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아아아아악!”
“그만, 그만! 흐아아아악!”
“다, 단장님. 어떡합니까? 이대로 가다간 그릇이….”
피란체의 영주성 안.
데이몬은 그 중앙에 세워진 작은 제단 위로 솟아오른 빛기둥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수인들은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다. 고작 십수만 명 가지고 엄살 부릴 것 없어. 이대로 계속 진행하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아파, 아파! 제발, 제발 살려….”
그는 빛기둥 속에서 제물로 바쳐진 제국민들의 생명력을 받아들이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방인들을 무심한 눈으로 살폈다.
이미 지금 모인 것만 해도 고작 세 사람의 육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몸은 특별했다.
여신의 저주를 받은 터라 자신의 생명력을 대가로 빠르게 강함을 얻을 수 있으니만큼, 그간 지옥 같은 훈련을 거치며 생명을 불태운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릇으로서 더 많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명력을 써먹고, 애초에 그 크기부터 남달랐던 것이 바로 이 셋이었다.
물론 타인의 생명력을 받아 빈 공간을 메꾼다고 해서 그들의 수명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마저 거부반응을 일으켜, 적어도 몇 년은 더 살 수 있었을 육체가 빠르게 무너져 내릴 터였다.
그 시간이 길어야 닷새 남짓.
애초에 곧 의식을 끝마칠 이들이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도, 다 붕괴하는 육체 사이로 새어 나올 무식한 양의 생명력 덕분이었다.
“더, 더 제물을 먹이도록.”
그렇기에 이 그릇들은 가능한 많은 양의 제물을 받아들여 줄 필요가 있었다.
설령 버티지 못해 금이 가버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깨지지만 않는다면 당장 다가올 전투에서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조금 무리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계 그 너머까지 이들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에 메리엘, 그 가식으로 똘똘 뭉친 성녀를 태운 마차마저 급습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남은 세 그릇은 예정보다 더 많은 제물을 받아들여 줘야만 했다.
“데이몬 님! 지금 북문에 수인족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런가.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군. 지금 가겠다. 나머진 여기서 잘 지켜보고 있도록. 그리고 절대 중간에 의식을 멈추지 마라.”
“예!”
데이몬은 나머지 제물들의 도착 소식에, 보고하러 온 기사를 따라 내성을 나서 북문으로 향했다.
“어, 어어윽….”
“히, 힘이….”
그는 도시 안쪽에서 의식의 제물이 되어 힘없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밟고서, 금방 성문 앞에 도착했다.
크그그긍-
곧바로 병사들을 시켜 성문을 연 그는,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수인들의 행렬을 보며 환한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다들 어서 들어오시지요.”
“뭐, 뭐야. 저 녀석이 인간 영주인가?”
“아니, 그보다 왜 혼자… 또 뒤쪽에 있는 저건… 흐억!”
“우, 우웨에엑!”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마주한 수인들은, 충격에 토악질을 해대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생명력이 전부 빨려 마치 미라처럼 말라붙은 시체와, 중간중간 기사와 병사들이 밟고 다니느라 부스러진 몸뚱이 사이로 흘러내린 내장들은, 확실히 맨정신으로 가만히 지켜볼 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네가 데이몬인가.”
“예.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족장 우르누이.”
데이몬은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온 거대한 체구의 수인족을 보며, 조용히 예를 갖추었다.
본디 그는 제국의 마법사였기에 굳이 수인 연합의 대족장인 우르누이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마족들에 맞서 연합을 이룬 입장이었으니까.
“대족장님,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거 같습니다! 이 녀석들, 도시 안에 시체가….”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우르누이는 도시 안의 상황을 보고선 소란스러워진 수인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러고는 몇몇 내장이 삐져나온 시체들 때문에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악취에 눈살을 찌푸리며, 데이몬을 노려봤다.
“참 고약한 광경이로군. 그래도 이걸로 그 망할 마족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릴 수 있는 거겠지?”
“하하하하!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 정도면 마왕이고 뭐고,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데이몬은 아직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저를 훑는 대족장을 보며, 그의 뒤에 늘어선 수십만의 수인들을 슥 훑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다. 바로 시작하지.”
“예, 그러면 이것을….”
그는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이는 우르누이를 보며, 품에서 여신의 형상을 띤 석상 몇을 건넸다.
현재 진행 중인 의식이 적혀있던 교단의 고서에 나온 대로 제작한 그것은, 제물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보호구 같은 것이었다.
“됐군. 다들 받았나?”
“예, 대족장님.”
“대족장! 아까부터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저 도시 안에 있는 시체들을 다 뭐고! 언제까지 그 인간이랑 계속 얘기나….”
쩌억-!
쿵-
“조, 족장님! 대족장, 도대체 이게 무슨….”
