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으으….”
“이제야 정신이 좀 드나?”
깊고 어두운 동굴 안쪽.
나는 옅은 신음과 함께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성녀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읏!”
철컹-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낯선 풍경에 황급히 이곳을 벗어나려던 메리엘은, 팽팽하게 당겨져 제 사지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보고선 안색이 어두워졌다.
“너, 너… 그때 그 흡혈귀! 에릭 가이오스!”
녀석은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가린 베일 아래로 으득 이를 갈았다.
많이도 분한 모양이군.
그래도 혹여 잡혀 오자마자 완전히 체념해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그간 당해온 일들을 조금이라도 되갚아 주는 맛이 있을 거 같았다.
“흐흐. 그렇게 열 낼 시간에 네가 좋아하는 빌어먹을 여신한테 기도라도 한 번 더 올려보는 게 좋을 거다.”
“닥쳐라! 더럽고 저열한 마족 주제에, 그 구역질나는 입에 함부로 그분의 얘기를 담지 마라!”
“…더럽고, 저열해?”
스릉-
나는 붙잡힌 주제에 제멋대로 입을 나불대는 그녀를 보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도대체 누가 누구를 나무라고 있는 건지.
“지금도 네놈들이 강제로 불러들인 이방인들을 희생시켜서 우리 마왕군과 대신 싸우게 만들 계획을 짜고 있던 주제에.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 입에 더럽고 저열하다는 말을 담는 거냐.”
갑작스레 영문 모를 세상에 떨어져선, 원치도 않는 고된 훈련을 받으며 매일매일을 상처투성이인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동물을 기르던 축사에 수십 명씩 밀어 넣어져선, 기사들이 먹다 남은 음식들을 모아다 끓인 개죽을 먹으며 억지로 버텼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다음날의 훈련을 버티기 위해.
그마저도 모두가 배를 채우기엔 모자랐던 터라, 가끔은 쓰레기를 뒤져야할 때도 있었다.
그런 불합리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던 우리에게 돌아온 건,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건 전장에 던져지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를 이방인이라 무시하고, 제 좋을 대로 고기방패로나 써먹는 놈들 아래에서 굴러야 했다.
가축 이하의 삶.
용사도 말이 용사였지, 그 끝은 다른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빌어먹을 연합 놈들의 뜻대로 마구 이용당하다, 그 가치가 다하면 버려지는 노예에 불과했다.
뭐, 마왕을 모두 잡으면 돌려보내주겠다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애초에 돌려보내는 방법이나 있었을까.
아마 없었겠지.
만일 정말로 이방인들이 마왕을 전부 죽여 버린다 한들, 그때쯤이면 어차피 그 망할 여신의 저주 때문에 오래 살 수도 없는 몸이 돼있을 테니까.
“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게 뭐가 문제죠?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대륙을 지키기 위해, 저희 교단과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깟 이방인들을 희생시키는 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가요? 게다가 희생하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에요. 지금 저 피란체에 모인 여신님의 신도들. 수십만에 달하는 제국민들 또한 제물로서 저들의 역할을 다하게 될 거라고요!”
…뭐가 문제냐고?
나는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성을 내며 나를 꾸짖으려드는 메리엘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애초에 이런 놈이었지.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제국민들도 제물로서 바쳐질 테니 이방인들의 희생 또한 당연한 일이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잘도 그리 당당하게 내뱉는군.
“애초에, 너희 마족들이 쳐들어오지만 않았어도….”
으득-
“아, 아아아아악!”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나는, 꾹 힘을 주며 반대손에 쥔 단검을 들어 올렸다.
“제국민들의 희생? 아니, 네 연놈들은 그런 게 없었어도 네들 입맛대로 이방인들을 이용해먹다 버렸을 거다.”
“아으, 아흐윽… 소, 손목이….”
툭-
부러질 듯 억세게 붙들고 있는 손목을 들어 올려 성녀의 길고 하얀 손가락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나는, 가장 먼저 엄지손톱 아래로 날을 바짝 붙였다.
“아, 아아… 잠깐….”
쿠욱-
“끼, 끼야아아아악!”
틈새로 파고든 날이 손톱과 맨살을 가르며 신경을 마구 끊어 놓는 고통에, 메리엘은 성녀라는 이름이 아깝게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방인이든 제국민이든. 애초에 왜 그들이 희생해야 하는 거지? 네놈. 그리고 교황, 황제, 기사단장. 너희 쓰레기들은 어째서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는 거냐.”
“꺼억, 꺽… 끅….”
난 고작 엄지 하나 드러냈을 뿐인데 벌써 눈을 고개를 툭 떨군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촤악-!
“프헙! 그륵….”
