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아무래도 그 인간 놈들이 제대로 해낸 모양이네. 솔직히 그런 잔챙이들로 정말 이 녀석들 눈을 속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러니까, 형님께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 않나. 늑대인간.”
사제와 마법사들을 지키고 둘러싼 기사들은 제국 최고라는 말이 무색하게, 평범한 늑대인간들에게마저도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다들 빠르게 정리하고 성물을 부순 뒤, 각자 전선으로 복귀한다! 그대로 밀어붙여!”
“크윽….”
분명 기습을 당하긴 했어도, 그들의 대처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크게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열을 맞춰 검을 뽑아든 것은, 적이 보기에도 충분히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침착함도 거기까지.
제아무리 평소 고된 훈련으로 어떤 악재도 극복할 수 있게 단련된 엘리트들이라고 한들, 그들이 그렇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되는 마력이 봉인된 상태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흐흐. 죽어라, 인간….”
쩌억-!
“캬아악! 크르륵…”
물론 고작 마력 하나 쓸 수 없다고 해서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기사단 내에서도 특출나다 할 수 있는 몇몇은, 단순 신체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늑대인간들의 공격을 흘려내고 있었으니까.
“다들 침착해라! 갑자기 마력이 안 써진다고 해서 당황할 것 없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는 우리가 더 우위에 있다. 둘이서 하나, 셋이서 둘을 맡는다면 충분히… 큿!”
콰아앙-!
“끄윽, 팔이…!”
“음? 마력을 못 써도 이 일격을 받아낼 수 있는 인간이라니. 훌륭하군. 마음 같아선 멀쩡할 때 한 번 붙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형님께서 빨리 정리하라고 하셨으니, 어쩔 수 없군.”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늑대인간을 상대할 적의 얘기였다.
뭐 그렇다고 셀레스트가 이끄는 무리에 속한 놈들이 정말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해서 발라크나 셀레스트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흐읍!”
콰작-!
“커억!”
한 방. 혹은 많아야 두 방.
그 이상 쇳덩이 같은 발라크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다른 때였다면 굳이 받지 않고 옆으로 피하든 했겠지만, 지금 기사들의 뒤에는 지켜야할 사제와 마법사들이 서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의식이 끝날 때까진 그들을 지켜내야만 했다.
“다들 잘하고 있군. 이만하면 금방… 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던 나는, 순간 싸한 느낌에 흠칫 몸을 빼며 단검을 들어올렸다.
카앙-!
“…단검 두 자루를 부리는 뱀파이어. 그래, 네놈인가. 카르네몬에서 성녀의 목숨을 노렸다는 녀석이.”
“나를 아나? 이거 참 영광이군.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께서 알아봐 주시다니.”
알바트 베리엘.
나는 기사들 중에 유일하게 시퍼런 검기를 뿜어대고 있는 남자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랜드 마스터인 가제프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이자, 한때 그의 동기로서 차기 단장직을 두고 다투던 실력자.
지금도 충분히 괴물 같은 재능을 가졌지만, 그보다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그 또한 마흐제브의 제자가 되어 가제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베리엘 공작가의 차남으로서, 어쩌면 가제프보다 더 귀족주의적인 녀석이기도 했고 말이다.
“잡담은 필요 없다. 더러운 마족 놈. 도대체 무슨 수로 이곳을 알아낸 건진 모르겠지만, 이 이상 네 마음대로 의식을 방해할 수는 없을 거다.”
나 참, 웃기지도 않는군.
애초에 본인이 먼저 말을 붙여놓고는 이제 와서 잡담은 필요 없다니.
하긴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지.
무얼 하든 제멋대로에,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그저 말을 할 줄 아는 짐승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쓰레기.
하다못해 이방인들이 아닌 다른 평범한 제국민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가제프와는 달리, 그들에게조차 뒤에서 씹힐 만큼 악독한 놈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이방인들만 고기방패로 써먹는 가제프에 비해 다른 병사들조차 망설임 없이 미끼로 써먹는 그가 적어도 이방인들 입장에선 조금 더 나아 보이긴 했지만, 그런다고 이놈이 죽일 놈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흐읍!”
캉-! 카가각-
“으음….”
매섭게 몰아치는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내며 조금씩 뒤로 밀려난 나는, 얼마 받아내지 않았는데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팔을 보며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엔 그저 악으로라도 검기를 끌어 올린 줄 알았건만, 아직도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는 걸 보아하니 아예 물을 마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목이 마르지 않았던 혹은 의식의 준비를 위해 돌아다니느라 바빴던, 어느 쪽이 됐든 참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언제까지 막기만 할 거지? 생각보다 실력이 형편없군. 홀로 성녀를 지키던 호위들까지 뚫고 그녀의 목을 노렸다기에 조금은 기대했건만.”
