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동굴, 동굴이라.”
발라크와 셀레스트를 필두로 한 악마족과 늑대인간들이 남문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 북문으로 도망쳐 나온 우리는, 산길을 크게 돌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군. 분명 이쪽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피란체에 잠입하기 전, 산을 내려올 적의 풍경을 되짚어가며 잠시 거처로 쓰던 동굴을 찾았다.
남문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잦아들기 시작한 지도 거의 한 시간은 지났을 테니, 지금쯤이면 다들 돌아와서 쉬고 있어야 할 텐데…
“형님! 이쪽입니다!”
“아, 발라크.”
한참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모습을 드러낸 발라크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른 녀석들은 어디 있지?”
“다들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빨리 포기하고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이 밤중에 불을 피워서 괜히 놈들에게 위치를 밝힐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음? 불을 피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하하… 그게 실은, 최근에 건량이 다 떨어져서 말입니다. 한 사흘 정도는 산짐승을 찾아다가 끼니를 때우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걸로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양을 구할 수는 없었던지라….”
한마디로 배고프니까 들어가서 빨리 잠이나 자려고 했다는 얘긴가.
그렇게 듣고 보니 뭔가 전보다 녀석의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헌데 이상하군.
우리가 도시에 꽤 오래 머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끼니를 굶을 정도로 식량이 모자랐던 건 아니었다.
물론 모두 배불리 먹일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적당히 배급량을 조절했다면 적어도 닷새는 더…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난, 무언가를 깨닫고선 슬그머니 카렌을 돌아봤다.
“응? 무슨 일이냐, 에릭.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 녀석이 원인인가.
나는 그녀가 쓸데없이 건량을 많이 챙겨왔던 걸 떠올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덕에 큰 소란 없이 빈민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덕분에 남아있던 이들이 배를 주리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뭐 그래도 카렌 또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저 이 식탐 많은 용족이 생각 없이 과하게 챙겨 나왔던 것일 뿐.
“발라크. 돌아가면 우선 걱정하지 말고 불을 지피도록 해라.”
“예?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일 놈들이 연기를 보고 몰려온다 해도 잠시 자리를 피해있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만일 내 예상이 맞다 하면 녀석들은 오늘밤 멋대로 움직일 수 없을 거다.”
나는 정말 괜찮냐는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발라크를 향해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면 모를까.
남아있는 그 세 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놈들은 쉽사리 도시 내의 전력을 비울 수 없었다.
혹 그렇게 방비가 약해진 새에 그나마 남은 그릇들마저 살해당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선 가장 큰 재앙일 테니까.
괜히 무리할 필요 없이, 오늘 성공적으로 의식을 마치기만 하면 끝이었다.
지금 연합에게 있어 중요한 건 결국 마왕들을 타도하는 것이지, 도시를 들쑤신 마족 몇을 끝까지 쫓는 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마왕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라면, 우리들 또한 그때 같이 한번에 정리해버릴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놈들은 그렇게 판단하겠지.
물론 이렇게만 보면 단순 내 추측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릴리아나의 힘으로 매혹해놓았던 그 두 마법사.
아마 지금쯤이면 분노한 마도사단장의 명으로 도시 안쪽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사제들의 신성력에 의해, 매혹에 걸렸다는 사실이 들통났을 게 분명했다.
물론 단순히 결계 좀 치고 신성력을 흩뿌리는 정도에 걸리지는 않았겠지만, 어찌됐든 외부인의 침입이 있었던 때에 경계를 서고 있던 것이 그 둘이니, 자세히 조사하다보면 분명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두 놈이 우리에게 제압당해 빈민촌에 묶여있을 적의 기억도 돌아왔을 터.
그럼 당연하게도 그때 녀석들이 문틈 새로 본 광경까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렌이 만들어낸 그 환상 말이다.
그 짧은 경계 시간 내에 저들을 데리고 도시 밖으로 보이는 산까지 옮겼다 되돌려놓을 수 있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마 뭔지는 몰라도, 분명 단숨에 공간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 짐작하겠지.
“저, 정말로 불을 피워도 되는 거냐!”
“그래. 혹 걱정되면 내가 경계라도 서줄 테니, 고생한 만큼 마음껏 구워먹도록.”
금세 발라크를 따라 동굴 앞으로 돌아온 나는, 구석에 쌓인 짐승들의 시체를 보며 불을 피워도 된다는 말에 기뻐하는 셀레스트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꽤 많이 배고팠나 보군.
