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그, 그런….”
“이제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나 싶었더니….”
나는 단호한 내 대답에 절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그들의 수를 훑었다.
다해서 대강 사백 명 정도.
내가 이 빌어먹을 곳에 끌려왔을 적에 비해, 초창기에는 한 번 이방인들을 불러들일 때 그 절반도 안 되는 수밖에 소환할 수 없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한 번 소환에 많아야 이백오십 명쯤 됐으리란 얘기였다.
“형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표정이….”
“모자라.”
“예?”
살인적인 훈련량에 픽픽 죽어 나갈 인원들을 생각해봐도, 사백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었다.
황태자를 고문해 성물이 사라졌다는 정보를 들었을 적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을 생각해보면, 못해도 소환의식을 세 번은 치렀을 터.
그러니 최소 육백 명 정도는 되어야 했다.
이거 어쩌면 가장 처음 끌려온 1기생들은 이미 전선으로 보내졌을지도 모르겠군.
“허나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어디까지나 아직 너희를 믿을 수 없기에 풀어줄 수 없는 거니 말이다.”
“아! 그 말은….”
“그래. 만일 이 중에 거두어서 우리 마왕군에 득이 될 거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원하는 대로 자유를 내려줄 수도 있다. 물론 충분히 공을 쌓는다면 그에 맞는 대접도 주어지겠지.”
나는 희망찬 소식에 눈을 크게 뜨는 이방인들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그 망할 여신의 저주를 받은 덕에 성장은 빠르겠지만, 실제로 그를 제대로 써먹기까진 못해도 연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충분히 승기를 굳히고 있는 마왕군의 입장에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확실하지도 않고 적지의 인간들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분명 다른 인간들처럼 포로로 잡혀 노역을 당하든, 화살받이로 앞에 내세워지던 하겠지.
“저,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원래 의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국인지 연합인지 하는 놈들의 얘기를 듣길, 그쪽 마왕군 분들이랑 지금 전쟁 중이시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여기저기 부상자들이 나오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제가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저도 화약을 다루는 일을….”
물론 그중에도 스스로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몇 존재했다.
현대의 기술 대신 신성력과 마력이 자리 잡은 이곳에서도, 충분히 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일부 전문직들이 그러했다.
어쩌면 그들은 원하는 대로 바라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봐야 마족이 아닌 인간이니 능력만큼의 대우는 받지 못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포로들 중에선 나쁘지 않은 취급을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흐응… 확실히, 쓸 만해 보이는 아이들이 몇 명 있네.”
“특히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놈은 나도 조금 탐나는데. 무리에 한 명쯤은 끌고 다녀도 괜찮겠어. 우리 늑대인간들이 타종족보다 재생력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큰 상처들은 부담되는 건 사실이니까. 벌어진 곳만 제대로 꿰맬 수 있어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
특히 제가 의사라고 나선 두 남자는 셀레스트도 눈독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족들 중에서도 그런 치유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수가 모자란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쪽은 쉬이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우기가 어려우니까, 이번 전쟁을 통해 한몫 챙겨보려고 하는 이들 사이에서 유독 인기가 없는 직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자연치유력이 좋은 마족들은, 적당히 약초를 짓이겨 바르거나 상처가 곪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기만 해도 며칠이면 말짱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보통 제가 속한 부대에 치유사를 배정받는다고 해도, 그 실력이 자주 격한 전투를 벌어야하는 현 상황에선 별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인 놈들이 많았다.
“크윽…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도 기술이나 배우는 거였는데!”
생각보다 호의적인 일행들의 반응에, 그런 전문적인 능력이 없는 이방인들의 속만 더욱 타들어갔다.
아쉽지만 이 녀석들까진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래야할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결국 마왕들을 모두 잡고 마왕군을 이 대륙에서 몰아내야만 했으니까.
반대로 연합 놈들을 죄다 찢어발겨야만 하는 나와는 처음부터 양립할 수가 없었다.
적.
한때 같은 처지였기에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지만, 지금 그들과 내 사이는 명백한 적군이었다.
“다들 조용. 너희들의 처우는 마왕님들께 보고 드린 이후에 판단하도록 하겠다. 단 그전에 한 가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딱 한 명. 여기서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아는 거라면 무어든… 아니, 모르더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서로 손을 들며 자처하는 이들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만하면 못 들을 걱정은 없겠군.
“그럼 아이시스. 부탁하겠다. 처음 이곳에 소환됐을 이방인들, 그들의 행방을 아는 이가 있는지 보도록. 보상은… 그래, 적당히 군량 좀 쥐어주면 되겠군.”
