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다음날.
본대가 오기를 기다리며 산맥에서 피란체로 들어가는 길을 내려다보고 있길 몇 시간.
“형님, 저기 보입니다!”
날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끊임없이 몰려드는 제국민들의 행렬 사이로, 꽤 커다란 마차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이내 발라크의 말에 마력을 끌어올려 강화시킨 눈으로 그쪽을 유심히 살피던 나는, 마차에 새겨진 교단의 상징을 보고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찾았군. 다들 준비하도록.”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다른 길을 찾아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당당히 정면으로 들어올 줄이야.
설마 전날 있었던 소동에 대해 전달받지 못한 건가.
아니, 어쩌면 어제 피워 올린 연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가 산맥에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산맥을 빙 둘러 북문으로 향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무얼 해도 우리를 마주치게 될 거라면 차라리 최단거리로 빠르게 돌파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한 걸 테지.
“에릭,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지금 기사들하고 마법사들이 막 성문을 나선 모양입니다.”
역시 그랬나.
나는 카렌과 발라크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성녀를 태운 마차 또한 줄을 무시하고 빠르게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둘이 중간에 합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개중에 성녀를 빼오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것 없었지만, 괜히 이후 이어질 추격에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아이시스.”
“…죽여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저래 뵈도 성녀다. 그리 쉽게 죽진 않을 거야.”
“응. 알았어.”
생각보다 빠른 마차를 보며 슬쩍 아이시스를 돌아본 나는, 혹 포로로 잡기도 전에 죽어버릴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녀도 그렇고 다른 악마족들의 마법도 무시할 바는 못됐지만, 아무리 메리엘이 여태껏 맥없이 당해오기만했다곤 한들 성녀는 성녀였다.
그 빌어먹을 여신에게서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혹 우리가 기습해오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당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미 어디선가 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맥없이 죽어버릴 만큼 모자란 녀석은 아니었다.
“카렌. 넌 혹시 모르니 저 기사들 쪽을 부탁하마.”
“음. 맡겨만 두거라.”
난 이윽고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카렌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데이몬. 바보 같은 메리엘.
기왕 호위를 보낼 거면 도시의 전력을 동원했어야지.
고작 기사단 몇과 마법사들을 가지고는 절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하긴 그러기엔 언제 또 도시 안으로 숨어들까 불안했을 테지.
쓸데없이 조심스러운 녀석 같으니.
“아하하! 전공이 한가득이네! 성녀 정도면 다 같이 나눠먹어도 당분간 공적은 문제없겠지?”
“뭣… 젠장, 놈들이 벌써! 다들 속도를 높여라!”
“예, 예? 하지만 그랬다간 줄이….”
“성녀님의 안위가 달린 문제다! 어서!”
다그닥-
나는 어느덧 저들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기 무섭게 황급히 말들을 채찍질하는 놈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켜! 다 비켜라!”
“뭐, 뭐야? 뒤에… 아아악!”
쿵-!
녀석들은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던 말던 다른 마차가 있든 말든, 비킬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흐어억! 마, 마차가… 교단이… 컥!”
서걱-
심지어 앞서 말을 몰고 있는 성기사는 방해가 되는 이들의 목을 베어 넘기는 짓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기들이 그렇게 부르짖던 여신의 자비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거 참, 흉하기 그지없군.
아무리 그렇게 아득바득 기어봐야, 이미 다 늦었거늘.
콰아아앙-!
“커억!”
“무, 무슨….”
나는 거대한 폭발과 함께 마차를 멈춰 세운 화염구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늦췄다.
앞으로 몇 개가 더 날아올지 모르는데, 괜히 들어가서 휩쓸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젠장! 위에서….”
“결국… 다들 이리로 모이세요!”
“서, 성녀님!”
난 소란에 결국 밖으로 나온 메리엘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입가를 히죽였다.
생각보다 표정이 침착한 것이, 아무래도 이리 될 줄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콰아앙-!
“여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종을 가여삐 여기셔, 마의 손길로부터 저희를 구원할 방패를 내려주소서!”
번쩍-
쏟아지는 마법들 속에서 짤막한 기도를 올린 그녀는, 이내 꼭 모은 양손에서 밝은 빛을 내뿜었다.
“자, 다들 이틈에 어서!”
금방 메리엘과 성기사들을 둘러싼 빛은 든든한 방패가 되어, 떨어지는 마법들로부터 안전하게 그들을 지켰다.
