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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흡혈로 무한성장-146화 (146/200)

제146화

“아주 바글바글하구만. 어이, 에릭. 저거 정말로 괜찮겠어?”

에레브를 나와, 중간에 텅 빈 마을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발걸음을 재촉한 지도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피란체.

제국 북부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도시를 눈앞에 둔 나는, 산맥 아래로 보이는 높다란 성벽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 오히려 사람이 많은 만큼 숨어들기에는 더 편할 거다.”

나는 도시 안쪽은 물론 성문 앞에도 잔뜩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몇 명은 데리고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보통이라면 전쟁 통에, 그것도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몰래 숨어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당장 몰린 인원들조차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원래는 적당히 꿍꿍이만 캐낸 뒤 밖으로 나와 본대를 불러들일 생각이었지만, 이러면 얘기가 좀 달랐다.

나름 전술병기라고 할 수 있는 카렌과 아이시스를 도시 안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굳이 본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우리끼리 놈들의 계획을 완전히 부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자세한 건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걸로 모두한테 챙겨줄 공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만일 우리끼리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도, 본대와 함께 안팎으로 도시를 헤집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릴리아나, 아이시스, 카렌. 준비해라. 우린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

“예? 형님, 저는….”

“발라크. 넌 남아서 셀레스트들과 악마족과 함께 자리를 지키다, 내가 수정구로 신호를 보내면 밖에서 시선을 끌어라. 안쪽에서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좋겠지만, 혹시 또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그때 도망치려면 누군가는 이쪽으로 몰릴 병력을 분산시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저를 가리키는 발라크를 보고선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히 짐을 챙겼다.

만일 본대가 올 때까지 도시에 남게 된다면 그들이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도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다못해 일이 잘 풀려서 우리끼리 계획을 전복시키게 되더라도,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선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물론 성벽이 워낙 높고 튼튼해 보이는지라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시선을 꽉 붙잡아두기 힘들겠지만, 이들 정도면 그래도 작은 틈을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그를 위해서 조금 무리한 부탁이 되더라도 다들 전선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였으니까.

“다들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하지.”

“응. 준비, 끝났어.”

“조, 조금만 기다려라 에릭!”

“어머, 공주님도 참. 챙길 게 많나 보네.”

나는 아직도 한참 길게 늘어진 줄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세 사람을 데리고 산맥을 내려갔다.

“음. 이거 한참 걸리겠군. 카렌, 마력은 괜찮겠나?”

금방 줄 끝에 도착해 차례가 오길 기다리며 앞을 살피던 나는, 잘못하면 반나절도 걸릴 수 있을 거 같은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카렌을 돌아봤다.

본래대로라면 줄이 아무리 길어도 두어 시간이면 다 들여보낼 수 있을 텐데.

도시 안쪽이 미어터질 정도로 가득 차버린 데다, 성문을 지키고 선 경비들도 지친 기색이라 속도가 많이 느려진 듯 보였다.

“단순히 마법을 유지하는 것 정도야 하루 종일이라도 문제없다. 다만 도시 안쪽이 너무 북적여서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환각마법은 어디까지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거지, 있는 걸 없애주는 게 아니니까.”

그것도 그렇군.

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릴리아나를 슥 훑는 카렌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 당장은 전보다 그녀의 마력 컨트롤이 월등해진 덕분에 움직여도 마법이 풀리지 않아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지만, 직접 몸에 닿는다면 보이는 것과의 괴리에 누군가 이상함을 눈치챌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그것도 카렌이나 아이시스처럼 뿔만 나있는 거라면 딱히 부딪힐 일도 없겠지만, 릴리아나의 경우엔 날개도 그렇고 꼬리도 나 있었으니까.

충분히 남에게 들킬 우려가 있었다.

“뭐야,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흘끗거리더라니. 그게 문제였어? 후후.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꼬리야 잠깐 옷 안쪽으로 집어넣으면 되고, 날개도 잘 접으면 그렇게 걸리적거리지 않으니까.”

“그런가. 그럼 문제없겠군.”

나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선 슬쩍 뒤로 손을 뻗어 허공을 만지작거리는 릴리아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지금 꼬리를 넣은 거 같은데 눈엔 보이질 않으니, 무슨 마임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 공주님은 아까 뭘 그렇게 많이 챙기던데. 대체 뭘 준비한 거람? 궁금한데, 여기서 열어봐도 되나?”