“…응. 그럼 에릭, 지금 보고하러?”
“음. 금방 돌아오마.”
잠시 아이시스에게 뒤를 맡기고 광장을 벗어난 나는, 보고를 위해 악마족 병사가 챙겨온 짐을 뒤져 수정구를 꺼내 한적한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크게 사상자 없이 빨리 일을 끝내서 다행이었다.
더구나 알바트를 사로잡고 황실 기사단도 여기서 전멸시켰으니, 공적을 좀 챙겨달라고 하기에도 면목이 좀 서겠지.
물론 포로들의 처우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아이시스. 어떻게, 쓸 만한 정보가 좀 있던가?”
“아, 에릭. 응.”
카르카쉬와 직통으로 연결된 수정구가 없어 셀파스트를 통해 보고를 마친 나는, 썩 괜찮은 표정으로 광장에 복귀했다.
“그런가. 그거 다행이군. 그래서 1기생들은 지금 어디 있다던가.”
“일주일 전, 마법사들이랑 같이 북쪽으로 갔다고 했어.”
“…북쪽?”
“응. 거기서도 의식, 치른다고 했어.”
북쪽, 그리고 의식.
아이시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당장 크게 밀리고 있는 서쪽이나 남쪽 전선으로 보내졌으리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북쪽으로 갔다는 말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더구나 의식이라니.
분명 이방인 소환에 쓰이는 성물은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심지어 그건 우리가 조금 전에 제단과 같이 부숴버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동시에 이방인들을 불러들이려는 속셈은 아니었을 테고.
대체 그들을 데려가서 무슨 의식을 치르려고 하는 거지?
“…그거, 누가 말한 거지? 자세히 좀 얘기를 듣고 싶군.”
“저기, 쟤.”
아이시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홀로 사람들과 떨어진 채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남자를 보고선 천천히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으으….”
“거기.”
“힉! 네, 네!”
저를 부르기가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마치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갈피를 못 잡은 채 허우적거렸다.
이런 녀석을 믿어도 되는 걸까.
일단 척 보기에도 제정신은 아닌 거 같은데.
“1기생들이 마법사들이랑 같이 북쪽으로 갔다고 했다던데.”
“예, 예! 맞습니다. 분명, 분명 북쪽으로 간다고 했어요.”
“그 말, 확실한가? 혹시 같잖은 수작을 부리려드는 거라면….”
“아,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미, 믿어주십시오!”
나는 경고의 의미로 슬쩍 살기를 일으키자 흠칫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를 보고선, 슬그머니 릴리아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사실이야. 아까 매혹을 걸어봤을 때도 대답이 똑같았거든.”
“…매혹은 만능이 아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뭐, 그야 그렇지. 아무리 매혹을 걸더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은 말할 수 없으니까. 만일 그놈들이 일부러 저 아이한테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면 낭패겠지.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이미 저기 있는 기사님한테도 물어봤으니까.”
…그런가.
난 슬쩍 알바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릴리아나를 보고선, 나지막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놈한테서까지 교차검증이 끝났다면 적어도 함정은 아니겠군.
“그럼 됐다. 아, 혹시 그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나?”
“으, 저 그게….”
뭔가 있긴 있나보군.
나는 의식에 대해 묻자마자 떨림이 거세진 남자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썩 마음에 드는 얘기가 나온다면 내 너는 특별히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약속하마. 어디 한 번 말해 보거라.”
“아….”
조용히 그의 앞에 걸터앉아 꾹 닫힌 입이 벌어지길 기다린 나는, 머잖아 조심스레 입을 여는 남자를 향해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제, 제물….”
“제물?”
“네, 네. 분명 제물로 쓴다고 했어요. 그거라면 분명히 마왕들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그게 무슨…
이제 막 불러들인 지 끽해야 석 달 남짓한 이방인들을 가지고 어떻게 마왕들을 죽이겠다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흘러 넘길 수는 없는 얘기였다.
황제를 비롯한 그 더러운 연합의 수뇌부들이라면, 또 무슨 악독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제물이라.
도대체 그들을 제물로 바친다고 해서 무얼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마왕을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언한 걸 보면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았다.
“…알았다. 릴리아나. 일단 적당히 먹을 것 좀 던져주도록.”
이만 릴리아나에게 남자를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곧바로 알바트가 묶여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건 좀 자세히 파봐야겠군.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절대 네놈들 마음대로는 안 될 거다.
빌어먹을 황제, 망할 교단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