곧장 옆에 있던 양동이를 들어 메리엘의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부은 나는,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은 베일 때문에 금방 숨을 헐떡이며 일어난 녀석을 향해 슬며시 손을 뻗었다.
“뭘 벌써부터 기절하는 거냐.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했는데.”
스륵-
“히, 히이이… 그만….”
나는 슬쩍 그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걷어내며, 그 아래에 가려져 있던 얼굴을 마주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은 표정이야, 메리엘.”
과연 여신의 마음에 들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난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는 깊은 흉터를 살살 쓸어 올리며, 놈이 검지를 쥔 채 피 묻은 단검을 들어올렸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스윽-
“앞으로 남은 열아홉 번 동안 다시 기절하지 않고 버틴다면, 그땐 내가 책임지고 널 보내주마.”
물론 지옥으로 말이지.
푹-
“아, 아아아아악!”
* * *
“에릭. 심문은 다 끝났나?”
“음? 아, 카렌.”
동굴 깊은 곳에서 메리엘과 단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나는, 슬며시 들어와 나를 찾는 카렌을 후련한 미소로 돌아보았다.
“꼴에 성녀라는 건지 쉽사리 입을 열지 않더군.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 본대가 올 때까지도 안 된다면 기술자에게 맡겨야겠지.”
“으음, 그런가.”
철컹-
“주, 주윽여….”
“쉿. 조용히 해라. 카렌, 아무래도 뭔가 전할 말이 있는 거 같군. 잠깐 나갔다 오지.”
나는 내 말에 뒤에서 크게 움찔거리는 메리엘의 입을 콱 틀어막으며 조용히 몸을 돌렸다.
실은 이미 처음 시작한 손의 약지를 쑤실 때부터 무어든 원하는 게 있으면 다 불 테니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고 있었지만, 난 애써 못들은 채 그녀의 고문을 계속했다.
벌써 그렇게 쉽게 놓아줄 수는 없지.
아직 새끼 하나랑 양 발톱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래, 무슨 일이냐 카렌.”
혹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간 놈이 쓸데없는 말을 떠벌일까 카렌을 데리고 자리를 피한 나는, 이내 입을 여는 그녀를 보며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에 도시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왔다. 아무래도 놈들이 그 의식이라는 걸 시작한 모양이다.”
“빛의 기둥? 음….”
그런가.
의식이 시작된 건가.
용사 시절에 한 번 겪어본, 혹은 어디서 들어라도 봤던 일이라면 좋겠지만, 지금 녀석들이 진행하고 있는 의식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
조금 아쉽지만 그만 즐기고 잠시 메리엘로부터 정보를 캘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본대는 지금 어떻지?”
“다행히 밤에는 다들 도착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보다 조금 빨리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더군.”
그거 잘됐군.
나는 카렌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슬쩍 메리엘이 있는 안쪽을 돌아봤다.
만일 정말로 본대가 돌아오게 된다면, 그녀의 신변 또한 기술자들에게 들어갈 터였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물론 고문에 있어선 오히려 그들이 나보다 몇 수는 위겠지만, 메리엘의 끝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여야만 했다.
이건 내 복수였으니까.
헌데 그들이 그녀를 맡는다면, 아무리 숙련된 기술자라 할지라도 얼마 못가 녀석의 숨통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 피란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의식은 어디까지나 교단이 주관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성녀라면 분명 그에 대한 정보 또한 알고 있을 테니, 입을 다물면 억지로라도 열게 만들려하겠지.
시간이 없으니 당연히 뒷일은 생각하지 않을 테고, 메리엘은 그 후유증으로 죽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알았다. 이만 가보도록. 금방 나가도록 하지.”
“그래. 가능하면 서둘러라, 에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메리엘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쉽지만 즐기는 건 여기까진가.
“메리엘.”
“히, 히이이익! 주, 죽여! 차라리 제발 죽이란 말이야!”
철그럭- 철걱-
나는 다시 제 앞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격하게 반응하는 그녀를 보고선, 조용히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축하한다.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어? 아, 으….”
“그전에, 하나만 답해줬으면 좋겠군.”
치익-
“아, 아아아….”
책상에 잠시 놓고 간 단검을 들어 올려 양초에 붙은 불로 날을 달군 나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벌벌 떠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피란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식에 대해 빠짐없이 말하도록.”
“무, 무슨… 무슨 짓을….”
치이이익-
“끽… 꺄아아아악!”
달군 날을 천천히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나는, 비명과 함께 꿈틀거리는 놈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마, 말할게요! 말할….”
시시하긴.
나는 고작 한 번 만에 또 의지를 굽힌 메리엘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뭐, 상관없나.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그때 다시 하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