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47화 (147/200)

제147화

딸랑-

“음. 이거 참 곤란하군.”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여관을 나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음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걸로 벌써 열 번째.

당장 잘 곳을 못 구해 거리에 볏짚을 까는 사람들이 널린 것만 봐도 쉽진 않을 줄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네. 그만큼 웃돈을 쳐주겠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안 된다니. 녀석들 입장에선 원래 묵던 손님한테 배로 돈을 물어준다고 해도, 오히려 남는 장사인 거 아닌가?”

나는 계속되는 거부에 슬슬 짜증이 올라온 셀레스트를 보며,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본래 하룻밤 머무는 것에 필요한 가격의 세 배를 쳐주겠다고 해도, 다들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앞으로 계속 장사할 것을 생각해 신용을 지키기 위함인 걸까.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라기에는 별로 그렇게 좋은 여관들을 들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까봐 일부러 조금 값싸 보이는 곳들로만 고른 거였으니까.

“그런데 에릭. 그걸 안 받는다고 해서 굳이 이렇게 계속 돌아다닐 필요가 있느냐? 세 배로 안 된다면 열 배. 그도 안 된다면 결국 될 때까지 액수를 높이면 되는 것 아닌가. 딱히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그러면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바로 방을 구할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래서야 눈길을 너무 끌어버릴 거다.”

카렌의 말마따나 그냥 되는대로 웃돈을 쳐준다면 방 자체를 구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다만 그래서는 앞으로 정보 수집을 위해 여관 밖을 돌아다니기가 곤란해질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세 배씩만 부르고 다녀도 여기저기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다섯 배 열 배를 부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그 여관뿐만 아니라 바깥까지 소문이 다 퍼져선, 자칫 몰래 방을 털어버리려는 녀석들까지 나올지 몰랐다.

안 그래도 슬슬 노숙하는 자들 중에,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범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중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우리가 당해줄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그들로 인해 바깥에 병사들이 쫙 깔려버렸다는 거였다.

지금 정체를 숨기고 몰래 숨어들어와 있는 우리 입장에선, 굳이 이쪽 잘못이 아니더라도 괜한 일로 소란에 얽히는 것 자체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혹여 병사들의 눈에 띄어 조사라도 받게 되는 순간, 계획이 어떻게 꼬여버릴지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으음,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괜히 이목을 끌어버려서 좋을 건 없겠지.”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그럼 방을 어떻게 구할 건데? 계속 이렇게 방을 내주는 곳이 나올 때까지 돌아다니다간, 결국 밖에서 노숙하게 돼버릴걸.”

확실히.

나는 릴리아나의 말에 침음을 흘리며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대로 가다간 끝내 마구간에서 적당한 볏짚 하나 구해선 맨바닥에 누울 지경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그 볏짚이나 남아있을지 모르겠군.

물론 우리가 어디 밤바람 좀 쐬면서 잠든다고 몸살이 날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노숙을 하기엔 짐이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카렌이 마법으로 가려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빵빵한 배낭이 드러나 버렸다간 또 무슨 시비에 휘말릴지 몰랐다.

“…별 수 없군.”

웃돈을 너무 많이 쥐어줘서든 건량이 가득한 배낭 때문에든 결국 눈길을 끌게 될 거라면, 여관에 방이라도 잡는 편이 좋았다.

거리 한복판에서 난리가 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관 안쪽에서 문제가 생기는 편이 나았으니까.

하다못해 건량이라도 지킬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꾸욱-

“음?”

그렇게 근처 아무 여관이나 둘러보며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누군가 소매를 꾹 잡아당기는 느낌에, 슬며시 옆을 내려다봤다.

“에릭, 저기.”

조용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아이시스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품에 작은 빵조각을 하나 들고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소년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혹여 음식을 뺏길까 조마조마하면서도 곧장 먹어치우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지금 들고 있는 건 자기 몫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언제 또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 아껴먹으려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소년의 몸이 꽤 말라보였다.

발걸음도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힘없이 비틀비틀 거리고.

“좋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잘했다, 아이시스.”

“…응.”

나는 금방 아이시스의 뜻을 파악하고선, 일행들을 데리고 천천히 소년의 뒤를 밟았다.

아마 저 빵은 제 가족에게 줄 몫인 거겠지.

거기에 형편이 좀 모자라 보이긴 해도 머리가 떡지지 않고 옷도 노숙하는 이들에 비해선 훨씬 깨끗한 것이, 어디 빈민촌에라도 지낼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릭, 지금 저 소년을 쫓고 있는 건가?”

“그래. 카렌, 건량 좀 약간만 부탁하지.”

“건량 말이냐? 잠깐만 기다려봐라.”

