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피, 피해!”
“바, 바위… 커다란 바위가….”
처음 기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봤을 적엔 주먹만 하던 운석은, 점차 크기를 키우며 땅에 가까워졌다.
“저, 형님. 이거 저희도 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확실히. 다들 좀 더 물러난다!”
금세 놈들이 둘러싸고 있는 제단만 한 크기가 된 운석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발라크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황급히 다른 이들을 데리고 멀찍이 자리를 벗어났다.
“부단장님!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안 된다. 아직 의식이….”
“지금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런 게 떨어지면 의식이고 뭐고, 저희들까지 같이 개죽음당할 뿐이라고요!”
물론 기사들 또한 가만히 운석이 떨어지길 기다리진 않았다.
일의 중요성 때문인지 알바트만큼은 어떻게든 맞서보려는 눈치였으나, 이내 옆에서 자신을 뜯어말리는 부하들을 보고선, 하는 수 없이 사제와 마법사들을 버리고 등을 돌렸다.
“빌어먹을, 그럼 성물이라도… 읏! 무슨….”
사제와 마법사들은 다시 구하면 되고, 재단도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성물만큼은 이방인을 소환하는 의식에 있어, 절대 대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대주교가 있는 곳을 돌아보며 걸음을 옮기려던 알바트는, 꿈쩍도 하지 않는 다리에 당황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 다리가….”
그는 발은 당연하고 허벅지 아래까지 얼어붙은 제 몸을 보고선, 악귀처럼 인상을 팍 구겼다.
블리자드.
카렌의 미티어 스트라이크가 놈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 때까지 절대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도록, 그들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준비한 마법이었다.
“이런 젠장!”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상체까지 타고 오르는 냉기에 이를 악문 알바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운석을 보고선 질끈 눈을 감았다.
콰아아아앙-!
“우윽!”
“조심해라.”
운석이 떨어지는 사이 병사들을 데리고 산맥 근처까지 도망친 나는, 충돌과 함께 뒤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에 휘청거리는 카렌을 붙잡아 세우며 이만 걸음을 멈췄다.
“고, 고맙다.”
“무얼. 너야말로 수고했다, 카렌.”
천천히 뒤를 돌아본 나는, 예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십여 분이 넘도록 영창을 계속해야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그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용사 시절, 마룡왕이 사용하던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이보단 조금 얌전한 편이었는데.
물론 그때도 도시의 성벽 하나는 가뿐히 무너트리는 수준이긴 했지만, 이렇게 주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리지는 않았다.
설마 단순히 마력만으로 따지자면 카렌이 제 아비보다 한 수 위라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 든 생각을 날려 보냈다.
아마 방어 마법과 결계의 유무 때문에 차이가 난 거겠지.
그 시절엔 연합의 일원들을 제외하고도 충분히 실력 있는 이방인 마법사들이 즐비하던 때였으니까.
실제 위력은 좀 더 낮더라도, 지금처럼 기밀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인원들로만 꾸려 몰래 의식을 치르느라, 방어 마법도 결계도 따로 치지 못한 녀석들 위로 직격한 쪽이 더 강한 파괴력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음? 왜 그러나, 에릭. 호,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카렌은 그런 내 반응이 어딘가 심각해 보였는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붙여 왔다.
문제라.
앞으로 그녀를 상대해야 하는 연합 놈들의 입장에선 확실히 문제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웃으며 반길 일이었다.
카렌의 성장은 곧 내가 부릴 수 있는 전력의 상승을 뜻하는 거였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네 마법에 조금 감탄하고 있었을 뿐이다. 전보다 확실히 강해졌군. 항상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보람이 있겠어.”
“으, 으흠! 그야 당연하지. 본녀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룡왕 카르카쉬의 핏줄이자, 고귀한 용족의 일원.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계와 이곳 중간계마저 다스릴 마왕이 될, 카렌 레비아탄이다!”
나는 간만의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목소리를 높이는 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슬슬 내려가지. 아이시스, 불 좀 꺼줄 수 있나?”
“…응.”
초원에 옮겨 붙은 불을 꺼트리며 완전히 움푹 파인 구덩이 안쪽으로 발을 내디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재단 터를 보고선 슬쩍 카렌을 돌아봤다.
확실히 방금 그녀의 말마따나 마왕의 핏줄답게, 재능 하나는 압도적이었다.
아무리 제 마력만을 사용해 돌을 깎는 것이 그를 다루는 데 있어 효과적인 수련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마법을 쓰고 다닐 만한 기회는 많지 않았는데.
단순히 마력의 컨트롤만 높아진다고 해서 마법의 위력이 눈에 띄게 늘고 그랬더라면, 마법사의 길을 택했던 이방인들이 마법 또한 따로 연습하고 그러진 않았을 터였다.
“완전히 박살이 났네. 누가 용족 공주님 아니랄까 봐, 마법 하나만큼은 진짜 무식하게 강하구만.”
