 폭음과 함께 여기저기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걸 봐서는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그 이방인들을 써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까진 성공한 것 같은데…
“흐응… 혹시 세뇌에 실패한 거 아니야?”
“세뇌?”
방금 전 있었던 소란에 대해 대충 설명을 끝낸 나는, 릴리아나의 대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그게 맞는 거 같군.”
그러고 보니 분명 의식을 마친 그릇들을 무사히 세뇌하기 위해, 일부러 이방인들의 정신을 절벽까지 몰아넣고 있었던가.
중간에 실수라도 했는지, 아니면 내가 그날 세 명을 제외한 모두를 죽인 것 때문에 계산에 착오 생긴 건지는 몰라도, 의식이 끝나고 그들의 세뇌가 풀려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뭐야, 그럼 지금 그놈들이 만들어낸 병기들이 자기 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얘기야?”
“아마도 그렇겠지. 그릇으로 사용된 이방인들 입장에선 멋대로 부려 먹다 의식에 써먹어 버린 놈들이니, 우리보단 당연히 연합 놈들한테 쌓인 게 많을 수밖에.”
나는 셀레스트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아쉬운 표정으로 성벽을 바라봤다.
마왕군 전체의 입장으로 보자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니 이보다 좋을 수 없겠지만, 가능하면 여기서 양쪽 모두 피해를 봐줬으면 했던 내 입장에선 조금은 찝찝한 결과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은 덜 죽이고 나올 걸 그랬군.
끼이익-
“응?”
“뭐야, 성문이…?”
안타까움에 혀를 차며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성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콰아앙-!
“허억, 헉… 달려, 저 마족 놈들이 있는 곳까지만 더 달려라!”
“뭐, 뭐야 저놈들. 상태가…”
“다들 전투 준비!”
나는 곧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는 제국의 병사들을 보며, 슬쩍 그들의 뒤를 살폈다.
“아으, 죽여… 괴로, 워…”
“저, 저건 또 무엇이냐! 에릭! 에릭?”
난 이윽고 병사들을 쫓아 성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커먼 무언가를 보고선, 입꼬리를 씰룩였다.
아무래도 저게 그 의식으로 만든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이대로 그냥 이겨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준비해라. 온다.”
“아, 알았다.”
스릉-
나는 저마다 제 무기를 꼬나 쥐는 일행들을 한 번 슥 살피고선, 이내 단검을 꺼내
들며 눈으로 검은 형체들을 쫓았다.
하나, 둘, 셋. 세 명.
전부 다 밖으로 나왔군.
설마 안에 있는 놈들을 다 죽이고 나온 건 아니겠지?
아니, 그랬다면 지금 놈들에게 쫓기는 게 평범한 병사들은 아니었을 터.
그렇다는 건 그 망할 대족장과 대주술사 모두 아직은 살아있단 얘기였다.
“다들 무리하지 마라.”
“뭣? 에, 에릭! 혼자 어디 가는 거냐!”
일행들에게 짧게 경고를 마친 나는, 곧장 남문을 향해 뛰었다.
어차피 저 셋은 마왕들의 몫.
난 혹여 수인 녀석들이 도망치기 전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