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성 안쪽으로 잠입을 앞둔 날 새벽.
나는 빈민가의 거처를 떠나기 전, 갑작스러운 연락에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에릭. 들려?]
“무슨 일이냐, 셀파스트.”
[아, 다행이네. 혹시 안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어. 아무래도 일을 좀 서두르는 게 좋을 거 같아.]
“서두르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난 수정구 안쪽에 비친 그의 난처한 표정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우리가 도시 안에 숨어든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진즉에 사제들이 신성력이 펼치며 돌아다녔겠지.
[연합 놈들이 말하는 그 제물. 수인족들이 곧 그쪽에 도착할 거야. 늦어도 오늘 밤 정도겠지.]
“…뭐?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틀은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랬는데. 최근에 놈들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야. 아마 우리가 은근히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걸 눈치 챈 거겠지.]
오늘 밤이라.
그나마 다행이군.
어차피 일은 지금 치르러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우리 쪽은 언제쯤 도착하지?”
[일러도 내일 새벽이다. 그 사이에 괜히 걸리지 말고, 잘 밖에 나와 있으라고.]
툭-
이만 수정구를 내려놓은 나는, 릴리아나와 함께 문을 나서며 카렌과 아이시스를 돌아봤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곧장 출발할 테니, 바로 갈 수 있게 준비해놓도록. 그리고 카렌. 발라크와 셀레스트에게도 전해주겠나. 곧 나갈 테니, 남문 쪽에서 시선 좀 끌어달라고 말이야.”
“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그릇이 되는 이방인들을 모두 죽이고 나면, 놈들이 혈안이 돼서 범인을 찾으러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혹여 지금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수인족들에게까지 둘러싸이게 된다면, 도망칠 길은 없다고 봐야겠지.
셀파스트가 말하길 녀석들이 늦어도 오늘 밤 정도엔 도착할 것이라 했으니, 여유롭게 저녁이 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도시 근처를 벗어나 있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당장 이곳 피란체를 지키고 있는 놈들은 여기 모인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조차 벅찰 테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멀리까지 추격해오지는 못하겠지만, 이후에 도착할 수인족들은 어떨지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흐응… 이렇게 공주님을 두고 우리끼리 돌아다녀도 정말 괜찮겠어? 새벽이라도 거리에 인간들이 저리 많은데.”
“상관없다. 어차피 네가 매혹한 빈민들이 같이 움직이며 가려주고 있으니.”
“뭐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이 녀석들 안에는 들어갈 수 없는 거 알지? 혹시라도 영주성 안쪽에서 모습을 들켰다간 보통 큰일이 아닐 텐데. 차라리 다 같이 데려와서 적당히 인간 마법사들처럼 보이게 만드는 편이 낫지 않겠어?”
“아니. 두 사람은 따로 해줘야할 일이 있다. 게다가 이젠 들켜도 상관없어. 어차피 그릇들만 전부 죽이고 바로 도망칠 테니.”
금방 내성 앞에 도착한 나는, 계획대로 문을 지키고 있는 두 마법사를 보며 슬며시 녀석들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 누군가 이쪽을 보고 있다면 충분히 수상하게 보일 행동이었지만, 릴리아나가 그동안 모아온 빈민들이 아닌 척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기에 문제없었다.
“안쪽에 사람이 있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경비를 서고 있다가 릴리아나의 의지대로 다시 흐리멍덩해진 놈은, 내 말에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좋아.”
“후후. 고마워, 얘들아. 조금만 더 수고해주렴.”
여유롭게 내성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미리 앞의 두 녀석들에게 들었던 대로 이방인들이 머무는 건물을 찾았다.
분명 영주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본디 가축을 기르던 축사라고 했었지.
“저긴가.”
내성 가장 안쪽.
나는 넓게 울타리 쳐진 풀밭 한가운데, 꽤 커다란 건물을 보고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축사도 과연 대도시를 거느린 영주의 가축들을 기르는 곳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지낼 만해 보였다.
나름 널찍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것이, 어디 빈민촌보단 훨씬 나아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거의 삼백 명 가까이 되는 인원들이 머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아닌 듯했지만 말이다.
“맞는 거 같네. 저렇게 누가 지키고 서있는 걸 보니.”
난 고개를 주억이며 울타리 앞을 가리키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조용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하암… 젠장, 피곤해죽겠네. 이놈들이 도망쳐봐야 뭐 얼마나 멀리 갈 거라고 이렇게 지키고 있으라는 건지.”
“그래도 오늘로 마지막이잖아. 어차피 교대도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
푹-
“응? 뭐야, 왜 말을 하다 말….”
스억-
“그륵….”
단숨에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놈들을 처리한 나는, 곧장 릴리아나에게 손짓하며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흐응… 깔끔하네. 너희 뱀파이어들의 자랑인 박쥐화나 혈 마법 없이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처리하다니.”