“될 리가 없지 않느냐. 혹시 몰라서 배낭도 마법으로 가렸는데. 지금 그랬다간 허공에서 물건이 나오는 걸 보고 다들 이상하게 볼 거다.”

“흐응… 궁금한데.”

카렌은 릴리아나의 물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거 때문에 위에서 출발이 좀 늦어지긴 했지.

대체 무얼 그리 챙겨 넣었던 건지, 나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나, 봤어. 안에 먹을 거 잔뜩.”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옆에서 가만히 붙어 따라오고 있던 아이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먹을 거?

건량이라도 챙긴 건가.

“뭐, 뭣? 아, 아니다! 별로 그렇지는….”

“아니, 부끄러워할 거 없다. 생각해보니 나도 좀 챙길 걸 그랬군. 그냥 막연히 도시 안쪽에서 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사람이 저리 많아서야 웃돈을 쳐줘도 못 살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먹을 것만 잔뜩이 아니라! 으….”

난 배낭이 빵빵해지도록 식량을 채워 넣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소리를 높이는 카렌을 보고선,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게다가 방금 그 말 또한 단순히 그녀를 달래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당장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시간이 꽤 걸리고 있는데, 저런 상황에서 먹을 게 있어 봐야 뭐 얼마나 남아있겠는가.

나도 건량을 아예 안 챙겨온 건 아니었지만, 끽해야 내 몫만 조금 챙겨왔을 뿐이었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잘하면 본대에게 연락하고 그들이 올 때까지 열흘은 안쪽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만일 안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자칫하면 지금 다시 돌아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정지.”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우리는 아까 산맥을 내려올 적에만 해도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기웃기웃 넘어갈 때가 다되어서야, 드디어 경비병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지?”

“에레브에서 왔습니다.”

“에레브?”

“예. 여기서 마차로 나흘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작은 마을?”

뭐가 문제지?

나는 작은 마을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수상한 눈길로 이쪽을 훑는 경비들을 보고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이놈이 에레브 출신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랬다면 마을 이름을 말했을 적에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되묻진 않았을 터였다.

“이상하군. 마을이면 기사님들이나 마법사님들께서 한꺼번에 데려오셨을 텐데.”

…그런 거였나.

하긴 도시야 영주가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기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영지민들을 억지로 내보낼 수 있었겠지만, 작은 마을 같은 경우엔 그런 통제가 불가능하니 따로 사람을 보내 한 번에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레브도 마법사들이 다 억지로 끌고 갔다고 했었지.

이거 참 낭패로군.

“하하… 그게 말입니다. 저희가 마을 옆에 붙어있는 숲에 잠시 나가있던 동안, 마을 어르신들이 전부 사라지셔서요. 간신히 촌장님 댁에 놓여 있던 쪽지를 읽고서 이렇게 뒤늦게라도 찾아온 겁니다.”

“흐음…”

젠장, 일이 꼬였군.

나는 가능한 무난하게 말을 지어내 봤지만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경비를 보며,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나.

“릴리아나.”

“괜찮겠어?”

“그래. 어차피 주변에 사람도 많으니까, 마법사가 있어도 쉽사리 눈치채진 못할 거다.”

“뭐, 그렇다면야.”

“너희들, 뭘 그렇게 쑥덕이는 거냐. 설마 이상한 수작이라도… 으, 으응?”

빠르게 릴리아나와 대화를 마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나는, 금방 눈동자가 흐리멍덩해지는 경비를 보고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능하면 조용히 통과하고 싶었는데.

“이만 비켜줄래?”

“…예. 들어가십시오.”

철컹-

난 릴리아나의 말에 곧바로 창을 거두는 경비들을 지나쳐, 빠르게 도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저기요? 경비병님!”

“…응? 방금… 아, 정지!”

나는 이윽고 뒤에서 멍하니 서있는 경비를 재촉하는 사람을 보고선,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금방 정신을 차렸나.

한 번 매혹에 걸린 상대는 풀릴 때까지 어느 정도 텀이 있기 마련이었다.

만일 그동안 릴리아나가 따로 무어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방금처럼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망가진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나마 녀석이 평범한 병사긴 해도 어느 정도 마력이 있는 놈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주변의 이목을 다 끌어 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음, 어찌 들키지 않고 들어왔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빠르게 이동하지. 우선 숙소부터 잡는 게 좋겠어.”

난 슬쩍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이거 참, 릴리아나도 데려와서 다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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