하긴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더라도 쉽사리 산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었을 테니, 어찌 산짐승들을 구해온다고 해도 마음껏 배를 채우지는 못했으리라.
고기를 생으로 먹는다고 해서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혹 누군가 탈이 날 수 있을 걸 생각하면 훗날의 전투력 손실을 염려해서라도 쉽사리 허락할 수 없었을 테지.
물론 그렇다고 아주 굶길 수는 없으니 적당히 탈이 나지 않을 만큼의 양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한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에릭.”
“아이시스냐. 나는 괜찮다. 많이 먹고 먼저 들어가서 자도록 해라. 내일… 아니, 어쩌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야.”
“…응. 그보다 이거.”
“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불을 피우고선 간만에 배를 채우는 이들을 두고 적당히 근처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나는, 한 손에 멧돼지고기로 보이는 큼지막한 뼈를 쥐고선 다가온 아이시스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수정구?”
“셀파스트한테서 연락. 그럼 이만.”
나는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꺼내 건네고선 총총총 가벼운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셀파스트한테서 연락이라니, 무슨 일이지.
“셀파스트.”
[아, 에릭. 드디어 받았나.]
“그래. 어쩐 일이지? 뭔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급하다라… 뭐, 어떻게 보면 그렇지. 어차피 너도 그쪽에 본대가 도착하면 알게 됐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먼저 알고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연락했어. 넌 사천왕들 놈들이랑은 다르게 머리를 좀 굴릴 줄 아는 녀석이니까.]
난 꽤 난감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내는 셀파스트를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 거지.
[길게 얘기할 거 없이 바로 본론만 말할게. 지금 그쪽으로 성녀가 가고 있다는 모양이다.]
“…성녀?”
메리엘이 왜 이곳으로…
“설마….”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는, 이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생각에 입술을 꾹 물었다.
이 빌어먹을… 연합 놈들, 정말로 여기서 아주 끝장을 볼 생각이었나.
[그것도 꽤 진즉에 출발한 모양이야. 내가 받은 정보대로라면 거기서 싸움이 있기 전에 도착할 거 같아.]
그 말은 당장 오늘 도착할 예정이라는 건가.
망할 년.
아무래도 그때 도시에서 도망친 이후로 교단 본청에 들르자마자 바로 이족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정보 고맙군. 알겠다.”
나는 이내 수정구를 집어넣고선, 조용히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상황에서 메리엘이 온다는 것은, 분명 이번에야말로 성역을 사용하기 위함일 게 분명했다.
실상 연합 놈들이 사용할 수 있는 패 중에서, 우리 마왕군을 상대로 그보다 더 강력한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수십, 수백만의 목숨을 제물로 압도적인 강함을 손에 넣은 이방인들과, 일순간 그 마왕들에게조차 큰 피해를 입히고 마력을 봉인시킬 수 있는 성역을 펼칠 수 있는 성녀.
거기에 수인들을 이끌고 내려올 대족장과 대주술사까지.
“으음….”
어떻게 해야 좋을까.
가만히 머릿속으로 계산을 매기던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선 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어? 에릭, 벌써 돌아온 거냐?”
“긴급 상황이다.”
“기, 긴급? 설마 인간 놈들이 벌써….”
“빨리 불 꺼, 이 바보들아!”
나는 당황하며 허겁지겁 무기를 챙기는 이들을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당장 움직일 필요는 없어. 다만 내일 새벽부터 조금 바쁘게 돌아다닐 일이 생겼다.”
“흐응… 내일 새벽부터?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난 천천히 등을 돌려 산맥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녀.”
메리엘.
제물을 받은 이방인들이 과연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연합 놈들이 마왕을 잡을 수 있을 거라 그리 자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만한 변수마저 들일 수는 없었다.
물론 예상과는 달리 내가 이방인들을 거의 다 죽여 버린 터라 생각보다 약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는데 모험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 나중에 중간계의 정복이 끝나고 나서 무언가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빌어먹을 연합 놈들의 몰살이었으니까.
“내일, 이 산맥에서 성녀를 잡는다.”
그년이 언제 피란체에 도착할 예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제국 서쪽에서 도망쳐 본청을 통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라면, 무조건 이 산맥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교단의 세를 분열시키겠다는 목적은, 그녀가 본청을 들렸을 때 이미 달성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더 이상의 쓸모는 없다는 얘기지.
“메리엘.”
안타깝게 됐군.
나는 곧 그녀가 지르게 될 비명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곧 죽여주마.
빌어먹을 여신의 개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