“…확실히, 아직 혼자서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힘들겠군. 그래도 꽤 따라잡았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헌데 분명 아까 전에 잡담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후웅-
계속 놈의 공격을 받아내다 슬슬 저릿한 손목에 뒤로 한 번 크게 빠진 나는, 곧바로 이쪽에 따라붙는 알바트를 보며 조용히 칼날을 쥐어 상처를 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무슨… 흡!”
카가각-
“…놈, 같잖은 수를 쓰는구나.”
“같잖은 수라니, 이거 섭섭하군. 혈마법이다. 우리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자들만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이지. 네놈이 좋아하는 것 아닌가? 선택받은 소수들만이 누리는 특권 같은 거 말이야.”
일순간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진 핏물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자리에 멈춰선 그는, 수십 개나 되는 창을 가까스로 모두 쳐내고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용사 시절에 지켜봤던 알바트의 실력은 대충 사천왕급.
기사단을 이끌고 가제프와 함께했을 적에는 능히 투마왕과도 대적을 이룰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다른 기사들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도망치긴 했지만, 그때보다 경험이 모자른 지금만 하더라도 충분히 사천왕 하위급은 될 터.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혈마법까지 써야만 간신히 동수를 이뤄볼 정도라니.
보잘것없는 평범한 임프들과 별반 다를 게 없던 반푼이의 몸으로 꽤 올라오긴 했다만, 나도 아직 한참 모자란 거 같았다.
“별수 없나. 가능하면 이대로 우리들끼리만 해결을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다! 다들 뒤로 빠져라!”
“뭣… 도망인가? 빌어먹을 마족 놈, 이대로 그냥 보내줄 것 같나!”
아쉬운 표정으로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알바트를 슥 쳐다본 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빠르게 달려드는 녀석을 피해 박쥐로 흩어져 자리를 벗어났다.
“벌써?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을 텐데.”
“형님 명령이시다. 바로 나오도록.”
“칫… 얘들아, 그만!”
“뭐, 뭐야? 왜 갑자기… 노, 놓치지 마라! 어쨌든 등을 보인 지금이 기회다! 바로… 큿!”
금방 머지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내 명령에 따라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한 늑대인간들의 뒤를 노리는 놈들을 향해 혈마법으로 만든 창을 날려 견제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계속 싸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슬슬 의식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콰드득-
나는 무언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제단 위 허공에 금이 가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카렌, 아이시스. 준비됐나?”
“거의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난, 끝났어.”
카렌과 아이시스.
작전대로 나와 발라크 그리고 늑대인간들이 기사단의 시선을 끄는 동안 우거진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서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곧장 쏴버리도록.”
나는 무사히 도망친 늑대인간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하는 수없이 다시 사제들 곁으로 돌아간 기사들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가능하면 이 둘의 도움 없이 끝내고 싶었는데.
사제와 마법사들을 지키느라 자리를 뜨지 못하는 녀석들을 정리하기엔 마법이 확실하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사들은 몰라도 나머지들은 과연 시체가 멀쩡하게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마 힘들겠지.
그래도 기사들이랑 대주교만큼은 멀쩡했으면 좋겠군.
콰즈즈즉-
“…에릭.”
“서두를 거 없다. 아직 좀 남았으니까.”
나는 갈수록 더욱 커지는 균열을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아이시스를 보고선,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의식이 모두 끝나려면 아직 저기서 3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허공에 생겨난 저 구멍에 못해도 사람 두셋 정도는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확보돼야 했으니까.
“다 됐다.”
난 늦지 않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블리자드.”
번쩍-
이윽고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쪽에서 환한 빛과 함께 방대한 양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이걸로 더 이상 이방인들은 소환할 수 없겠지.
수인 놈들이 제 땅을 버려가면서까지 억지로 제국 안쪽에 자리를 잡으러 내려오는 것도,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짓이 되어버렸다.
콰가가각-
“읏… 뭐, 뭐야. 갑자기 한기가….”
“설마 그 마족 놈들이 아직… 어, 어어? 저, 저기 위에….”
참 안타깝군.
대족장도 대주술사도.
저들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는 이 장면은 눈앞에서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쿠구구구-
나는 아직 동이 다 트지 않아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거대한 운석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지었다.