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회의는 여기까지.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지요.”
피란체의 영주성 내부, 널따란 회의실 안.
곧 있을 의식에 대해 긴 회의를 마친 이들은, 저마다 문을 나서 각자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단장님.”
“그래. 자네도 수고 많았네, 벨크릭스.”
그중 피란체의 영주인 후작과 함께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남자, 데이몬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 부하와 함께 곧장 영주성을 나와 이방인들이 머물고 있는 축사로 향했다.
“그릇의 상태는 어떻지?”
“다들 막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습니다. 사흘 전에 확인했을 때 의식을 버틸 수 있을만한 육체를 갖춘 녀석들이 백 명 정도, 조금 있으면 무르익을 것으로 보이던 놈들이 오십 명 정도 있었으니, 내일이면 백 칠십 명쯤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 칠십.
데이몬은 벨크릭스의 대답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부족하군. 분명 이백은 채우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것이… 본래 예정대로라면 충분히 넘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만, 갑자기 사흘 정도 의식이 앞당겨진 터라….”
“내 그러니 진즉에 훈련의 강도를 높이라 명하지 않았더냐.”
“예, 예? 하지만 그랬다간 자칫 그릇이 될 녀석들이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갈 수도 있었기에….”
“…쯧. 됐다.”
부하의 변명에 무어라 얘기를 꺼내려다 이만 마음을 접은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깟 놈들이 조금 죽어 나간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의식은 한 번뿐이었다.
아무리 그게 무리 없이 가장 많은 그릇을 다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는 해도, 그 안에 완성시키지 못한다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설령 오십이 버티지 못한다 해도 남는 것이 이백이었다.
중요한 건 당장 의식에 쓸 수 있는 완성된 그릇들의 수지, 놈들의 상태와 훗날의 기약 같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 전에 얘기한 그 셋은 어떻게 됐지?”
“아! 녀석들 말입니까? 한 놈은 아직 좀 모자란 듯합니다만, 남은 둘은 이제 기사 두셋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다는 모양입니다.”
“둘인가. 그건 썩 나쁘지 않군.”
그릇으로 준비한 이방인들 중, 유독 그 재능과 성장세가 특별했던 세 명.
데이몬은 그들을 떠올리며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남들과 같은 의식을 치른다하더라도, 모든 그릇들이 동일한 결과를 내놓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 더 많은 제물을 받아들였나에 따라, 기존에 누가 더 강했는지에 따라 이후에 얻게 되는 강함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세 명은 참 특별했다.
다른 이방인들과는 달리, 의식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빌어먹을 마왕 놈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키울 여유가 있었다면, 흔히 마왕 휘하의 사천왕들까지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는 전력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연합에게는 그를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앞으로 몇 년 정도는 마왕군의 공세를 버틸 힘이 있었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거의 백만에 달하는 제국민들과 수인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여기서 전황을 뒤집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오늘 자정이 지나도 그릇으로 써먹을 수준에 이르지 못한 녀석들은 전부 그 세 놈에게 넘겨주도록. 기본적으로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의미가 없을 테니.”
“저, 전부 말씀이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앞에 나서서 무기를 휘두를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의 경험은 그들에게 좋은 양분이 되어줄 터였다.
거기에 그를 강제당해 녀석들이 받게 될 충격은, 이후 놈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세뇌시키는 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물론 이미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충분히 절벽 앞에 내몰려있는 상태겠지만, 그를 조금 더 확실히 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본래 준비는 해도 해도 모자란 법이었으니까.
애초에 이백이라는 숫자도 그랬다.
실상 마왕들을 상대할 그릇으로 쓸 놈들은 저 셋뿐이었지만, 만약을 위해 더 준비한 것이 아니었던가.
혹 그 셋을 보고 마족 놈들이 도망칠까, 그 전에 길을 뚫기 위한 용도로 쓰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녀석들이 그리 단순히 물러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곧 있을 의식으로 만들어지는 놈들은 길어야 수명이 닷새 남짓이었으니까.
이는 혹여 마왕군이 그를 눈치챘을 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럼 들어가면 바로 시작… 음?”
그렇게 어느덧 축사 앞에 도착한 둘은, 너무나도 조용한 입구를 보고선 불안함에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이, 이게 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윽고 근처에 널브러진 제 부하들의 시체를 발견한 데이몬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노성을 터트렸다.
“대체, 대체 누가… 서, 설마!”
뒤이어 살짝 열려있는 문을 발견한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안쪽으로 향했다.