“쉿. 조용히 해라. 아직 건물을 지키고 있는 놈들이 남아있을 거다.”
나는 작게 감탄을 흘리며 따라오는 그녀를 조용히 시키고선, 천천히 축사를 향해 다가갔다.
하나, 둘, 셋… 다해서 여섯인가.
“그러니까 저번에 단장이….”
촤악-
“쯧. 경계가 형편없군.”
듣자하니 혹 이방인들이 몰래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 주변에 경보 마법을 쫙 깔아놨었다고 하던데.
미리 두 놈을 이용해 경보 마법들을 모두 지워놔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단순히 시간만 때우는 식으로 경계를 서고 있으니 말이다.
푹-
[레벨이 증가합니다.]
이걸로 여섯 명.
나는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하고선, 여유로운 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그럼 이제 여길 지키고 있던 놈들은 다 끝인 건가?”
“아마 그럴 거다. 그 두 놈한테 들은 정보가 사실이라면 말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무 시끄럽게 돌아다니진 말도록.”
“후후. 걱정도 많으셔라. 어쨌든 내가 이쪽을 맡으면 되는 거지?”
난 곧바로 1층을 둘러보러 떠나는 릴리아나를 보며, 천천히 2층으로 향했다.
몇 명이나 남기면 좋으려나.
한 명? 아니지, 혹시 모르니 한둘 정도는 더 남겨놓는 것도 괜찮겠어.
끼이익-
“으….”
2층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가장 가까이 있는 문을 연 나는, 안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조용히 그들을 살폈다.
피곤에 찌든 얼굴.
누구는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흐음.”
5평 남짓한 방에 대략 열 명 정도.
혼자 지내기에도 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는 공간에, 모두 다닥다닥 붙어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없군.,”
혹여 아는 얼굴이라도 있을까 싶어 그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젓고선 단검을 쥐었다.
하긴 내가 이 빌어먹을 연합에 불려왔을 땐, 이미 첫 소환으로부터 3년이 지난 뒤였으니까.
개중에 그때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있어봐야 뭐 얼마나 있었겠는가.
쿵-
금방 정리를 마치고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나는, 곧바로 다음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바깥에 대충 시체들을 정리해놓았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고 들키지 않을 수는 없으니.
끼익-
“아으… 뭐야, 벌써 아침… 어? 히, 히이익!”
“쉿. 조용. 그러다 다 깨겠어.”
그렇게 방을 돌아다니던 나는, 어느새 문을 두 개쯤 남기고선 처음으로 잠에서 깬 사람과 마주했다.
“사, 살려… 흡!”
여긴 세 명밖에 없나?
방은 똑같은데 유독 수가 적군.
그냥 머릿수가 딱 안 떨어져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이들이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래, 살려줄 테니 조용히 하도록.”
세 명.
음, 마침 숫자도 딱 좋군.
나는 조용히 아직 잠들어있는 둘과 깨어난 남자를 훑으며 단검을 집어넣었다.
“내 말 잘 들어라. 살고 싶으면 조용히 숨죽인 채로 당분간 밖으로 나오지 말도록. 그리고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거라.”
“으읍, 읍!”
난 온통 피투성이인 내 모습을 보고선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주억이는 그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만 방을 나왔다.
“하암… 위쪽은 아직이야?”
“거의 다 끝났다. 곧 내려가마.”
나는 그새 모두 정리를 끝냈는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릴리아나의 목소리에, 마지막 남은 방을 열고선 다시 단검을 빼들었다.
살려놓은 세 명에 대해선 적당히 그 자리에 없었던 걸로 치부하면 되겠지.
아니면 잘 숨어있었다거나.
어찌 됐든 그들에게 내 얼굴도 각인시켰으니, 이번 일이 내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지 않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비록 혹여 나중에 의심을 살까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연합 놈들 사이에서도 에릭 가이오스는 꽤 유명한 편이니 못 알아볼 걱정은 없겠지.
흰색 머리의 흡혈귀.
그중에서 이렇게 적진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녀석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이제 곧 그 셋이 그릇으로 제물을 받아 정말 마왕들을 죽이게 된다면, 다른 그릇들을 모두 깨부순 내 공적 또한 확실해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혹시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발록이나 용족들은 모르겠지만, 혈마왕이 죽는다면 남은 뱀파이어들 중에선 공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실력 또한 사천왕들에 비해 밀릴 게 없었으니까.
정당성이야 뭐, 적당히 카르카쉬의 인정을 받으면 그만일 테고.
“다 끝났다.”
“흐응… 정말 다 죽인 거 맞지?”
이윽고 금방 계단을 내려온 나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릴리아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주억인 난, 곧바로 그녀를 데리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남은 건 카렌과 아이시스를 데리고서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