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도시 안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온 지도 어느덧 엿새.
셀파스트를 통해 연합 놈들이 이곳 피란체에서 꾸미고 있는 계획의 위험성에 대해 보고를 마친 나는, 금방 심각성을 인지하고서 이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마왕들을 기다리며 조사를 계속했다.
지금 제국 북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벨제붑과 카르카쉬를 제외한 다섯 마왕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길어봐야 나흘 남짓.
동시에 연합이 제물로 써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수인족 무리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놈들의 계획을 망쳐놓아야만 했다.
만일 실패한다면, 하다못해 지금 모여 있는 녀석들만이라도…
“슬슬 오는군.”
나는 교대를 위해 저 멀리 내성을 나오는 황실 마법사를 보며, 조용히 릴리아나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그동안 빈민촌에서 몰래 하나둘씩 매혹해놓은 빈민들에게 신호를 보내, 곧 교대하는 놈이 서게 될 가게 앞을 가리도록 했다.
“빌어먹을. 어제보다 더 북적이는구만. 이래서야 이젠 뭐 문제가 생겨도 누가 그랬는지 찾을 수도 없겠어.”
“조금만 참아. 이제 계획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잖아.”
“그 얼마 안 남았다는 말, 벌써 며칠째 듣고 있는 건지 알아? 젠장, 그 망할 수인 놈들. 도대체 위에서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올 거면 좀 빨리 오던 할 것이지. 어쨌든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서 쉬어.”
난 곧 안쪽에 있던 놈들과 교대하는 두 마법사를 보며, 슬쩍 거리 중앙에 우뚝 솟은 시계탑을 훑었다.
지금 시작은 저녁 여섯 시.
그간 놈들의 뒤를 밟으며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황실 마도사단이 배정받은 장소는 이곳을 포함한 건물 다섯 개. 그리고 2인 1개조씩, 한 번에 두 시간 동안 경계를 보는 셈이었다.
그 말은 즉, 다음 교대자가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서 녀석들을 다시 자리에 돌려놓아야 된다는 소리였다.
“아이시스. 시작한다.”
“응.”
우리는 전번 근무자들이 교대를 마치고 금방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행동을 시작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빡빡한 것도 아니었다.
괜히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들키지 않도록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는 거였으니까.
“앞으로 두 시간 동안 또 지루하겠네. 뭐 재미있는 얘기 없나?”
“재미있는 건 몰라도 소름 끼치는 얘기는 하나 있는데. 우리 오늘 새벽 네 시에도 한 번 더 나와야 돼.”
“뭐? 진짜? 아이 씨… 원래 저녁에 들어가면 그날 새벽엔 없는 거 아니었어?”
“사흘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제물들이 더 많아져서 들어가야 될 곳이 하나 더 늘었잖아. 그래서 이번에… 응?”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자리에 앉아 편히 경계를 서는 놈들을 보며, 슬며시 아이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짓했다.
각자 한 명씩.
혹여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제압해야 했다.
“거기 너네! 여기 앞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글귀 못 봤… 컥!”
먼저 한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쏘아져 나간 나는, 그대로 놈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뭐, 뭐야! 네놈….”
쩌저적-
“읍, 으읍!”
이윽고 남은 녀석이 잽싸게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곧바로 아이시스가 마법으로 놈의 입과 발을 얼려버렸다.
“켁, 케엑….”
난 목이 죄인 채 괴로워하다 금방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녀석을 보며, 다음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으, 으으읍! 읍….”
녀석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손을 피하려 들었으나, 발이 묶여 있는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툭-
“아이시스.”
“응, 풀었어.”
머잖아 제 일행과 마찬가지로 힘없이 축 늘어진 놈을 보고선 아이시를 부른 나는, 놈의 발을 붙들고 있던 얼음이 금세 녹아내리는 것을 확인하며 두 녀석을 들쳐업었다.
“카렌.”
“음, 알았다.”
뒤이어 카렌의 마법을 통해 놈들의 모습을 가린 나는, 그대로 행인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빈민가로 향했다.
“으음… 흐억! 여, 여긴….”
그대로 가능한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집으로 들어가 두 녀석들을 천장에 매단 나는, 도중에 정신을 차린 놈을 보며 짐짓 감탄을 내뱉었다.
“벌써 정신이 들었나? 훌륭하군. 마법사치곤 꽤 단련한 모양이야.”
“너는… 네, 네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뭐야, 한 명 일어났네. 흐응… 튼튼한 놈들보단 아닌 쪽이 더 홀리기 쉬운데.”
“무, 무슨… 설마 마족?”