나는 그대로 결계를 유지한 채 천천히 도시에서 보낸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제국민들이, 교단의 신도들이 무력하게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저들끼리만 안전하게 결계를 친 건가.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은 했다만,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누구는 불길에 둘러싸여 타 죽어가는 채로, 누구는 폭발에 휩쓸려 사지를 잃고선 어떻게든 도와 달라 손을 내뻗고 있음에도, 메리엘은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 제물이 될 놈들이니 어찌 되든 상관없다 이건가.
하지만 그만큼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결계는 그 범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법이었으니까.
“형님, 저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나는 어쨌든 조금씩 성문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는 놈들을 보며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발라크의 물음에,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없다. 어차피 진짜는 아직 오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저쪽도 이미 수를 써놨지 않나.”
화르륵-
난 성녀 무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보며,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카렌이 일을 잘해준 모양이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거대한 불의 장벽에 가로막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툭-
“젠장, 저쪽도… 어? 이게 뭐야… 눈?”
시작됐나.
나는 머잖아 하늘하늘 떨어지기 시작한 눈들을 보며, 천천히 단검을 빼들었다.
“눈이 그치면 바로 출발한다.”
“아, 예! 형님!”
“흐응… 그 악마족 꼬맹이의 마법인가. 이건 꽤 오싹오싹한걸.”
툭- 투둑-
“이 날씨에 갑자기 웬 눈이….”
“차라리 잘됐어요. 이 정도 눈발이면 저 불길을 잡는데 조금은 보탬이….”
쩌적-
“서, 성녀님! 결계에 금이….”
“그, 그럴 리가… 어째서?”
난 천천히 쌓여가는 눈에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 결계를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이시스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겉보기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도, 저 눈발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마력은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혹시라도 맨몸에 결정 하나라도 닿는다면, 그 순간 온몸이 얼음기둥처럼 꽝꽝 얼어버릴 터.
헌데 그런 걸 몇 센티가 될 정도로 쌓아올리고 있다면…
까드드득-
카챵!
“겨, 결계가!”
아무리 강력한 결계라도 당연히 얼마못가 깨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큿….”
“모, 몸이….”
“다들 저 장벽 뒤에 있는 놈들이 불길을 꺼트리고 오기 전에 끝낸다.”
“예, 형님!”
“좋아, 그럼 성녀 말고 나머진 죽여도 괜찮은 거지?”
“뭐, 마음대로 하도록.”
나는 결국 한쪽이 깨짐과 동시에 그 위에 쌓여있던 눈발을 우수수 맞은 기사들을 보며,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아래로 달려 나갔다.
“크윽, 제기랄! 발이….”
푹-
우선 한 놈.
단숨에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 발이 꽝꽝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성기사를 처리한 나는, 메리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슬그머니 주변을 훑었다.
“흐흐, 죽어라!”
“사, 살려… 아아악!”
“이런 빌어먹을! 성녀님, 성녀님을 지켜라! 어떻게든 성문으로… 컥!”
결계가 부서지며 떨어진 눈에 휩쓸려 산 채로 얼음기둥이 된 녀석들을 비롯해, 근처에 있다 발이 묶여버린 놈들까지.
가뜩이나 제대로 맞붙어도 한참 열세였을 텐데, 시작도 전에 절반가량이 당해 버리니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다.
“아읏… 어, 어서 도망쳐야….”
“여기 있었군, 메리엘. 참 오랜만이야.”
중간중간 어떻게든 앞길을 막아서는 성기사들을 가볍게 정리하며 금방 메리엘의 앞에 선 나는, 저 또한 눈발에 휩쓸렸는지 누군지 모를 얼음기둥과 같이 팔이 얼어붙은 그녀를 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빌어먹을 여신의 개새끼를 죽이게 되는군.
그간 얼마나 참아왔던가.
이 구역질 나는 녀석을 눈앞에 두고서도, 훗날의 쓰임을 위해 살려서 보내줘야만 했던 나날들이 눈앞을 훅 스쳤다.
“네, 네놈은 그때 카르네몬에서 봤던….”
“그래,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하지.”
스억-
“…아? 아, 아아아아악! 읍….”
“쉿. 너무 소리 지르지 마. 곧 한참 지르게 될 텐데, 벌써 목이 쉬어버려선 안 되잖아?”
“흡, 흐읍….”
망설임 없이 얼어붙은 팔 한쪽을 잘라낸 나는, 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메리엘을 들쳐 업고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는 확보했다! 다들 이만 정리하고 돌아간다!”
“예, 형님!”
“어머, 아쉬워라. 벌써 끝인가?”
나는 이내 빠르게 성기사들의 숨통을 끊으며 산맥을 오르는 일행들을 보고선, 슬쩍 메리엘을 돌아봤다.
“흐, 흐으으….”
녀석은 앞으로 자기가 겪게 될 일들에 대해 대충 짐작하고 있는 건지,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거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