바글바글한 사람들의 시선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배낭을 뒤적이는 카렌을 따라 잠시 걸음을 멈춘 나는, 곧 그녀에게서 건량을 받아들곤 빈민촌으로 보이는 골목에 들어섰다.

제 배를 곯으면서까지 가족이 먹을 것을 챙기는 소년과, 마침 식량은 많지만 지낼 곳이 필요한 우리.

난 곧 소년의 앞을 막아서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얘야.”

“네, 네? 저요?”

나는 당황한 얼굴로 저를 가리키는 소년을 보고선, 웃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 안 돼요! 이건 저희 엄마가 드실 거란 말이에요!”

녀석은 이미 몇 번이고 식량을 노려진 적이 있는 모양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손에 쥔 빵을 꼭 끌어안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뭐야, 방금. 뭔 소리야?”

“드실 거? 으, 음식! 제발, 제발 조금만 나눠줘! 요 며칠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어. 제발….”

“아, 으….”

나 참, 귀찮게.

하필이면 소리를 지르다니.

“어, 어떻게… 읍!”

“릴리아나.”

“흐응… 알았어.”

나는 소년의 말에 반응해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선, 소년의 입을 콱 틀어막으며 이쪽으로 당기고선 릴리아나를 바라봤다.

“머, 먹을….”

툭-

“됐지? 그런데 결국 이럴 거면 애초부터 매혹을 쓰는 편이 낫지 않았겠어?”

“아니. 여긴 어디까지나 빈민촌 골목이라 병사들도 없고 보는 눈도 적으니 부탁한 거다. 거리 한복판에서 그랬다면 주변이 뻥 뚫려있으니, 무언가 이상이 생긴 걸 눈치 챈 사람들이 곧바로 병사들을 불렀겠지. 물론 지금도 그리 안전하다고는 못하겠군.”

난 이래도 괜찮으냐는 듯한 릴리아나의 눈빛에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여관과 다른 가게들이 줄지어있던 거리보다야 낫겠지만, 여기라고 마냥 문제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분명 어딘가는 그녀의 매혹이 미치지 못한 경계가 있을 것이고, 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눈앞에 넋을 놓아버린 사람들을 보며 무슨 일인가 싶을 테니까.

물론 그들이 수상함에 병사를 불러오더라도 머잖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을 보고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만에 하나 재수 없게 근처에 사제라도 있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놈들이 도시 안에서 결계를 펼쳐대기라도 한다면, 일이 많이 골치 아파질 테니까.

“이만하면 됐나. 지금 풀어줄 테니 가능하면 조용히 하도록. 딱히 네 음식을 뺏을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방금 전 릴리아나가 매혹을 뿌린 장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나는, 아직 버둥거리는 소년을 보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아! 사, 살려… 살려주세요, 어르신. 제발….”

드디어 내 품에서 벗어난 녀석은, 아무래도 아까 사람들이 넋을 놓고 인형처럼 변해버린 광경을 봐서인지 눈물 맺힌 얼굴로 제 목숨을 구걸해왔다.

딱히 해코지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뭐, 됐나.

이 편이 더 써먹기 좋을 거 같으니.

부스럭-

“…아?”

“건량이다.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우린 널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 대신 이걸 받고 네 집에서 며칠 머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군.”

“그, 그건….”

나는 어느새 제 손에 쥐인 건량을 보고선 슬며시 이쪽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모습에, 조용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저희 집은 되게 낡고, 좁고….”

“괜찮다. 벽하고 지붕만 있으면 그만이니까.”

녀석은 잠시 건량과 나를 번갈아보며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됐군.

이러면 이제 숙소는 문제없겠어.

“릴리아나.”

“응?”

“집에 들어가면 바로 저 녀석까지 전부 매혹시키도록.”

“…아까는 분명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거리 한복판에 있었을 때의 얘기지. 여관에서도 혹시 다른 도시에서 온 사제나 기사들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했던 거다. 하지만 이런 빈민촌에 그런 놈들이 있을 리가 없지.”

“흐응… 그런 거였어? 뭐, 알겠어.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나는 내 설명에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이는 릴리아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기에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소년의 집은 그래도 빈민촌 입구에 붙어있었는지, 아까 도망치면서 지나온 거리를 한참 되돌아가고 나서야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음….”

…본인 입에서 낡고 좁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거 참 상상이상이군.

넷이서 누울 자리나 있을지 모르겠어.

“다들 괜찮나?”

“뭐가 말이냐. 이 집을 말하는 건가? 문제없다. 그동안 본녀가 동굴에서 몇 번이나 노숙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조금 좁긴 하지만 뭐, 지금은 딱히 뭘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응. 문제, 없음.”

그렇다면야 다행이군.

나는 저마다 고개를 주억이는 일행들을 보며, 소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남은 건 연합 놈들이 여기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자세히 조사해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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