저와 똑같이 옆에 묶여 있는 일행을 보며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빨리 풀어 달라 성을 내던 녀석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온 릴리아나를 보고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떻게 마족이….”
“그건 네가 궁금해할 필요 없다. 그리고 너무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당장은 너흴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 당장은 말이야.”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 대체 무슨 꿍꿍이를….”
짜악-!
“으으….”
주저리주저리 무어라 입을 여는 녀석을 두고 아직까지 기절해있는 놈의 뺨을 후려친 나는, 옅은 신음과 함께 일어난 녀석을 보며 릴리아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긴… 테브리스? 너 왜 묶여 있는… 어, 어?”
절그럭-
“후후.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남자를 보며, 살포시 미소와 함께 그들의 앞에 섰다.
“어차피 모두 잊게 될 테니까.”
나는 릴리아나의 눈이 보라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것을 보며, 조용히 녀석들의 상태를 살폈다.
“하. 모두 잊는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네놈들이 어떻게 도시 안으로 숨어들어 와서 우릴 납치한 건진 모르겠지만, 곧 단장님께서 우리가 사라졌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너흴 찾아내실 거다!”
역시 마법사들은 무린가.
그것도 어디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고 꼴에 황실 마법사라 그런지, 쉽사리 매혹에 걸려들질 않았다.
뭐 대충 예상은 했다만.
“누굴 찾겠다고? 흐흐. 웃기지도 않는군. 설마 지금 여기가 아직도 도시 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 뭣?”
그래봐야 결국 매혹될 때까지 놈들을 몰아넣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혹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이미 카렌에게 환영마법으로 주변을 덧씌워달라고 부탁해놓은 뒤였다.
끼이익-
“아, 아아… 어떻게….”
“마, 말도 안 돼!”
슬며시 뒤쪽의 문을 연 나는,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에 절망하는 놈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름드리 높이 솟은 나무들이 우거진 산 정상.
그리고 저 멀리 아래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성벽.
지금 발라크와 셀레스트가 머물고 있을, 이 피란체 근처 산맥의 풍경이었다.
“안타깝지만, 아무도 너흴 구하러 올 수 없어.”
꾸욱-
“아, 아아아악!”
난 놈들의 귀에 조용히 말을 속삭이며, 가능한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부위들을 골라 괴롭혔다.
놈들의 눈에서 희망이란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또 계속.
* * *
“에릭, 다 끝났나?”
“그래.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더군. 아무도 저들을 구하러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야.”
나는 완전히 눈이 풀어진 두 놈을 뒤로하고, 이만 밖으로 나왔다.
세 시 사십 분.
녀석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걸릴 시간을 생각하면, 슬슬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두 녀석을 둘러맨 나는, 카렌의 마법으로 놈들의 모습을 지운 채 아까 그 건물로 향했다.
툭-
“좋아. 다행히 별일 없었나 보군.”
조심조심 들키지 않게 둘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는 데 성공한 나는, 이만 건물을 나서며 릴리아나를 돌아봤다.
“이만 정신을 돌려놓도록.”
“걱정 마, 이미 해놨으니까.”
난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으으… 머리야. 스읍, 잠깐 졸았나? 테브리스, 테브리스!”
“어, 어어? 뭐야. 벌써 교대시간인가?”
“너까지 잠들었던 거야? 으, 젠장. 설마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훌륭하군.
이만하면 들킬 걱정은 없겠어.
남은 건 놈들에게 심어놓은 대로, 녀석들이 영주성을 지키는 때에 몰래 숨어드는 것뿐이었다.
“그릇이라….”
두 놈 또한 저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려 드는 건지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녀석들은 그저 이방인들을 그릇으로 삼아, 지금 이곳에 모인 인간들과 곧 내려올 수인들을 제물로 의식을 치를 예정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그 그릇만 다 부순다면, 의식이고 뭐고 전혀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꼭 다 없앨 필요가 있을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왕군 쪽에 기울어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여기서 놈들이 어찌 마왕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아직 카르카쉬와 벨제붑이 남아있었다.
엘프 여왕과 교황이 죽었고, 드워프들은 일단 장비만 원조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또한 제국과 수인 연합도 이런 무리한 작전에 제 백성들을 갈아 넣어야할 만큼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두 마왕만으로도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연합을 몰살시킬 수 있을 터였다.
“에릭,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빈민촌으로 돌아와 적당한 집에 자리를 잡고 누운 나는, 한참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슬며시 말을 붙여오는 카렌을 보고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한둘 정도는 남겨놓는 게 좋겠군.
조금은 여기서 마왕군의 세를 줄여놓을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그래야 복수와 함께 중간계의 정복이 모두 끝나더라도, 혹여 버려질 걱정은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