나는 이 무지막지한 광경에 혀를 내두르는 셀레스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완전히 박살이 났다는 그 얘기 그대로, 재단은 물론이고 그를 둘러싸고 의식을 진행하고 있던 사제와 마법사들 모두 육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있었다.
언뜻 보면 막 운석이 닿기 전에 다들 도망갔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텅그렁-
다만 바닥 여기저기 틀어박힌 갑옷 파편들과 제단이 서 있던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성물 조각이, 그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 하나도 안 남았군.”
그래도 기사들만큼은 시체가 남아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설마 그들마저 통째로 지워버릴 줄이야.
하다못해 알바트 정도는 흡혈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형님, 바로 출발하십니까?”
“아, 그래. 그래야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이만 구덩이를 벗어난 나는, 각자 원래 있던 전장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전에 눈앞의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이야 내가 어떻게든 모두에게 공적을 챙겨주겠다고 큰소리치긴 했지만, 아무리 마룡왕의 신임을 사고 있다고는 한들 별다른 증거도 없이 공을 인정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아이베른과 그 패거리를 죽인 탓에 벨제붑의 미움을 산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이곳에서 놈들이 몰래 이방인들을 소환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증명해줄만한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서 들고 갈 필요가 있었다.
“릴리아나.”
“왔어? 생각보다 늦었네. 그 어마어마한 마법이 땅에 떨어진 지 꽤 된 거 같은데.”
“우리도 휩쓸릴까 봐 조금 멀리까지 피했다 돌아오느라 말이야. 그보다 여기도 문제 없이 끝낸 거 같군. 고생했다.”
“뭐, 어차피 전력이라 할 만한 놈들은 다 그쪽에 나가 있었으니까.”
나는 먼저 도시로 가 무사히 점령해놓은 릴리아나와 악마족들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성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제단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선 이곳 에레브에 남은 대기인원들이 도망치며 자료를 들고 갈까 싶어 안배를 해두었건만.
다들 진즉에 일을 마친 듯 편안하게 앉아 쉬고 있는 걸 보니, 차라리 여기서 몇 명 정도는 빼두었을 걸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랬다면 카렌과 아이시스의 마법이 떨어지기 전에 조금은 시체를 챙길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맞다, 에릭. 그러고 보니 아까 그쪽에서 기사 한 명이 도망치던데.”
“응? 누가 말이냐.”
“글쎄. 입고 있는 갑옷을 보아하니 꽤 중요한 녀석인 거 같더라고. 그래서 일단 붙잡아놨는데….”
천천히 말을 줄이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나는, 도시 중앙에 있는 우물 앞에 묶여있는 기사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바트!”
“흐응… 반응을 보니까 잡아두길 잘한 거 같네.”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시뻘겋게 젖은 붕대로 꽁꽁 싸매져 기절한 녀석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놈들이 더 없는 건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개중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녀석이 어째 살아있어 다행이었다.
솔직히 대주교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흡혈한다고 해서 과연 능력치가 올랐을지는 미지수기도 하니, 사실상 이걸로 챙길 수 있는 건 대부분 다 챙겼다고 봐도 될 거 같았다.
“일단 적당한 곳에 옮겨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푹 쉴 수 있게 해주도록. 그랜드 마스터인 가제프가 단장으로 있는 기사단의 부단장이니까, 잘하면 쓸 만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거다.”
“어머. 그럼 혹시….”
“뭐, 마음대로 해라. 심문은 네게 맡기지.”
난 쓸 만한 정보, 즉 그럴싸한 공적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눈을 빛내는 릴리아나의 모습에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바트는 일단 그녀에게 맡기도록 하고, 나는 우선 이쪽부터 정리해야겠지.
“제, 제발 이것 좀 풀어주세요!”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여기 있던 그 망할 놈들한테 멋대로 끌려와선, 원하지도 않은 훈련을 받고 있던 것밖에 없다고요!”
아이시스를 따라온 악마족들이 광장 한가운데 모아놓은 이방인들을 마주한 나는, 팔다리가 묶인 채 억울함에 소리치는 그들을 보고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들을 다 어떡한담.
“거, 거기! 그쪽이 대장이죠? 저희는 당신들이랑 싸울 생각 없어요. 이걸 믿어주실 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저희들은 여기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싸울 이유도….”
“조용.”
가만히 그들의 처우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이내 결심을 굳히고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풀어줄 수 없다.”
“그, 그런!”
“왜, 왜! 방금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우린 애초에 너희랑 싸울 생각이….”
콰앙-!
후두둑-
“히, 히익….”
“조용히 해라, 인간. 지금 형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나.”
나는 잠시 소란이 일었다 발라크의 주먹에 맥없이 무너지는 건물 벽을 보고선 잦아드는 주변을 슥 훑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간단한 얘기다. 너희를 믿을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들은 절대 풀어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