제 수족들이 석상을 모두 건네받은 것을 확인한 대족장은, 아까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족장 하나를 때려눕히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예, 대족장님!”
“뭐, 뭐야! 다들 갑자기 왜 미는 거야!”
데이몬은 우르누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 동족들을 성문 안쪽으로 밀어붙이는 수인들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걸로 제물은 충분했다.
물론 본래대로라면 이것도 조금 모자랄 수 있었을 테지만, 새벽에 그 빌어먹을 소동 때문에 차고 남을 지경이었다.
에릭 가이오스, 그 빌어먹을 자식.
으득-
간밤에 그릇들을 모두 암살하고 가버린 망할 흡혈귀를 떠올린 그는, 이를 갈며 놈이 있을 뒷산을 올려다봤다.
이번에 성녀까지 처리해버렸으니 아주 기세등등하고 있겠지.
어디 마음껏 그러고 있거라.
금방 네놈도 그리고 마왕들도 전부 그 목을 꺾어줄 테니.
* * *
“으하하! 에릭,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예, 악투스 님.”
“그래, 그래. 일단 들어가지.”
스륵-
늦은 밤.
나는 악투스의 군대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모두 도착한 다섯 명의 마왕을 보며, 천막을 젖히고 회의실 안쪽에 들어가 앉았다.
“이걸로 다 모인 건가?”
“그래, 서쪽이랑 남쪽에 남은 벨제붑과 카르카쉬를 빼곤 말이지.”
“후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 보고 받은 것에 따르면, 그 둘은 와도 어차피 늦었을 테니까.”
마왕들은 자리가 모두 차기 무섭게, 곧장 회의를 시작했다.
평소 만나기만 하면 서로 빈정거리며 다투는 혈마왕과 마랑왕조차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걸 보아하니, 다들 피란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의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다들 내 보고를 받았을 적엔 반신반의하는 것 같더니, 역시 백 번 듣는 것보단 한 번 직접 보는 편이 더 이해가 빨랐다.
“그보다 거기 뱀파이어. 그래, 분명 에릭이었지. 듣자 하니 성녀를 붙잡았다던데. 뭐 도움이 되는 정보라도 좀 캐낸 거 없나?”
역시, 언젠간 이 질문이 들어올 거라 예상했지.
나는 마랑왕의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다만 놈이 워낙에 입을 열지 않는 터라, 시간이 없어 무리하게 고문하다 보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래서 녀석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다는 거냐?”
난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그를 보고선,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네놈… 이래서 모기 자식들은!”
“라이칸!”
“…칫.”
마랑왕은 중요한 포로를 날려 먹었다는 얘기에 책상을 치고 일어났다, 악투스의 호통에 혀를 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실은 아직 숨은 붙어있는 상태였지만, 난 굳이 진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분명 본대의 기술자에게 메리엘의 신변이 넘어가게 될 터였으니까.
“그래도 덕분에 얻은 정보들이 좀 있습니다.”
“어머, 그거 다행이네. 그러면 상관없지. 그래서 모진 고문으로 대체 어떤 정보를 얻었을까나?”
나는 살포시 미소를 띤 얼굴로 성녀에게서 캐낸 정보를 묻는 릴리스를 보며, 슬쩍 아이시스에게 정리를 부탁했던 정보가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들이 너무 큰 승리를 거두는 것보단 적당히 몇 명 정도는 여기서 죽어주는 편이 훗날 중간계를 정복했을 때 도움이 되었기에, 일부러 중요한 정보들 몇몇을 빼놓은 문서들이었다.
“으음, 제물의 규모가 못해도 백만 명 이상. 거기에 이건….”
차라락-
“마, 마왕님들. 큰일 났습니다!”
그렇게 내가 나누어준 종이를 훑는 마왕들의 인상이 점점 찌푸려지던 찰나.
발록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천막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뭐냐. 큰일이라니, 밖에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지금 빛기둥이….”
번쩍-!
그에 투마왕이 대표로 일어서 걸음을 막 옮기려던 순간.
바깥에서 눈부신 빛이 터지며 회의실 안쪽을 가득 메웠다.
“큿, 눈이….”
혹 연합군이 기습이라도 시도한 걸까.
황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서 밖으로 나온 우리는, 곧 뿌옇게 번졌다 돌아오기 시작한 시야에 연신 눈을 깜빡였다.
“빛이….”
이윽고 도시 중앙에서 솟아오르던 빛이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빛기둥이 사라져버렸다는 건, 놈들의 의식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제 곧 전쟁이…
콰아아앙-!
“뭐, 뭐야?”
뒤이어 거대한 폭음과 함께 빛기둥이 있던 곳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를 본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지? 갑자기 왜…
“…설마.”
이 녀석들, 실패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