“안 돼, 안 돼! 이래서는 안 된다!”
“다, 단장님!”
건물 앞은 물론, 틈 사이로 보이는 복도에까지 핏자국이 가득했다.
“진정, 진정하십시오!”
“진정? 지금 이 꼴을 보고도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성을 잃고 곧장 건물 안을 확인해보려던 데이몬은, 저를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며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 아… 아아아악!”
시체, 시체, 시체.
복도는 물론 여기저기 활짝 열린 문 사이로도 축 늘어진 이방인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충격과 주변을 가득 메운 비릿한 피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안쪽에 발을 디뎠다.
“데이몬 님, 그만! 아직 안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놔, 놔라! 지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희망.
이들은 연합의 희망이었다.
여기서 마왕군의 세를 확실히 줄이지 못한다면, 연합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작 의식을 하루 앞두고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팍-!
“허억, 헉….”
거칠게 팔을 뿌리친 데이몬은 황급히 방을 돌아다니며 무사한 그릇이 있나 확인했다.
“젠장, 젠장!”
여기도, 저기도.
모두 시체뿐이었다.
연합이, 제국의 미래가…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란델에서 그릇들을 데리고 나올 때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습격당했다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슨 수로 마족 놈들이 에란델과 이방인들의 존재를 알고서 찾아올 수 있었을까.
혹여 누군가 포로로 잡혀 정보가 새어나가진 않을까, 의식을 집행하는 이들을 제외하고선 황족들에게조차 모든 걸 비밀로 붙였을 텐데.
또한 이번에 의식의 준비가 앞당겨지게 된 것도 그랬다.
북쪽에서부터 계속 수인족을 쫓아 내려오던 놈들이, 어째서 갑자기 이리로 진로를 바꿨단 말인가.
마치 이곳에서 곧 의식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낸 듯이 말이다.
비록 당시에는 의식을 통해 힘을 받아들이고 나면 오래 살지 못할 놈들을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겼지만…
“이런 빌어먹을!”
틀림없었다.
누군가 도시에, 어쩌면 이 내성 안쪽까지도 파고 들어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물론 진즉에 그럴 가능성 또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 그럴 때를 대비해 성내는 물론 내성 그리고 이 축사에까지도 계속 경계를 세워두지 않았던가.
“대체 어떻게….”
“다, 단장님! 있습니다! 위층에 살아남은 그릇들이….”
“뭐, 뭣? 그게 정말이더냐!”
사색이 된 얼굴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데이몬은, 위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히이이… 사, 살려… 제발, 그만….”
“비명, 비명이… 으, 아아….”
“아, 아아아!”
그는 계단을 올라 2층 복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제 부하에게 이끌려 나온 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 다행이구나! 정말로 다행이야!”
가장 특별한 세 그릇.
이들만 살아있다면 아직 활로가 남아있었다.
비록 나머지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단장님. 일단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하필이면 이 셋만 살아남아있던 것이, 혹 함정일지도….”
“그, 그래. 그러지. 당장 서두르게.”
데이몬은 부하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세 명을 데리고선 빠르게 축사를 빠져나갔다.
다행히 함정은 아니었는지, 다섯 모두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헉, 허억….”
“사, 살려… 제발, 그만….”
“비명, 비명이… 으, 아아….”
우선 급한 대로 제가 묶던 건물 안으로 들어온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선 패닉에 빠져있는 세 사람을 살폈다.
“거기 네놈들.”
“히, 히이이익! 아, 아?”
“두려워하지 말거라. 그보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 으으….”
데이몬은 아직도 공포에 질린 셋을 보고선 나지막이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진정된 셋을 다시 찾은 그는, 이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창백한 인상에 송곳니… 그리고 단검을 들고 있었다고?”
뱀파이어.
데이몬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범인의 정보에 으득 이를 갈았다.
“…에릭. 에릭 가이오스!”
빌어먹을 흡혈귀.
주어진 정보는 얼마 없었지만, 이렇게 홀로 도시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녀석은 그 하나밖에 없었다.
그 망할 놈이 어째서!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쪽의 전장에 있었을 텐데…
콰앙-!
“뭐, 뭐냐 또!”
“크, 큰일 났습니다, 단장님! 남문 쪽에 악마족과 늑대인간들 무리가….”
“이, 이 빌어먹을!”
그는 이내 밖에서 들린 굉음에 입술을 꾹 깨물며 황급히 지팡이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젠장….”
어째선지 예감이 영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